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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 아로새겨진 하얀 손자국 (69/121)

069. 아로새겨진 하얀 손자국2021.04.30.

“폐하. 폐하?”

애달픈 목소리가 침전 안을 울렸다. 듣는 이마다 눈시울을 절로 붉히게 할 만큼 가련한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잔뜩 물려 있었다. 캐서린은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는 황제의 뺨을 애틋하게 쓸며 연신 그를 불렀다.

“폐하? 폐하. 제발, 눈 좀 떠보세요.”

발병 이후, 황제는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못한 채였다. 열은 떨어지지 않았고 의식이 없는 채로도 계속 기침병은 심해졌기에 약을 먹이기에도 쉽지 않았다. 밭은기침과 가래가 가득한 숨소리는 탁하다 못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이 가늘었다. 황의는 황제를 진찰할 때마다 좋아질 거라는 도움 안 되는 말만 할 뿐이었다. 이 중 제일 안달 내는 건 황후였다. 한번 쓰러졌다 일어난 캐서린 황후 역시 안색이 파르라니 좋아 보이지 않았으나, 쉬기는커녕 황제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고집이 보통이 아니라 아무도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어째서 이러시는 건가? 응? 불과 얼마 전만 해도 건강하셨잖나!”

평소에도 달콤했던 목소리에 울음기까지 물려 있으니 위엄은커녕 동정만 든다.

“날이 차가워지니, 병이 쉽게 지나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평소 황제 폐하께선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겨울을 보내시지 않았나!”

“하오나 황후 폐하.”

“그렇지 않으냐고! 이게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게다! 다시 진찰해보시게.”

캐서린은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며 황의를 다그쳤다. 그러나 한 번 두 번도 아니고 하루에도 십수 번씩 번갈아 가며 진찰했던 터다. 이미 황궁 내의 모든 의사가 다녀간 후였다. 황의들의 의견은 모두 하나였다. ‘겨울 감기’ 가을에서 겨울으로 넘어갈 때 제국 내에 대유행하는 병이었다. 그냥 감기보다는 무거우나 중병은 아니다. 하지만 쉽게 낫지는 않는다. 열이 오르고 기침을 하며 가래가 끓는다. 목이 부으니 열이 나는 것이고, 가래가 생기니 기침이 끊이지 않는다. 보통 시작하면 일주일은 독하게 앓고, 겨울 내내 기침을 달고 살다가 봄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끝난다. 그래서 엘피디오 사람들은 그것을 겨울 감기라고 불렀다. 열을 내리는 약과 가래와 염증을 삭이는 약, 그리고 진통을 줄여주는 약. 겨울 감기에 내줄 만한 약은 이게 전부였다. 황제라고 해서 별다른 약이 있는 건 아니다. 기력을 돋우는 약이며 식단을 더 올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차피 환자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것이었다. 중병에라도 걸린 듯 애를 태울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황후는 그사이 바싹하게 말라버렸다. 오히려 큰 병이 날 것 같은 건 황후 쪽이었다.

“그간, 모르고 지나가신 게 운이 좋았을 따름입니다. 폐하.”

“그게 그게 무슨 소린가?”

“기실 황제 폐하께서는 ‘시오도르’의 핏줄로 유독 강건하신 편이었지요. 하지만 보통 황제 폐하의 연세라면…….”

이게 정상이라는 뒷말은 구태여 소리 내 하지 않았다.

“그, 그, 그런 말 말게. 황제 폐하께선 앞으로도 영원히 이 제국의 태양으로 군림하실 것이야.”

“그럼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핼쑥해진 황후는 내내 잊고 있던 현실감을 마주한 듯 격정적으로 부인하고 달아나려 했다. 패트릭 시오도르는 나이가 꽤 많은 편이었다. ‘시오도르’답게 타고난 미형에 체격조건이 좋아서였지 실제 나이로만 친다면야 진작에 제위를 물려주어야 했다. 그의 은발은 이미 오래전 그 빛을 잃었다. 빛바랜 은발은 백발을 닮아 있었건만, 그 사실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었던 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고집이었는지도 모른다. 캐서린은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폐하께서는 앞으로도 영원하실 거라고.”

