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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 미쳤어? 내가 언제! (72/121)

072. 미쳤어? 내가 언제!2021.05.11.

“오늘은 날이 좋습니다. 공작님. 쌀쌀하긴 하지만, 맑네요. 꼭 영지에서 맞는 바람 같습니다.”

침실 안의 창문을 죄다 열어 살이 에이는 것 같은 찬 바람이 마구 몰아치는 가운데, 에반이 한껏 상냥한 목소리로 아르네 공작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몸에 난 상처며, 내상은 거의 다 나았다. 원래도 괴물 같은 체력이었다. 쓰러져 있다고 한들 타고난 체질은 의식 없는 주인의 몸을 뚝딱뚝딱 잘도 고치고 있었다. 상흔은 여전하다. 그러나 살은 진작에 아물었고, 벌겋게 남은 흉도 봄이 오기 전 깨끗하게 사라질 것이다.

“아마 이번 달을 넘기지 않고 눈이 오지 않을까 합니다. 첫눈이 내리기 전 영지로 돌아가야 할 텐데요.”

공작에게 찬바람이 바로 닫지 않도록 이불을 꼼꼼히 끌어와 덮어주고, 바로 옆 침대로 넘어가 소공작 역시 살뜰하게 보살핀다. 공작과 소공작은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누더기 꼴을 하고 핏물에 누워 있던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멀끔해졌다. 다만 의식 없이 누워 있느라 근육이 살짝 빠진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안색은 많이 맑아졌다. 단순한 부상이었다면 진작에 일어났으리라. 그러나 이 둘은 인간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싸웠다. 기력이 소진하고, 목숨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까지 자신을 몰아세웠다. 바닥의 바닥까지 긁어 썼으니 상처야 아물었을지 몰라도 쉬이 정신을 차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에반이 이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건, 그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토록 멀쩡한 얼굴을 하고 죽은 이처럼 미동도 없이 누워만 있는 주인의 모습에 사달을 내도 진작에 냈으리라.

“흐음…….”

문득 명치가 타는 것같이 아려와 에반은 급히 숨을 들이켰다. 비강이 얼어버릴 것 같은 공기를 몇 번이고, 쉼 없이 폐부로 꾸역꾸역 밀어 넣고 나자 배 속을 갉아내던 끔찍한 작열감이 좀 가신다. 하늘은 잿빛이고, 나무는 헐벗었다. 동쪽에서부터 습기를 머금은 무거운 구름이 북진하고 있다. 아직 구름이 제대로 모인 게 아니니 며칠 더 여유는 있지만, 보름이 지나면 정말로 눈이 올 테다.

“공작님, 조금만 더 쉬시고 눈을 떠주세요. 아가씨와 로지만 영지로 보내기엔 마음이 불안합니다.”

에반은 요즘 살짝 초조해진 상태였다. 공작과 소공작이 잘못되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다만, 시기의 문제였다. 오래지 않아 눈이 온다. 눈이 와 얼어버리면 괴수 토벌전에 난항을 겪는다. 그 전에 영지로 돌아가야 했는데, 공작과 소공작이 의식 없는 상태로 영지까지 호송하는 건 죽여달라고 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클로이와 로지 둘만을 영지로 보내야 하는데, 영 불안했다. 불안에 떠는 북부의 영지민을 위해 ‘아르네’가 나서야 하는 상징성도 이해하고, 로지의 실력도 믿는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불안하다. 그건 아마도 아르네 셋 중 둘이 누워 있어서일까. 아니면, 최근 심상찮게 돌아가는 황실 분위기 때문일까. 에반은 내쉬 황자가 제 아가씨를 바라보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먹이를 노리는 뱀의 눈알처럼 집요하고 잔혹하게 빛나던 녹안. 문을 닫아놓아도 기어이 찾아와 아가씨를 만나고 가지 않았나. 그런데, 문밖으로 나가면 과연 두고만 볼까?

“주인님 일어나주세요.”

올무에 모가지가 묶인 짐승처럼 에반은 신음하듯 공작에게 애원했다.

“어서 일어나주세요.”

“어휴 아주 난리도 아니네요.”

“응?”

식재료를 받아두고 온 로지가 팔을 휘휘 돌리는 척하더니 이내 냉큼 다가와 은근한 목소리를 냈다.

“방금 들었는데요, 길롯가에 예고장이 도착했대요.”

“예고장을 받았대?”

“네. 하, 그 레이디 진짜 배포도 좋네요.”

“흠…….”

