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0. 이리 와, 안아줄게 (70/121)

070. 이리 와, 안아줄게2021.05.04.

“어서 오세요.”

그들을 맞은 건 옅은 미소를 지은 캐서린 황후였다. 언제나 빈틈없이 치장하던 평소와 달리 다소간 흐트러진 차림새며, 파리한 안색을 한 캐서린 황후는 미소로도 가릴 수 없을 만큼 초췌해 보였다. 하지만, 살이 빠지며 깊어진 눈매에 드리운 그늘 때문일까. 사연을 함빡 문 눈빛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오늘 같은 날에도 여전히 진하게 풍기는 달콤한 향기 때문일까. 어딘지 콕 찍어낼 수 없는 미묘한 모습에 자꾸 시선을 앗아간다. 이전보다도 더, 확실하게.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경황이 없어, 꼴이 말이 아니랍니다. 부디 책잡지 말아 주어요.”

“……겨울 감기라고 들었는데…….”

말 끝에 레이얼이 시선을 움직여 침대 한가운데를 차지한 황제를 찾아냈다. 고작 며칠 만에 그는 지난 세월을 고스란히 얻어맞은 듯 노인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차라리 사람이 바뀌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끔찍한 몰골이었다.

“시, 심해서 그렇지 겨울 감기가 맞아요.”

오래 머문 시선이 불안했던 걸까. 캐서린 황후가 황제를 가리듯 레이얼의 앞으로 나서며 애써 웃어 보였다.

“…….”

“맞아요 겨울 감기. 빨, 빨리 나으실 거예요. 눈이 오면 콰이펄른으로 가기로 했답니다.”

황제가 이렇게 몸져누운 건 처음 본다. 그래서인지 캐서린 황후는 불안하고, 잔뜩 겁먹은 모습이었다. 언제나 독사처럼 간교하게 웃으며 속살거리던 제 말투도 잊은 듯, 마치 어린애처럼 말을 더듬고 툭툭 내뱉는다. 캐서린 황후는 체구가 자그마한 편이었다. 지금도 가려보려 앞을 막아섰다지만, 그녀의 정수리며 그너머 황제가 조금 전과 다를 바 없이 잘 보인다. 그러나 레이얼은 잠자코 시선을 돌려주었다. 제 얼굴에 처덕처덕 달라붙은 저 시선이 너무 싫었던 거다. 눈을 한번 깜빡일 때마다 찐득거리는 들큰한 것이 뺨이며 눈꺼풀에 척척, 엉겨 붙는 기분이라 여간 찝찝하게 아니다. 머리가 띵하다. 황제의 모습이 생각보다 충격이긴 했던 걸까? 이제야 코가 아프도록 단내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줄리아나 황후가 세상을 뜨고 레이얼에게 모친이 지워진 날, 그는 아버지도 잃었다. 패트릭 시오도르는 그날 이후 레이얼에게 철저히 ‘황태자’로 후계자 대우만 해주었다. 못하면 질책을 들었고 잘하면 견제를 받았다. 기괴한 관계로 굳어진 지금, 곧 숨넘어갈 모습을 한 황제의 모습에 딱히 어떤 감흥이 이는 건 아니다. 황제가 저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놀라웠을 뿐. 레이얼은 손을 들어 까딱였다. 이내, 그의 등 뒤로 키릭슨이 다가서며 유리병을 공손히 내밀었다.

“이게 무슨…….”

황후는 유리병에 담긴 것을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시종장도 알아본 것을. 그녀를 무시하려는 건 아니나, 온갖 공물이며 특산품이 진상되는 ‘황실’의 안주인 아닌가.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은 황후이니 그녀는 아는 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황후가 된 지 벌써 이십 년이 훌쩍 넘도록 제대로 눈을 키우지 못한 게으름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제 출신을 트집 잡아 상처 준다며 울부짖을 테다. 이미 오래전 한번 당해보지 않았던가. 열일곱, 아직은 경계심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어린 날. 제게 웃어주는 계비가, 늘 제게 조언하는 캐서린이 좋은 사람이라 생각할 때의 일이었다. 그날, 레이얼은 황제에게 뺨을 맞았다. 눈을 깜빡여 지난 날의 잔상을 지운 레이얼이 짧게 설명했다.

