076. 이미 아는 얼굴2021.05.25.
“걱정 마.”
빙글 돌아 에반을 마주한 클로이는 요만한 동요 없이 매끄럽게 웃었다.
“다들 깜빡하는 모양인데, 아르네는 감히 내가 버리거나 외면할 수 있는 게 아니지.”
허리를 곧추세운 클로이는 그 어느 때보다 위엄 넘치고 당당했다.
“충언과 건방의 경계는 그리 선명하지 않으니, 조심하는 게 좋겠어.”
“주제넘었습니다. 공녀님.”
에반은 지체 없이 허리를 숙여 제 죄를 빌었다.
“몸이 매여서인지 부쩍 잔걱정이 늘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러자. 그럼.”
클로이는 오래 끌지 않았다. 밤 나들이야 아는지 몰라도 로지처럼 반밖에 모를 테고 그나마도 곧, 끝이다. 굳이 크게 성내 일을 키울 필요는 없다. 침대 앞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클로이는 공작의 손을 찾았다. 이제 의식이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그 손이 더 따뜻한 듯도 싶었다. 말없이 손만 맞잡고 있던 그때 향긋한 향과 함께 찻잔이 티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가져다드릴까요?”
“응? 아니, 차 마시다 아빠랑 눈 마주치면 곤란한 일이 생길 거야.”
높은 확률로 쏟을 테니까, 아빠가 데일지도 모르지. 이것 봐, 고작 상상만으로도 손이 이렇게 떨리는데. 클로이는 살짝 웃으며 공작의 손을 놓았다. 하지만, 그들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어?”
공작의 손이 그녀를 움켜쥐고 있었다.
“아빠?”
한 번 겪었으니, 두 번째는 그래도 조금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보다 두 번째가 더 감동적일 줄은 정말 몰랐다. 누가 코를 잡아 비튼 것처럼 찡하게 울리며, 당장 눈물부터 쏟아졌다.
“아기. 또 우는구나.”
“아빠.”
“우리 귀염둥이, 잘 지냈니?”
“아니. 아빠가 보고 싶어서 매일 울었어요.”
아르네의 귀염둥이라는 말은 진짜였다. 클로이는 마치 열 살배기 꼬마인 듯 말을 가리지 않고 울고 툴툴거리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저런.”
공작은 웃었다. 오랜 시간 쓰지 않았던 근육이 움직이느라 평소보다 화사하진 않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에겐 그 어느 때보다 값진 미소였다.
“아빤, 우리 귀염둥이가 웃는 편이 더 좋으니까, 얼른 일어나야겠구나.”
“아빠. 오빠도 깨워주세요.”
“엘리오는 아직이니?”
아르네 공작은 클로이의 말에 놀라지 않았다. 그는 기억이 끊어지기 전 자신과 아들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반드시’라고 할 만큼 죽음을 확신했다. 상대는 죽음을 각오하고 덤볐고 그는 살려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았기에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치명상이라고 부를 만한 상처가 한두 군데가 아니라 살아남은 게 기적이었다.
“엘리오는…….”
“오빠는 아빠보다 더 빨리 나았는데, 아직까지 잠만 자요.”
숨이 붙어 있다면야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에반이 꼼꼼히 살폈고, 거버가 최선을 다했을 테니 후유증도 생각보다 가벼울 거라 그는 근심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공작은 걱정을 숨기려 애써 뾰로통한 척하는 딸을 보며, 입술을 늘였다.
“엘리오야 워낙에 잠꾸러기잖니. 좀 봐주렴.”
잠긴 목소리는 한마디 한마디를 더 할 때마다 조금씩 매끄러워졌다. 하지만 늘어진 몸은 목소리와 달리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공작은 딸의 젖은 뺨을 쓸어 닦아주고 싶었으나, 지금은 작은 손을 쥐고 있는 것도 버거웠다.
“갑자기 졸려. 아빠 우리 내일 만나요.”
“그럴까.”
후들거리는 팔을 눈치챈 모양인지, 아쉬워하는 표정을 해선 쥐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뺀다. 착해라. 예쁜 아기. 내 귀여운 딸. 마지막 시선에 너무도 담고 싶었던 사랑스러운 막내. 그런 클로이를 이렇게 다시 보게 되게 될 줄이야.
“내일 아침에 올게요.”
“잘 자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입술 앞에 보들보들한 뺨이 내밀어졌다. 공작은 기쁘게 입을 맞춰주었다.
“내일 보자꾸나.”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아무도 모르리라.
평소 제아무리 심란해도 눈만 감았다 뜨면 아침이었건만 클로이는 처음으로 잠을 자지 못했다. 밤새 가슴이 두근거려 잘 수 없었다. 심지어 졸리지도 피곤하지도 않았다.
