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 길롯의 보물2021.05.07.
“빨리 와. 안고 싶으니까.”
넓게 벌린 팔을 재촉하듯 탈탈 털어대는 것과 동시에, 품이 가득 들어찼다. 어깨를 감싸 안는 크고 탄탄한 팔에 으스러지게 안기고 싶은데 상처 때문에 그럴 수 없어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클로이는 그래서 레이얼을 안은 두 팔이 푸들푸들 떨리도록 힘을 꽉 줘 그를 안아주었다. 빌어먹을 옆구리. 지그인지 재그인지 확 일러버리고 싶은 충동이 목 끝까지 차오른다.
“조금 더.”
아무래도 마땅찮아 직접 주문했건만 깜빡한 게 있었다.
“그래. 조금만 더.”
레이얼 시오도르의 눈치는 제멋대로 들락날락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조금 더를 연장의 의미로 알아듣곤 짧게 웃기까지 했다. 클로이는 그 모습에 헛웃음이 터졌으나, 꾹 참고 그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하루이틀 보고 말 사이도 아니고, 평생을 함께할 텐데. 두고두고, 차분히 가르쳐야지.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자 내내 무섭게 끓던 감정이 일시에 차분해졌다. 이별이 아니다. 그저 잠깐 떨어져 있는 것일 뿐. 어차피, 아빠와 오빠가 수도에 있는 이상 괴수 토벌을 끝내면 다시 수도에 와야 할 터다. 일이 수월하게 끝나면 고작 소리가 나오게 짧게. 어쩐지 혼자 난리를 부린 것 같아 머쓱하던 그때였다.
“어떻게 알았어?”
“응?”
“보고 싶었는데.”
어?
“와주지 않으면, 곧 만나러 갈 작정이었지.”
담담한 듯하나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가 턱없이 푹 잠겨 있다. 그제야 클로이는 레이얼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 이럴 수가. 눈치가 들락날락하는 게 시오도르뿐만이 아니라니. 살짝 자괴감이 든다.
“전하.”
“그대가 너무 보고 싶었어.”
또, 또, 또. 무슨 일이 있었구나. 레이얼이 이렇게 살짝 망가진 것 같이 굴 땐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다. 그래서 클로이는 얼굴을 붉히는 대신, 손을 들어 그의 너른 등판을 쓱쓱 쓸어주었다. 길고 곧으며 넓다. 듬직한 남자의 등판엔 그녀가 여태 몰랐던 많은 것들이 짐처럼 지워져 있었을 것이다. 절대 익숙해지지 않고 벗을 수도 없는 짐이. 그래서 클로이는 어설프게 위로하는 대신, 힘껏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손바닥이 매끄러운 셔츠를 쓰는 소리만이 쉬지 않고 울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깨가 뻐근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레이얼이 감싸 쥔 어깨를 풀어주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으나 클로이는 아까보다 그의 호흡이 훨씬 깊고 고요해진 것을 알고 있었다.
“전하도 날 보고 싶어 했을 줄이야!”
애써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냈으나 돌아온 건 턱없이 진지한 목소리였다.
“그럼. 정말이지 간절했지.”
평소라면 능글맞게 구는 수도 남자라고 타박했겠지만, 클로이는 질색하는 대신 다시 한번 그를 안아 주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는 밤이라서가 아니었다. 그의 가슴에 닿은 뺨을 통해 쿵쿵거리는 심박이 와닿았다. 평온한 얼굴과 달리 심박이 거칠고 사납다.
“내 가족은 오직, 그대만 둘 거야.”
문득 정수리가 눌리는 느낌이 들더니, 쪽 하는 귀여운 소리가 울린다. 뺨에 입을 맞춘 것도 아닌데, 순간 멀쩡한 뺨이 화끈해지며 열이 올랐다.
“그, 그건 곤란하지.”
“난 그대만 있으면 돼. 다른 건 죄다 필요 없-.”
“아기는?”
움찔. 얄팍한 셔츠 한 장을 두고 맞닿아 있었기에 클로이는 레이얼이 화들짝 놀란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별 생각 없이 ‘아기’를 입에 올린 클로이까지 괜히 부끄러워질 만큼 격렬한 반응이었다.
“어, 저…….”
그리고 달아오른 그녀의 뺨보다 그의 가슴이 훨씬 뜨끈해졌다. 부끄러워하지 마!! 결혼하면 아기도 생기고 그러는 거지! 시오도르면, 어? 황제니까, 어? 아기, 아기가 태어나는 게 당연한 건데 뭐, 왜!