이거 계산이 좀 안 맞는 거 같은데. 로지의 말을 반쯤 건성으로 넘기며 클로이가 서류에 코를 박을 듯 들여다보았다. 내년도 재배 목록과 필요 경비를 계산해둔 게 ‘기억’과 달랐다. 저번에 분명히 끝자리가 0으로 깔끔하게 떨어졌는데, 어째서 이 부스러기가 붙었지. 클로이는 펜 끝을 질근질근 씹으며 재배 목록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데, 이게 배포가 좋은 게 아니면 뭐겠어요.”

“그러게.”

“제 말 듣고 계세요?”

“그러게.”

“아가씨!”

왁! 하고 귓가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통에 클로이는 화들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움찔, 손이 떨리며 펜촉에서 잉크가 서류 위로 뚝 떨어졌다.

“아우! 진짜! 그 레이디가 뭐 어쨌다고! 이거 중요한 건데!”

“레이디가 길롯을 마지막으로 턴대요! 근데, 목표물이 황자 전하래잖아요!”

“미쳤어? 내가 언제!”

“……대화에 집중 좀요. 제발.”

당황해서 얼결에 술술 불었으나, 로지는 서류에 정신이 팔려서라고 생각한 듯 혀를 찼다.

“문을 닫아 걸고 있어도,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계셔야죠.”

“레이디랑 정세랑 무슨 상관인데.”

“레이디가 내쉬 황자를 목표물로 정한 건, 반황제파를 뒷배로 두고 있다! 라는 이야기잖아요.”

“아니 그러니까 왜 내쉬 황자가 목표물이 되었냐고.”

“왜긴요, 길롯의 보물은 내쉬 황자밖에 더 있어요?”

그럴 리가 있나. 클로이는 자신의 의도와 달리 마지막 습격이 너무 거창하게 해석되어서 적잖이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그거 누가 그래?”

“이번에 식재료 받으면서 들었어요. 어차피 귀족가에 식재료를 납품하는 상단은 거의 고정이잖아요. 여기서 듣고 저기서 듣고 그런 거죠 뭐.”

요는, 귀족가에 이미 그렇게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는 뜻이었다. 말도 안 돼. 클로이는 절로 두통이 일어 머리를 짚고는 끙끙 앓았다.

“아가씨가 생각해도 이거 예삿일이 아닌 거 같죠?”

“아, 몰라.”

어떤 멍청이가 저런 말도 안 되는 추론을 했을까. 진짜 비호감이다. 클로이가 길롯 백작저를 마지막 타깃으로 잡은 건 이제 곧 영지로 돌아가야 해서이기도 했고 마침 열한 번이라는 숫자가 의미를 담기에 딱이었기 때문이다. 페트릭 시오도르는 건국 이래 열한 번째의 황제이다. 내쉬에게 고맙다고 해야 했다. 저번에 나서서 훼방을 놓지 않았다면 클로이는 이번이 열두 번째가 된다. 그러면 언제쯤, 무슨 이유를 핑계 삼아 발을 빼야 할지 머리가 터지게 고민을 해야 했을 터다. 그런데, 잘 넘길 수 있는 일을 갑자기 이런 식으로 부풀려?

“레이디 되게 치밀하죠. 열한 번, 마지막 습격지는 길롯. 메시지가 아주 뚜렷하고 과감해요. 대단해.”

그렇지 않아. 길롯을 지목한 건 돈이 제일 많기 때문이었어. 더는 털지 못하니까. 레이얼에게 좀 많이 가져다 주려고.

“하아…….”

“물론 제게 제일 멋진 레이디는 우리 클로이 아가씨인 거 아시죠?”

골치 아파하는 표정에 찔끔한 로지가 뒤늦게 괜히 엄지를 치켜세우곤 슬슬 뒷걸음질로 도망쳐버렸다. 그러나 클로이는 굳어버린 인상을 도통 풀지 못했다. 그날 좀, 신중하게 고를 걸 그랬나……. 뒤늦게 간밤의 일이 후회되었다. . . . 이번에도 레이얼은 숨이 막히도록 클로이를 몰아댔다. 이건 정말 몰이한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입맞춤이었다. 그는 평상시와 달리 스킨십에서는 지배적이고 주도적이었다. 그리고 장기적이기도 했고.

“작작 좀 해! 진짜!”

숨을 헐떡거리며 레이얼을 밀어내는 클로이의 손길이 사뭇 신경질적이었다. 내내 밀어내는 클로이를 따라잡아 기어이 입술을 겹치던 남자는 진심이 담긴 짜증에 두 손을 들어 올리고 곱게 물러났다.

