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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 한밤의 속삭임 (73/121)

073. 한밤의 속삭임2021.05.14.

이제와 무를 수도 없다. 클로이는 한껏 심란했다.

“내쉬가 길롯의 보물이라니. 뻔쩍거리는 다이아몬드가 웃을 소리네.”

툴툴거린다 한들 사람들 사이에서 내쉬 황자는 이미 길롯의 보물로 기정사실로 되어버린 후였다. 가뜩이나 내쉬에게 날을 세우는 남자아닌가. 그의 불쾌감은 불안함에서 기인된 것이다. 그러니까…….

“어휴.”

한숨과 함께 클로이가 제 머리를 아프게 쥐어뜯었다. 산발이 된 모습에 로지가 소리를 꽥꽥 질러댔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생각 없이 내린 결정에 늘 위태로운 남자가 또다시 불안에 떨지 모르니, 이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어휴……. 진짜 별게 다 보물이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닌데요 뭘. 레이디가 아주 잘 봤죠.”

끝까지, 산뜻하게 구는 로지의 모습에 클로이는 말없이 제 머리를 한 번 더 쥐어뜯었다. 벌이다 벌. * * *

“전하?”

그날 밤, 레이얼의 침실로 슬그머니 들어선 클로이가 답지 않게 소심한 목소리를 냈다.

“오늘도 올 필요는 없었는데?”

서류를 정리하는 레이얼은 생각보다 덤덤한 모습이었다. 말끔한 얼굴 그 어디에도 불안 따위는 없었다. 어……. 좀 내가 과민했나. 예상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클로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때였다. 손수건으로 말끔하게 손까지 닦은 그가 두 팔을 벌렸다.

“안아줄게. 이리 와.”

“뭐?”

“안고 싶으니까, 빨리.”

바로 어제 클로이가 했던 말 그대로를 속삭이며 레이얼이 그녀를 불렀다. 벌어진 두 팔을 재촉하듯 가볍게 흔드는 것까지 모조리.

“불안하다고 털어놔야 와줄 건가 그대?”

맙소사. 클로이는 그대로 땅을 박차 그대로 레이얼의 품에 뛰어들었다. 깜빡했다. 레이얼이 제 감정을 누르는 데 얼마나 익숙한지를. 자신의 앞에서 종종 내비쳐서 그렇지 그는 이 살벌한 곳에서 여태 홀로 버텨왔던 이었다. 충격받은 모습과 괴로워하는 모습, 기뻐하는 표정 따위를 삼키는 건 일도 아니다.

“미안해. 예고장이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고는 미처 생각 못 했어.”

“날 생각했으니까, 달이 뜨자마자 와준 거겠지.”

“전하, 이거 하나는 분명히 하고 넘기자. 내쉬 황자는 절대 내 취향이 아니야.”

“……그럼 또 물어봐야겠군. 그대의 취향은 뭐지?”

“집요하네.”

“알아야 맞출 테니까.”

“……수도 태생이신 분. 그냥 수도 사람처럼 말해주세요.”

클로이는 레이얼을 슬쩍 떠밀며 품에서 벗어났다. 조금 전까지 몸을 감싸 안던 뜨끈한 온기가 떨어지자 몹시 아쉬웠으나, 경험상 오래 붙어있으면 반드시 대가를 치렀다. 괜히, 어제 빨린 입술이 화끈거리고 따가운 기분이 든다.

“그대, 무슨 생각을 하길래 볼이 빨개?”

“……야한 생각.”

“제발.”

클로이는 제 말 한마디에 드러난 피부가 온통 새빨개진 레이얼을 보며 히죽 웃었다. 이게 본토박이의 위엄이지. 내내 휘둘리다, 제대로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한껏 들린다. 레이얼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리다시피 덮고는 다른 손으로 홰홰 내저어 그녀를 밀어냈다.

“왜왜?”

“흥분되니까 떨어져.”

……깜빡했다. 이분 영리한걸. 그새 이렇게 배워서 써먹는구나.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시뻘게진 두 남녀가 사람다운 피부색을 되찾고 다시 이야기를 나누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 물론, 본인들만 인지하지 못한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폐하.”

그 시각, 황후궁은 캐서린의 외로운 속삭임으로 가득했다. 작은 불만 켜둔 그녀의 침실은 병자가 내뿜는 기분 나쁜 열기로 공기가 뜨끈했다.

“약을 드셔도 차도가 없으니 큰일입니다.”