“아기?”
생각해보지도 못했다는 듯 되묻는 레이얼덕에 클로이는 얼굴이 펑, 터져버릴 것 같았다. 어, 이거 좀 실수했나. 보아하니 혈육과 문제가 있었던 모양인데,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머리 위로 연신 바위가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다. 쾅. 멍청이! 쾅. 쪼다! 그리고 클로이는 이렇게 수습이 안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찍이 로지에게 배운 바가 있었다. 줄행랑!
“자, 그럼 오늘은 늦었으니까. 난 이만…….”
하지만 레이얼의 품에 갇힌 몸뚱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
“아…….”
깜빡했다. 이 남자가 얼마나 힘이 센지. 어지간한 여자보다 더 곱고 예쁘게 생겨선 힘이 말도 못 하게 좋았다. 아, 진짜 이대로 사라지고 싶다. 클로이는 입안으로 중얼거리며 얼굴을 푹, 떨구었다. 들릴 리 없는 심박이 쿵쿵거리며 귀가 아프게 울린다. 이쯤되자 거의 포기였다. 수습은 불가능했다.
“아기?”
“어. 뭐.”
“우리 아기?”
“아니 뭐. 결혼하면, 어 그리고 뭐 뭐. 그. 전하는 후계자가 필요, 하, 하잖아?”
“아기…….”
그는 다른 말을 하는 대신, 아기라던가 우리아기같은 소리만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 목소리가 퍽 기뻐하고도 낯설하는 기색이 역력해, 클로이의 부끄러움은 차근히 사라졌다. 힐끔. 클로이는 재빨리 레이얼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는 생각에 골몰한 듯, 그녀의 시선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기.”
처음으로 사탕을 먹어본 아이처럼 그는 ‘아기’라는 단어를 입안에서 신중하게 굴렸다.
“그래, 아기도 포함해줘 전하의 가족에.”
“내, 가족.”
“하나보다는 둘이 좋다며.”
먼데 흩어졌던 시선이 차츰 또렷해지더니, 클로이에게 닿아왔다.
“맞아. 하나보다는 둘이 좋지.”
“그래.”
“그럼 입 맞춰도 돼?”
“뭐?”
작게 벌어진 입술이 꾹 눌리는 느낌과 함께 전기가 올랐다. 절로 머리끝이 쭈뼛해지는 저릿함에 클로이는 기겁하며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레이얼은 도통 팔을 풀어주지 않았다.
“싫어?”
“아, 그게 아니라 좀.”
“그럼 왜 그러지?”
“왜 이렇게 갑자기 그러는 거야?”
“말했잖아 북부식, 마음에 든다고. 내가 맞출게.”
레이얼은 정말 짜증나게 영리한 남자였다. 그는 제게 이로운 것만 쏙쏙 골라 배우고 써먹었다. 기가 차서 뾰로통해진 클로이를 보며, 웃더니 이번엔 허락도 없이 쪼듯이 입을 맞추었다. 입술에 닿는 말캉한 느낌은 매번 좋아도 너무 좋았다. ‘북부’ 여자인 클로이가 내숭 떨며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칫, 하는 소리를 내며 새 부리처럼 내민 입술을 예쁘게 모아 다가오는 레이얼에게 쪽소리 나게 맞추었다. 이미 몇 번이고 입을 맞추어놓곤, 레이얼은 클로이의 입맞춤 한 번에 목덜미까지 붉혔다. 가늘어진 눈꼬리가 붉게 물들어 꽤나 야한 표정을 지은 그가, 고개를 비틀어 다가왔다. 쪽쪽거리던 귀여운 소리는 두 번 다시 들리지 않았다. 다만, 질척한 소음과 함께 클로이에게서 앓는 듯한 신음이 새나왔을뿐이었다.
그날 밤, 길롯 백작저로 레이디의 예고장이 도착했다. * * *
“예사 놈이 아니라고 했더니, 허 참.”
다음 날 날이 밝자, 귀족가는 간밤 길롯 백작저로 날아든 ‘예고장’ 소식으로 잘잘 끓었다. 난다긴다하는 귀족가가 죄다 털렸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길롯을 표적 삼았다는 소식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이쯤 되면, 그 뒷배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뒷배는 무슨.”