울먹이는 황후가 내지르는 말은 억지였으나, 아무도 부정하지 않았다.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는 그녀가, 마치 엄마 잃은 아이처럼 애처로워 보였던 탓이었다. 심금을 울리는 퍽, 가여운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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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가보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결재를 받으러 온 줄 알았더니 잔소리를 하러 왔던 거였나. 레이얼은 제 책상 앞에서 딱 버티고 선 키릭슨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왜 가봐야 하지?”

“병세가 심상찮다고 합니다.”

“겨울 감기라는 진단명은 미처 듣지 못했나 봐?”

“그거 아십니까, 전하? 겨울 감기에 매년 얼마나 많은 제국민이 죽어 나가는지.”

“죽어가는 이들이 대부분 빈민층이라는 것도 알고 있겠지?”

두 주종의 이야기는 살벌하게 이어졌다. 한쪽은 어떻게든 병문안을 보내려 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어떻게든 가지 않으려 했으니 오늘 이 이야기는 한참 이어질 예정이었다.

“익숙하다고는 하지만, 쉬운 병증은 아닙니다. 전하.”

“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는 의사를 모아 놓은 게 황실의료원이지.”

“그런 의사들도 결국 역대 황제 황후 폐하를 보내드려야 했었지요.”

“……이럴 거야?”

“가보세요. 제발.”

“겨울 감기라잖아. 수선부리지 마.”

“제발 부탁이니 가주시면 안 됩니까?”

“키릭슨 고어. 진짜 이유가 뭐야.”

레이얼은 쥐고 있던 펜대를 잉크병에 꽂아놓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보려는 듯 그와 시선을 맞댔다. 허공에서 맞닿은 시선이 몹시 고집스러웠다. 그 누구 하나 질 생각이 없었기에, 그들의 대치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사이 언제나 웃는 듯 곱게 접힌 키릭슨의 눈매는 마치 다른 사람인 양 무감하게 내리깔리는지 오래였다.

“보고 싶으니까. 가주세요. 전하.”

“키릭슨 고어.”

“가문에 하나밖에 없던 고명딸이었습니다. 직계 방계 통틀어 하나밖에 없던 고운 아이였어요. 아파죽을 것 같다고 하지만, 죽게 놔둘 리 없다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전하.”

“…….”

“전하, 죽을 만큼 아프다는 그 꼬락서니를 보고 싶습니다. 고통받는 비참한 꼴을 제 눈에 담게 도와주세요.”

“키릭슨.”

“전하, 제발.”

살벌하게 번들거리는 녹안과 달리 키릭슨의 두 무릎은 이미 바닥에 꿇린 지 오래였다. 그는 빌고 있었다.

“제발, 제발. 가주세요. 저를 데리고 가주세요. 전하.”

‘전하, 저를 수족으로 부려주십시오. 그 어떤 일을 시키시더라도 너끈히 해낼 수 있습니다. 전하를 찬란한 자리에 모실 수 있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무릎 꿇고 애원하는 키릭슨의 위로 7년 전 아직은 앳되었던 그가 겹쳐 보인다. 키릭슨은 직계, 방계를 통틀어 하나뿐인 영애라고 했으나 그건 겸손한 표현이었다. 직계, 방계 그리고 양가로 유일한 영애였다. 키릭슨 고어는 엘리슨 오겐의 이종 오빠였다. 오겐 백작부인의 조카이며 고어 자작가의 삼남. 그랬기에 키릭슨 고어는 길롯의 견제 없이 레이얼의 옆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고어 자작가는 서쪽의 끝에 작은 영지를 가지고 있는 한미한 가문이었기에 오히려 길롯측은 반겨주기까지 했다. 그들은 알 것인가. 콰이펄른을 내주십사, 토지 거래서를 작성하던 키릭슨이 여섯 번이나 서류를 새로 썼던 것을. 오겐 백작가에게 보낼 ‘황제의 위로’에 목이 메고 가슴이 벅차 키릭슨은 울며불며 그 서류를 썼었다. 그런데도 밖으론 하나도 티가 나지 않았다. 그의 복수심은 이토록 깊고도 짙으며, 집요했다.

“…….”

레이얼은 붉게 충혈된 키릭슨의 눈을 보며 가슴이 들썩이도록 크게 숨을 들이켰다. 저 가슴을 빼곡히 채운 분심이 얼마나 지독하고도 절절한 것인지 알아서. 지금 저 청을 어떤 마음으로 간원하는지 알 것 같아서. 입을 떼기가 너무 어려웠다.

“키릭슨 고어.”