희고 고운 손이 그릉거리는 숨소리를 토하는 황제의 꺼칠한 뺨을 쓸었다. 하얀 손 끝에 걸리는 피부는 푸석하고, 볼품없었다. 빵빵하게 부풀린 풍선을 터트리면 이런 꼴이 될까. 한 달을 내리 앓은 것도 아닌데, 잠깐 사이 수십 년의 세월을 단번에 얻어맞은 듯 초라한 몰골이었다. 캐서린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손을 들어 예쁘게 잘 부풀어 있는 제 뺨을 쓸었다. 불혹을 넘긴 나이인지라, 성년식을 막 치렀던 그때만큼은 아니나 손 끝에 닿는 살은 매끄럽고 팽팽했다. 아직 잔주름 하나 없는 고운 얼굴. 그녀는 한 달을 앓아도 단번에 저렇게 쭈글쭈글해지지 않으리라.

“하긴, 폐하께선 벌써 예순을 넘기셨지요.”

줄리아나 전 황후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지 않아 십 년이 넘게 애를 먹었다고 했었다. 그러다 태어난 게 레이얼 시오도르다.

“폐하를 처음 뵈었을 때, 전 폐하께서 불혹을 넘기셨다는 것을 믿지 못했답니다.”

과거를 떠올리는 캐서린의 시선이 뿌옇게 흐려졌다. 지금도 생생하다. 황후궁의 ‘시녀’가 되기 위해 처음 황궁에 발을 디뎠던 그 날이. 아픈 줄리아나 황후를 찾아왔던 패트릭 시오도르는 그야말로 꽃 같은 남자였다. 척 보기엔 이십 대 후반처럼 보이기에 누군지도 모르고 그만 홀린 듯 넋 놓고 바라보다 그만 수석 시녀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그날 벌을 받고 나서도, 캐서린은 내내 두근거리는 가슴이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때, 패트릭 시오도르는 캐서린에게 남자로 각인되고 말았다.

“첫눈에 반하고 말았어요. 폐하.”

속삭이는 캐서린의 뺨이 복숭앗빛으로 예쁘게 달아올라 있었다. 달콤한 꿈을 꾸는 듯 반짝이는 푸른 눈이 몹시 사랑스럽게 빛났다.

“정말이지.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었답니다.”

쿨럭쿨럭. 목에 낀 가래에 황제가 괴롭게 기침을 하며 몸을 비틀자 캐서린이 능숙하게 그를 모로 뉘이고 등을 쓸어주었다.

“고생하시네요. 폐하. 그러니까 요것 좀 더 드세요. 빨리 끝내셔야죠.”

작은 한숨을 내쉰 캐서린이 협탁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협탁서랍은 온갖 약병으로 가득했다. 그중 몇 개를 집어 든 캐서린이 손바닥에 툭툭, 털어낸 다음 작은 약사발에 넣고 으깨 하나로 다시 뭉쳤다.

“씹지 않아도 되는 거랍니다. 입에만 넣으면 녹아 사라지거든요. 멋모르는 레이얼이 스푼으로 입안을 헤집어 아프진 않으셨어요?”

스푼으로 혀뿌리를 눌러 기어이 실베르카를 한 스푼 먹이고 간 레이얼의 모습이 마땅찮았던지 캐서린의 얼굴에 옅은 노여움이 서렸다.

“왜 이제 와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작게 한숨을 쉬던 것도 잠시, 잘 뭉친 알약을 황제의 입안에 쑥 밀어 넣은 캐서린이 흘러나오지 않게 그의 턱 밑를 꽉 눌러 받쳤다. 입안에서 녹은 약이 이내 스미듯 황제의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그렁거리던 황제가 곧, 고요해졌다. 죽은 듯 잠든 황제의 모습을 바라보던 캐서린이 살짝 웃었다. 제 손아래서 이렇게 고분고분해진 그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처량해 보이기도 했다. 내리깐 눈으로 한참이나 바라보던 캐서린이 이내 시선을 떼, 창밖에 떠 있는 달로 향했다.

“폐하, 별장도 착착 준비되어가고 있대요.”

다시 이 밤을 울리는 캐서린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빠르면 해를 넘기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조만간 입고 갈 옷을 맞추려고요. 폐하의 부재가 느껴지지 않게 최대한 화려하게 맞출 거예요.”

희미한 달빛을 두른 캐서린의 뒤로 까만 그림자가 길고 길게 늘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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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 타운하우스 부지의 가장 외딴곳이라 사람들은 몰랐으나, 새벽녘 아르네 공작저에서는 소란이 일어났었다.