“……하. 이게 사랑의 힘.”
아침 시중을 들던 로지의 표정이 더럽게 구겨지자 클로이가 거만하게 덧붙여졌다.
“아빠 말이야. 아빠. 아빠랑 어제 밤에 또 이야기했거든.”
“아아……. 그럼 죄송합니다.”
“그, 조건부 사죄는 뭐지?”
“크흠.”
헛기침하며 딴청을 피우던 것도 잠시. 로지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클로이를 바라보았다.
“혹시, 문을 여실 생각이세요?”
“아니?”
“아, 역시. 그렇죠?”
“그렇지.”
“다행이에요. 사실 이주민을 찾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서요.”
가슴에 손을 얹어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는 로지는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주민이 꽤 좋은가 보지?”
“좋고말고요. 벌써 초소 두 군데나 채웠다잖아요.”
“오우……. 그건 좀 괜찮네.”
“그럼요. 그뿐인가요? 그냥도 아니고 암살자에 황궁 근위대 소속의 기사라고요. 다들 기본이 되어 있어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몰라요.”
“……로지, 기뻐 보여.”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하……. 한겨울에 초소 근무를 한번 서고 나면 입이 돌아가는 것 같다고요. 초소 근무자가 많아지면 당번도 줄겠죠.”
아……. 그런 거였구나. 클로이는 로지의 기쁨을 단박에 이해했다. 공작가의 비밀스러운 일을 처리하는 그림자 기사단을 제외한, 북부의 기사들과 사냥꾼들은 모두 의무적으로 초소 경계를 서게 되어 있다. 작년에 제1 사냥꾼이 된 클로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북부에서 나고 자라 추위를 버티는 데는 이만하면 이골났다 싶었는데,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바람을 곧장 후려 맞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진짜 살이 깨지는 것 같았지.”
“아가씬 그래도 신참이라 두 번밖에 안 하셨잖아요. 3년 지나면 신참 특혜도 사라진다고요. 어후……. 전 그걸 겨울에 열 번씩 해요.”
오……. 이런. 제1 사냥꾼이라 두 번이나 경계를 선 게 아니라, 봐줘서 두 번이었다고? 클로이는 얼굴을 바짝 굳혔다. 반드시 레이얼과 결혼한다. 가급적, 빨리. 공작이 알았더라면 뒷목을 잡고 다시 쓰러질 만한 결심은 이렇게 생겨났다. * * *
“키릭슨 얼굴이 좋아 보이는군?”
“간밤, 가족들을 만나고 왔거든요.”
생글거리는 그의 말에 레이얼이 잠깐 멈칫하다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기쁜 밤이 되었겠어.”
“반쪽의 기쁨이죠.”
이 제국의 모든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시오도르의 뒤에 누가 있는지를. 키릭슨은 다 죽어가는 몰골의 황제 옆에서 처연한 표정을 짓던 캐서린 황후의 모습을 떠올렸다. 안색이 어두워 다들 모르고 넘어가는 것 같았지만, 그의 눈을 속이긴 어렵다. 눈그늘을 제외하곤 캐서린 황후는 지극히 멀쩡한 모습이었다. 부스스해진 머리며, 피로에 전 표정은 하루이틀만 푹 자면 좋아진다. 그의 눈에 비친 캐서린 황후는 기생충이었다. 다 죽어가는 숙주를 안타깝게 여기는 기생충. 하지만, 절대 아쉬워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그녀에겐 그 누구보다 거대하고 확실하면서도 배신의 여지가 없는 ‘내쉬’ 황자라는 새로운 숙주가 있으니까. 이제 와 황제가 딱하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황제는 줄리아나 황후 서거 후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굴었다. 혹자는 황제가 상실감에 미쳐 변했다고 하지만, 키릭슨은 회의적이었다. 상실감에 미쳤다면, 캐서린 황후가 설명되지 않는다. 캐서린 황후는 그 어느 구석도 줄리아나 황후와 닮지 않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문가 출신의 줄리아나 황후는 백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자애롭고도 현명한 군주였다. 그러나 캐서린을 보라. 길롯이라니. 서쪽 구석에 처박힌 이름만 남은 귀족가가 아니었던가. 오빠인 길롯 백작의 그늘에 가려져 기본적인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 그녀가 처음 황궁에 왔을 적엔 정말이지 끔찍했다고 했다. 봐줄 만한 건 꿀을 졸인 것 같은 미소와 기민한 눈치뿐이었다고 했다. 할 줄 아는 것은 사치와 어리광이 유일하고 넘치는 것은 욕심만이 가득한 미인. 황제는 바로 그런 것을 계비로 삼은 것이다. 그런 황제이니 미안함이나 염치 따위가 떠오를 리 없다.