“실베르카입니다. 폐하. 약으로 차도를 크게 보지 못할 때 도울 수 있는 귀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입을 틀어막고 중얼거리는 황후를 향해 레이얼은 짧게 묵례를 하고 키릭슨을 데리고 황제의 곁으로 다가갔다. 황제 곁에 놓인 의자에 레이얼이 앉자 키릭슨이 품에 안고 있던 유리병을 열어 넘기고 뒤로 빠졌다.

“스푼을 주게.”

“폐하께선 지금 의식이 없으십니다.”

스푼을 달라는 말에 황후의 시녀가 냉큼, 나서서 그를 만류한다.

“평소 약은 어찌 드시는가?”

“그건…….”

“스푼.”

머뭇거리던 시녀가 마지못한 기색으로 작은 스푼을 준비해왔다. 레이얼은 받은 스푼을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다시 말했다.

“스푼.”

“……전하.”

“황후 폐하. 곁에 두는 시녀의 청력에 문제가 있는데 이것을 품고 계셨습니까?”

“로잘린.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말아요. 레이얼, 그녀는 내게서만 명령을 받는 터라 조심스러워 그럴 뿐이랍니다.”

“황족에 대한 기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고요?”

“레이얼, 로잘린 역시 황제 폐하의 병환에 잔뜩 겁을 먹었답니다. 부디 너그러이 봐주어요.”

“…….”

레이얼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로잘린이 건넨 것은 금색의 스푼. 미처 레이얼의 손에 올라오기도 전 레이얼은 손을 빼버렸다. 쩔그렁. 연이은 이상한 행동에 캐서린 황제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레이얼. 그런 행동은 무례합니다.”

“언제부터 황족이 금스푼을 썼습니까.”

캐서린의 부드러운 질책에 레이얼이 차게 웃었다. 들고 있던 유리병을 가만히 협탁에 올려두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그의 모습은 웅크렸던 맹수가 기지개를 피는 듯 고요하고도 위협적이었다. 이윽고 무릎까지 완벽히 세운 그가 내리깐 눈으로 물었다.

“언제부터 은스푼이 사라진 겁니까?”

아무도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어때?”

“그건 제가 여쭙고 싶습니다. 전하 어떠십니까?”

성큼 성큼 빠르고, 커다란 보폭이 키릭슨의 질문에 우뚝 멈추어 섰다.

“뭐가?”

그의 눈동자엔 불이 올라 새파랗게 끓고 있었다. 키릭슨은 저런 불꽃을 알고 있었다. 대장간에 가면 가장 높은 온도의 불이 얼음을 닮은 색을 하고서 검을 녹였다. 그 색이 꼭 레이얼의 눈동자처럼 시리고도 옅었다. 그날 키릭슨은 검을 녹이고 펜을 쥐었다. 오늘 레이얼은 무얼 녹이고 있을까. 그의 말에 레이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허무하다.”

“그러십니까.”

“맥이 풀렸어.”

“이게 전부는 아니잖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야.”

다시 둘의 발이 움직였다.

“조금 더 견고하고, 훨씬 더 거대하다고 믿어왔었다.”

“원래 그런 관계죠.”

“그리고 더없이 비정하다고 생각했지. 피도 흐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 때도 있었다.”

“하하하. 그건 맞는 말씀 같습니다.”

황태자궁의 복도를 키릭슨의 웃음소리가 욍욍 울렸다. 레이얼은 그 뒤로 더는 말하지 않았다. 집무실에 도착해서 퇴궁 준비를 하던 키릭슨이 문을 닫고 나가기 직전 물었다.

“전하, 그래서 오늘 ‘진실’을 보게 된 겁니까?”

“그런 건가.”

“축하드립니다.”

“……가라.”

“내일 뵙겠습니다.”

싱글거리는 키릭슨은 문을 닫더니 날 듯이 달렸다. 희미하게 울리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아주 경쾌했다.

‘전하, 제발 제게 허락해주십시오. 두 눈에 새겨 온 가족에게 위안이 될 광경을 전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이 밤, 그는 제가 보았던 광경을 몹시 즐거이 떠들 것이다. 그러나 레이얼은 어째서인지 속이 후련하지 않았다. 오랜세월 그의 위에서 군림하던 ‘황제’가 볼품없이 스러질 수 있는 한낱 인간이었음을 깨달았으니 기뻐해야 할텐데……. 그의 정신을 갉아먹고, 목줄을 죄던 길롯의 ‘수장’이 황제와 함께 침몰하는 꼴이 흔쾌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기쁘지 않다. 이것이 끝이 아님을 안다. 그런데도 이 잠깐의 유예가 전혀 기쁘지 않다. 그건 별것 아닌 것에 너무 오랜 시간을 핍박받았다는 것을 깨달아서일까? 허무하고 허탈하고 화가 난다. 레이얼은 은스푼으로 기어이 황제의 목구멍을 열어 실베르카를 떠넣었던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만에 고개를 뒤로 젖힌 그는 잔뜩 지친 표정이었다.