“아니 왜요. 솜씨도 일류 기사보다 뛰어나고, 예법도 훌륭한데 저게 보통 인사입니까?”
“예법 선생들을 전수 조사하지 않았습니까. 명단도 다 받았고요. 거기에 없었잖습니까.”
“혹시 압니까? 본인 평판이 떨어질까 봐 누락했을지.”
“누락을 왜 시킵니까, 괜히 그랬다가 밝혀지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요.”
“아니 그럼 진짜 레이디는 누구랍니까?”
“그걸 알면 다들 이러고 있겠습니까.”
해봐야 소용없는 소리였다. 내쉬는 열린 창문을 손수 닫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하긴, 하루라도 짖지 않으면 그게 개겠나. 안 그런가 길롯 백작.”
“…….”
“그래서, 하려던 말이 뭐였지?”
하려던 말은 무슨. 알현 신청을 해서 두 시간을 내리 세워두고선 간신히 들여보내 주나 싶더니 입도 못 열게 했다.
‘쉿,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군.’
저 소리 한마디에 길롯은 호사가들의 수군거림을 고스란히 참고 들어야만 했다.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었건만 길롯 백작은 화를 내는 대신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소중한 황자’님이었다. 곧 황제가 될, 어여쁜 조카님 아닌가. 황제가 된 그가 내릴 다디단 보상을 생각하면 이까짓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 전하 다름이 아니라 그…… 예고장 때문인데 혹시, 도와주실 수 있는지 여쭈어보-.”
“무얼 가져간다던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 툭 잘라버리는 목소리가 여간 심드렁한 게 아니다.
“그게……. 길롯의 보물라고만 써 있었습니다.”
“목표물이 길롯의 보물이라고?”
“예, 그래서 어떻게 방비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전하의 도움을 바라봅니다.”
“그대가 열두 번째던가?”
“아닙니다. 저번엔 그냥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번이 열한 번째입니다.”
“열한 번째. 목표물은 길롯?”
“예.”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든 내쉬가 입술만 축인 후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길 대여섯 번.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길롯 백작이 나직이 탄식했다. 제 조카라지만 내쉬는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누가 저더러 레이디의 의중을 살펴달랐던가? 굳이 그가 ‘내쉬’를 찾아온 건 저번처럼 그가 레이디를 쫓아 내주길 바라서가 아닌가. 그저 ‘내가 있어 주겠다.’라는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그걸 몰라서 저 궁리를 하는 꼴이라니. 새삼 속이 답답하다. 하지만 저 답답이 덕에 오랑그리 후작은 아틸라를 지켜내지 않았던가. 길롯 백작은 제 백작저에 마련해 둔 비밀방에 가득가득한 귀염둥이들을 떠올리며 자꾸 제멋대로 떠들려는 입을 힘줘 물었다.
“열한 번째. 길롯 백작가.”
“…….”
되지도 않는 머리로 추리는 무슨. 황실에 앉아 아무것도 모르고 못돼먹은 주둥이만 나불거릴 줄 아는 성격 나쁜…….
“이번 대의 황제가 정확히 열한 번째지.”
“예?”
“그리고, 그 황제를…… 길롯이고.”
중간에 목소리가 훅 꺼지듯 낮아져 길롯 백작은 말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저 번들거리는 녹안을 보아하건대 결코 좋은 소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길롯이 애지중지하는 보물은…….”
희고 곧게 뻗은 손가락이 천천히 들리더니 자신을 가리키며 웃는 내쉬의 모습에 길롯 백작은 헛숨을 터트렸다. 생각도 버르장머리도 없이 사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하나 짚어내는 소리가 꽤 예리했다.
“전하?”
“길롯이, 가장 아끼는 건 바로 나지. 다음 대의……를 거머쥘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니까.”
들리지 않아도 괜찮다. 무슨 소린지, 어째서 말을 뭉갠 건지 알법하니까.
“이런 이런……. 백작. 미안하군 그래.”
“예?”
갑작스러운 사과에 길롯 백작이 따라가지 못하고 멍하게 되묻자, 내쉬가 전에 없이 쾌활한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레이디가, 내게 보낸 초대장인 것 같아.”
이곳으로 보내주어도 좋았을 텐데. 턱을 괸 내쉬가 호박빛으로 진하게 우러난 찻물을 한 모금 들이켜더니 달게 웃었다. 벌어진 잇새로 터지는 그의 숨이 제 모친만큼이나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