“흐음…… 반쪽의 기쁨이라.”
레이얼의 혼잣말에 키릭슨은 순간, 뜨끔했다. 사이가 나쁘다고는 하나, 레이얼은 황제의 친자이다. 그의 앞에서 황제의 죽음을 바란다는 말을 너무 노골적으로 한 건 아닌가 싶었던 것도 잠시였다. 키릭슨은 성년식도 치르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했던 어여쁜 제 사촌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전, 하루빨리 전하의 즉위식을 보고 싶습니다.”
“…….”
“그 어느 때보다 성대하고 화려한 즉위식을 말입니다.”
“생각만 해도 들뜨나?”
“그럼요.”
벌겋게 젖은 눈을 해서 키릭슨이 살짝 웃었다.
“감격해서 울지도 몰라요.”
“저런. 감동의 눈물은 거절하지.”
“받아주세요.”
키릭슨은 레이얼에게 다가가 살갑게 웃었다. 제 아비의 몰락을, 이토록 간절히 바라는 이를 부관으로 삼아야 하는 레이얼의 비참함은 눈감아 버릴 생각이었다. 어차피, 레이얼 황태자는 열 살 이후 부모를 모두 잃은 것과 진배없지 않나. 그러니까. 그러니까.
“전 전하를 평생 충심으로 모실 겁니다.”
“네가 징징거리는 꼴을 평생 보라는 건가? 끔찍하군.”
여느 때와 같은 소리라고 생각했던지 레이얼은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키릭슨은 이 순간 무섭도록 진심이었다. 전하, 오늘의 미안함과 이기심은 두고두고 갚겠습니다. 소리 없는 다짐이 옅은 미소 뒤로 깔렸다.
날이 저물고 달이 뜨자 클로이가 레이얼을 찾아왔다. 받아 갈 것이 있었다.
“오늘도 없다고? 설마, 구할 수가 없어?”
“아니, 도면도는 진작에 가져다 두었다.”
“그런데 왜 없다고 한 거야?”
“길롯 백작이 내부 수리 중이다.”
“아…….”
보통 레이얼은 목표물이 생기면 다음 날로 도면도와 기사 배치도를 구해주었다. 그런데 길롯이 이상하게 오래 걸린다 했더니 그런 속사정이 있을 줄이야. 이거 참 끝까지 짜증나게 구는 게 길롯답다고 해야 할까.
“조금만 더 기다리렴.”
“응 뭐. 정 안 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일단 잠입해보지 뭐.”
“기분이 좋아 보여.”
“나쁠 게 뭐가 있겠어.”
덤덤한 듯 이야기하지만, 클로이는 구름 위를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공작은 긴 잠에서 깨어난 뒤로 빠르게 회복하고 있었다. 오늘부터 거버가 공작의 굳은 관절을 풀어준다고 했다. 에반이 돌보는 내내 움직여주고 주물러주었다고는 하나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거버는 엘리오 소공작에게도 똑같은 처방을 내렸다. 엘리오의 경우는 무리해서 몸을 썼기에 어쩌면 공작 쪽보다 예후가 나쁠지도 모른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아직 이십 대 중반밖에 안 된 젊은 소 공작에게 예후라는 단어가 말이 됩니까 나 원참!’
얼굴이 벌게져서 버럭 소리를 지르던 거버가 순간 떠올랐다. 제가 처방해놓고 제가 역정내는 모습이라니…….
“흐음…….”
웃겼지.
“늘, 궁금했다.”
상념에 빠졌던 클로이는 레이얼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런 표정을 짓게 하는 네 가족이, 항상 궁금했어.”
“그런 표정?”
“웃는 얼굴.”
언제나처럼 듣기 좋은 나직한 목소리에 늘 그렇듯 옅게 웃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클로이는 그가 외로워 보였다. 이상하게도 말이다.
“가족 이야기에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건 어떤 기분일…….”
“전하.”
클로이는 레이얼의 말을 뚝, 자르며 생긋 웃었다.
“전하도 나랑 이야기할 때 늘 웃고 있어.”
“응?”
“우리도 가족이잖아.”
“……뭐?”
살짝 당황한 듯한 그를 향해 클로이가 샐쭉한 목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마지막 피앙세가 되어달라더니, 그냥 해본 소리였어?”
“그럴 리가 있나!”
눈꼬리가 붉게 물들어 낮게 부르짖는 남자의 얼굴은 확실히 조금 전보다 생기 있어 보였다.
“그럼 궁금할 게 없네? 여태, 궁금해하던 거 이미 다 하고 있었으니까.”
클로이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제 그만 이리에 와서 안아줘. 안아주고 싶은 얼굴이야.”
레이얼이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