“로이.”

그는 이 순간 몹시 절실한 이름을 불렀다. * * *

“또 가시게요?”

“어? 로지?”

“갈비뼈가 완전히 붙으려면 한 달 정도 걸린댔는데, 그동안만이라도 안 가시면 좋겠어요.”

분주하게 사냥복을 갈아입던 클로이의 손이 로지의 말에 딱 멎었다.

“왜, 무슨 일 있어?”

“그냥요.”

“로지 클라크가 절대 그냥 말을 할 리가 없지. 무슨 일인데?”

잠깐 멈추었던 손이 다시 재빠르게 움직여 허리띠를 죄고 익숙하게 단검을 찾아 찔러 넣었다. 다만, 늘 양쪽에 수납하던 것과는 달리 오른쪽만이었다.

“……하필 이럴 때.”

그 모습을 본 건지 로지가 툴툴거렸다.

“어쩔 수 없지 뭐.”

양손을 쓰지 못하게 된 건 조금 아쉬우나 한쪽을 포기해야 한다면, 힘이 더 좋은 오른쪽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진짜 안 가시면 안 돼요?”

“왜?”

“그냥요.”

말이 제자리를 맴돈다. 보통 로지가 제대로 말을 못 하는 건 공작님이거나, 소 공작님의 일이다. 클로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로지 앞에 다가서 시선을 맞댔다.

“아빠와 오빠는 그저 긴 잠을 자는 거야. 그간 일이 많아서 그렇지 아빠와 오빠는 아직 며칠 쉬지도 못했잖아. 불안해하지 마, 로지.”

“……그 며칠 동안 다른 사람 평생 겪을 일보다 더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그러죠.”

힐끔. 꼭 알아차려달라는 듯, 부자연스럽게 로지의 눈동자가 클로이의 왼쪽 옆구리로 굴렀다. 공작과 소공작, 그리고 공녀의 부상.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아주 노골적으로 전하고 있다. 하지만 클로이는 로지의 말처럼 몸을 사리며 집 안에 틀이 박혀있고 싶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문을 닫아걸고 있다 한들 임시방편이다. 눈이 내린다는 소식이 오면 토벌을 위해 곧 영지로 돌아가야 한다. 조만간 아르네의 두 남자가 눈을 떠준들 성치 않은 이들을 호위해서, 척박한 영지로 돌아가기엔 길이 너무 멀고 험하다. 필연적으로 암살자가 따라붙을 텐데 클로이는 아빠와 오빠를 두 번 다시 위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가야 해.”

난, 곧 수도를 떠나야 하니까.

“아가씨. 영지로 돌아가셔야 하는 건 알고 계시죠?”

“그래서 가야 해.”

가기 전에 그에게 조금이라도 더 보탬이 되어주어야 해. 클로이는 로지를 보며 들고 있던 복면을 썼다.

“어젯밤에 미친놈이 찾아와서 껄떡거리는 거 들었지?”

“……길롯은 단체로 무슨 약이라도 먹나 봐요?”

“입 다문 조개처럼 문만 닫아걸고 있는다고 물러날 것들이 아니야. 정 급하면 통째로 삶아버리고도 남을 위인이지.”

“…….”

살벌한 클로이의 말에 로지는 대답 대신 옆으로 한 발짝 물러나 창문을 훌쩍 열어주었다. 그러나 역시 부어터진 표정이었다.

“다녀올게.”

클로이는 로지를 향해 짧게 인사를 남기고 벽을 타고 그대로 내려갔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곧 이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서일까. 지금 미치게 그가 보고 싶었다. 폐가 터지도록 달려 레이얼의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클로이는 레이얼에게 팔을 벌렸다.

“이리 와. 안아 줄게.”

“뭐?”

당혹감에 작게 벌어진 레이얼의 입술을 보며 클로이가 재촉하듯 벌린 팔을 흔들었다.

“안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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