“잡아라!”

텅 빈 하늘을 울리던 소리는 분명 그러했다. * * * 길롯 백작저의 도면도와 병력 배치도를 부탁하고 돌아온 클로이는 공녀로 꽤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중 그녀를 가장 골치 아프게 하는 건 다름 아닌 겨울 토벌이었다. 가뜩이나 아르네 공작이 빠진 빈자리만으로도 버거운데, 가신들의 의견이 좀처럼 모이지 않았다.

“토벌대를 쪼개야 한다니까요?”

“그러다 각개격파 당하면 몰살입니다.”

“공작님은 괴수의 둥지까지 진격한 후 처리하는 방식을 쓰셨지만, 그건 공작님이기에 가능했습니다. 누가 수십 마리의 괴수를 처리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둥지에서 괴수들이 ‘조금씩’ 나눠 나올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괜히 유인조만 개죽음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클로이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팽팽하게 맞서는 사람들을 보며 이맛살을 구겼다. 전부 일리 있는 소리였다. 하지만, 기사는 한정적이었고 시간은 얼마 없었다.

“오늘은 결정해야 해. 점심 전까지 이야기를 모아보지.”

이미 클로이는 반쯤 제 생각을 굳힌 상태였으나, 가신들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도 무한정 기다려줄 수 없다. 토벌전에 나서는 병력의 방식을 정해야 그다음 작전을 짤 수 있다. 매일 눈구름이 착실하게 쌓이고 있었다. 올해는 지독히 가물었다. 그래서 평년과 달리 구름이 쌓이는 속도가 더딘 편이었다. 유례없이 이른 추위에도 아직까지 눈이 내리지 않은 건 그래서였다. 하지만 그도 한계가 있다. 눈은 반드시 온다. 그리고 평년보다 맹렬한 추위는 내리는 눈을 곧장 얼음로 바꿔버릴 것이다. 땅이 얼면, 곤란한 건 인간뿐이었다. 괴수들은 눈이 쌓이건 얼건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 갈고리 같은 발톱과 한 뼘이 넘는 긴 털로 빼곡히 온몸을 두른 짐승들은 인간이 느끼는 불편 따위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강력했다. 시계를 보던 클로이는 시곗바늘이 정확히 정오에 닿던 순간 입을 열었다.

“자, 이제 그만. 그래서 뭘 어떻게 하고 싶다는 건지 정했나?”

“…….”

“도저히 정리가 안 되는 것 같으니, 달리 방법이 없지. 그대들은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가신들은 어린 공녀의 박력 넘치는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괴수 토벌에 한 번도 참가해본 적 없는 공녀는 겨우 ‘제1 사냥꾼’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봐줄 게 없다. 그녀의 실력을 낮잡아 보는 게 아니었다. 괴수 토벌은 경험 있는 자들도 매번 버거워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독려해 이끌고, 버티는 건 언제나 ‘압도적인’ 아르네 공작의 무위가 있어 가능했다. 그런데, 겨우 제1 사냥꾼이 그럴 깜냥이 되는가?

“저, 공녀님. 그러지 마시고…….”

“언제부터 가신들이 가주 대리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게 되었지?”

“예?”

“공작 대리라서 우스운 건가, 아니면 내가 공녀라서 만만해 보이는 건가. 그도 아니면 내가 아르네 답지 못 해 보여서인가? 대답해보게 발킨 남작.”

클로이는 흰 수염이 성성한 발킨 남작을 향해 도발적인 언사를 감추지 않았다. 이 정도는 예상했다. ‘아르네’ 공작을 모시던 이들이다. 그들의 주인은 공작의 어린 딸이 아니니, 당연히 신고식이 필요하리라. 이 자리에서 꺾이는 건, 절대 내가 되어선 안 돼.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크게 미소 지은 클로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들, 난 아까부터 궁금했지. 이 자리에 과연 아르네 공작이 계셨어도 그렇게 왈가왈부하며 떠들 수 있었을까 하고 말이야.”

“…….”

회의장은 어느샌가 싸늘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아르네 공작이 후방에서 관전하겠다며 그대들에게 토벌 명령을 내렸다고 해도 그대들, 이렇게 반나절을 떠들고만 있을 수 있었나 말이다.”

감히. 누가. 공녀의 말에 모든 이의 입이 꽉 다물렸다. 그제야 그들은 저들이 저지른 잘못을 깨달았다. 아르네 공작 없이 토벌에 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그만 눈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를 깜빡했다. 클로이 역시 그들의 주인인 아르네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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