“전하, 제발 허락해주십시오. 두 눈에 새겨 온 가족에게 위안이 될 광경을 전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하아…….”

무릎에 팔꿈치를 괴어 천천히 상체를 숙인 레이얼이 키릭슨의 귀에 바짝 입술을 붙였다.

“네가 대책도 없이 이러진 않았을 테지? 그럼, 어서 준비해 놓은 것을 꺼내 봐. 내가 너를 데리고 들어갈 방법을 말이야.”

“그럼요. 전하. 이미 마련해 두었답니다.”

너무도 선선한 키릭슨의 말에, 레이얼은 졌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가자꾸나.”

“감사합니다 전하. 이 은혜는 반드시 뼈를 갈아 갚을 것입니다.”

“사양하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식으로 도망을 쳐?”

“……전하, 가끔 전하는 정말 시오도르다우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기 싫다는 거지?”

“평생 보필하겠다는 뜻이지요.”

축 처지는 것 같던 분위기가 이내 살아났다. 얼른 가시자며 길을 재촉하는 키릭슨이 챙겨 든 것은 그의 영지가 있는 서부 특산품이며, 제국민이 모두 혀를 내두르는 것이었다.

“……그거 절벽에서만 집을 짓는다는?”

“아, 예.”

키릭슨이 제 손에 들린 유리병을 자랑스럽게 들어 보였다. 위로 길쭉한 유리병에 든 것은 벌집이었다. 바닷가 절벽에서만 집을 짓는다는 벌이 만든 꿀은 진하고 향이 좋을 뿐 아니라 그 효과도 엄청났다. 염증과 감기는 물론이거니와 통증에도 효과가 탁월해, 일반 약으로는 효과를 보지 못한 중증 병자들이 기를 쓰고 구하는 것이었다.

“아깝지 않겠나?”

그의 말에 키릭슨이 더없이 활짝 웃어 보였다.

“아깝긴요……. 아아. 걱정 마세요 전하. 제가 전하 맛이나 보시라고 한술 따로 떠 놓았답니다.”

“한, 열 술 떠 놓지, 그랬어?”

“……예?”

“어차피 자네가 손에 든 것이 결국 누구의 차지가 될지 자네나 나나 뻔히 아는데.”

“염려 마세요. 그럴 일은 만들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설령 그런다고 해도 덜 아까워하셔도 됩니다. 이건 하품이니까요. 전하께 드릴 특품은 보관 중입니다.”

“됐어. 자네나 많이 드시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내 곁에서-,”

“싫어요.”

“왜, 또.”

저벅거리는 걸음 사이로 어울리지 않는 도란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먹고 건강해지면, 죽도록 부려 먹으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키릭슨 고어. 자네, 요즘 점점 더 영리해지는 거 같아.”

“전하께서 절 얼마나 멍청이로 보셨는지 잘 알겠습니다.”

“알면, 이제 그만 정신을 차리지 그래?”

잠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들은 황제가 머무는 본궁에 다다라 있었다. 황태자궁이라고 안심할 만한 건 아니나, 여기서부터는 조심에 조심을 더해도 부족하다. 키릭슨은 레이얼의 말에 ‘보좌관’다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벌집을 넣은 유리병 표면 위로 손 모양을 따라 후끈한 하얀 김이 새겨졌다. 누가 봐도 긴장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레이얼은 알고 있었다. 저건 긴장이 아니라, 죽도록 아프다는 원수를 본다는 생각에 차오른 흥분이라는 것을.

“조심하게.”

“조심, 조심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키릭슨이 더욱 공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꾹 다문 입술 아래로 불끈 돋아난 턱근육이 인상 깊었다. 아마 저건, 웃음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서일까…….

“전하?”

“고하시게. 황제 폐하께서 아프시다 하여 귀한 것을 가지고 찾아왔어.”

“예예.”

살에 파묻힌 시종장의 눈이 레이얼 뒤의 키릭슨 손에 들린 유리병을 훑고 지나가더니 일순 홉뜨였다.

“시, 실베르카?”

“고하래도.”

흡. 시종장의 놀란 목소리에 어디선가, 누가 다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울렸다.

“키릭슨. 조심하게. 귀한 것이니.”

“조, 조, 조심하겠습니, 다.”

레이얼의 경고에, 키릭슨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유리병 표면의 하얀 손자국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크고 또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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