“미안.”

“어째서 번번이 이래!”

“좋아서.”

진짜 저 입! 클로이는 능글맞고 노골적인 수도 남자를 아주 매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생글거리던 레이얼이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조심할게’라며 화해를 요청하기도 했고, 노려보는 건 눈이 꽤 아픈 일이라 대충 접어야 했다. 한차례 야릇한 소동이 지나가고 나자, 클로이는 그를 찾아온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저기, 전하 나 할 말이 있어.”

“나도 그래.”

“전하 먼저?”

“아니, 그대 먼저. 좋은 소식으로 마무리하면 다 괜찮게 느껴지니까.”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에 클로이는 정확히 사실만을 읊었다.

“전하의 소원대로 은퇴해야겠어.”

“아, 이런 좋은 소식이군?”

“곧, 토벌을 가야 하거든.”

“토벌?”

클로이가 ‘레이디’의 생활을 접고, 온전히 클로이 아르네로 돌아가는 건 기쁜 일이었으나 공녀의 책무는 ‘레이디’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레이디의 은퇴 소식에 기뻐했던 것도 잠시, 레이얼의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그대가 꼭 가야 하는 건가?”

“항상 토벌대의 선봉은 아르네가 맡았어. 그것이 북부 영주로서의 의무이자 배려였지. 영주민은 지난 이백 년 자신을 지켜온 ‘아르네’를 보고 안심하는 거야.”

“굳이 그대야 해야 하는 건가? 적당한 자가 없어?”

“아르네는 손이 귀하지. 방계는 존재하지 않아.”

대신할 사람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 모습에 레이얼의 반듯한 미간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그는 평생을 황태자로 살아왔기에 책무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결코 피할 수 없다. 괴수는 한 번도 보지 못했으나, 소문은 무성히 들어 알고 있었다. 몇 년 전, 남부를 잠깐만에 폐허로 만든 것이 고작 괴수 한 무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북부에서 나온 기사들이 이틀 만에 처리했다는 이야기도 안다. 그러나, 레이얼은 그것이 북부 기사에게 쉬웠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능숙해질 순 있어도 쉬운 일 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

“……그래서 언제 가려고?”

“눈이 오기 전 움직이려고 해. 아마 이달 안에 떠나야 할 것 같아.”

“이달 안이라고?”

생각보다 날짜가 촉박했던지 레이얼의 얼굴이 한층 어둑해졌다. 클로이는 그런 그를 달래주지 않았다.

“내린 눈이 얼면, 토벌대가 움직이기 힘들어져.”

“그래. 발목이 묶여서야 되겠나.”

“금방 다녀올게.”

“금방?”

“응. 원래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야. 아버지도 한 달 정도?”

한 달이라고 발음할 때 레이얼은 눈에 띄게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금방이라고 말하니 며칠 정도를 예상했던 모양이었다. 귀엽게도. 작게 웃던 클로이는 조금 전 제가 한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라버렸다. 귀엽다고? 시오도르가? 그리고 문득, 제가 사람 홀리는 얼굴을 한 황태자를 처음 보았던 날, 절대 반하면 안 된다고 다짐했던 게 떠올랐다. 그날의 기억에 클로이는 괴로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다만, 혀를 찼다. ……저 얼굴에 안 넘어가고 배길 수가 있나. 바보스러우니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쯧쯧.

“한 달은, 너무 길군.”

“…….”

인정했다고 해서 적응했다는 건 아니다. 클로이는 너무 북부식에 물든 레이얼의 말에 그만 정신이 나가버리고 말았다. 솔직하다 못해 가끔 사람이 당황하리만치 툭툭 진심을 털어놓는 수도 남자의 말에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어. 그. 그런가?”

버벅거리던 클로이는 우울해하는 남자를 달래려 맹렬히 생각했으나, 원래 좋은 생각은 쉽게 떠오르는 게 아니었다. 한참이나 더듬거리던 클로이가 드디어 레이얼의 관심을 돌릴 법한 것을 떠올렸다.

“그, 저기 뭐냐 그럼. 마지막은 길롯으로 할까? 은퇴인데 화려하게 헤집어주어야지. 더불어 우리 전하의 금고도 두둑이 채우고.”

“길롯을?”

“제국의 보물은 길롯이 다 쥐고 있을걸?”

내가 많이 털어다 줄게. 그때 클로이는 웃었다. 내쉬가 일을 이렇게 비틀어버릴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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