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 황태자의 피앙세2021.04.27.
싱글거리던 얼굴이 단번에 차게 가라앉았다. 클로이는 그대로 몸을 틀어 뒷길로 경로를 바꾸었다. 일전에 레이얼과 함께 타고 넘었던 산으로 가려는 생각이다. 옆으로 난 작은 문도 정문도 불가하니 저택 뒤로 숨어드는 수밖에 없었다. 오래지 않아 저택의 담으로 기어오른 클로이가 작게 볼멘소리를 했다.
“……이러다 에반에게도 들키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조심하는 게 좋죠.”
“로지?”
“기다리고 있었어요.”
느긋한 말투와 달리 로지의 얼굴엔 초조한 기색이 가득했다.
“옷은 준비해뒀어?”
“그럼요.”
훌쩍 뛰어버리면 좋은데, 아직 상처가 말끔하지 않았다. 모양 빠지게 어기적거리며 담을 기어 내려오자니 왈칵 짜증이 난다.
“저거 뭐야?”
“공녀님께서 괜찮으신지 안부를 여쭙고 싶대요.”
“돌았대? 아르네가 문을 닫아건다고 공표했는데, 지금 우습게 보는 건가?”
“어휴.”
“무례한 길롯. 진짜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짜증을 부리던 클로이는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반짝 났다. 내쉬를 조금 전에 어디서 만났던 건지 떠올랐다.
“언제 왔어?”
갑자기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초조함에 목구멍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음……. 한 삼십 분 정도 되었을까요?”
“빨리 가자.”
그 길로 클로이는 날다람쥐처럼 테라스를 박차 올라 곧장 방으로 향했다. 침대 위에 가지런히 마련된 취침용 드레스와 도톰한 겨울 가운은 척 보기에도 막, 잠에서 깬 공녀가 입고 있을 법한 것들이다.
“……내가 언제 이런 걸 입고 잤다고.”
“대외적 위신이 있죠.”
“그래 뭐. 대충 그렇다고 치자.”
재빨리 사냥복을 벗고 드레스로 갈아입은 클로이는 제 볼을 세게 문질렀다. 차게 질린 볼이 거친 손길에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화끈거리며 열이 나는 꼴이 따끈한 침대에서 막, 나온 모습이다. 잠깐사이 클로이가 벗어둔 사냥복을 정리한 로지가 세안수를 준비해서 가지고 왔다.
“……씻고 나가야 할까?”
“자다 깬 공녀님이라지만 맨얼굴로 나가는 게 이상하죠.”
“진짜 성가시네.”
툴툴거리면서도 클로이는 로지가 시키는 대로 착실히 씻었다. 오래 걸린 것 같았으나, 입고 씻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십분 남짓. 젖은 얼굴을 닦는 와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에반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가씨.”
“들어와 에반.”
클로이는 맨얼굴로 에반을 맞이했다.
“일어나셨군요.”
“달리 방법이 있나.”
“한 시간을 꼬박 세워두시렵니까?”
“꼭 만나줘야 하나?”
“적당히 처리하려 했으나 고집이 상당합니다.”
“제깟 게 뭐라고. 문을 닫아걸었을 땐 황제도 만나주지 않는데 말이야.”
“길롯이잖아요.”
“……가지.”
“그 차림새로요?”
에반의 질문에 클로이가 생긋 웃었다.
“꺼지라는 뜻을 알아 차려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부족할까?”
“그런 눈치가 있는 작자면 이 시기에 심지어 이런 시간에 오지 않았을 텐데요.”
“시오도르들은 눈치가 들락날락하는 모양이니. 이번엔 알아차리길 빌자구.”
“…….”
에반은 더 이상 클로이를 말리지 않았다. 취침 드레스를 보이는 것이 싫긴 하지만, 어차피 두툼하고 커다란 가운으로 둘렀다. 늦은 시간 집을 찾은 손님에게 무례를 우회적으로 꾸짖기 위해 이런 차림을 하는 귀부인도 더러 있었으니까.
“그런데 새것 티가 너무 나네요.”
“……이런 얄팍하고 나풀거리는 걸 내가 입을 일이 어디 있다고.”
“하긴.”
에반과 로지를 대동해 나가는 길이라서인지, 내쉬의 모습에 느꼈던 초조함은 거의 사라졌다.
“그나저나, 날씨가 꽤 추워졌어. 북부로 돌아갈 시기도 슬슬 고민해야 할 때가 된 거지?”
“예. 올해는 추위가 이른 편이라 안 그래도 말레사가 걱정이 한가득이더라구요.”
“아, 로지는 말레사랑 계속 연락하고 있었구나.”
“아무래도요.”
“눈 소식이 있기 전에 가야 하니, 정말…….”
말을 하다 말고 클로이가 걸음을 멈추었다.
“어째서 내쉬 황자가 아직도 저러고 있지?”
“‘아직도’가 아니라 내내 밖에 서 계셨죠.”
잠깐, 답답해서 나와 있던 게 아니었어?
“왜?”
“압박하려는 거겠죠.”
“가지가지 하네.”
코웃음 치는 차가운 목소리에 에반이 잠깐 어깨를 떨었다.
“그냥 크게 웃지, 그래?”
“그건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흥. 웃기네. 저따위 태도는 그럼 예의 있고?”
“길롯과 비교하시면 곤란합니다. 아르네의 긍지를 지켜주세요.”
에반의 조롱에 클로이 역시 소리 없이 웃음을 삼켰다. 뻔히 내쉬 ‘시오도르’임을 알면서도 굳이 길롯이라 칭한 것은 황제에게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는 내쉬의 처지를 비꼰 것이다. 비비 꼬인 비아냥에 클로이가 혀를 내둘렀다.
“빨리 처리 하고 들어가자. 감기 걸리겠어.”
기분 탓일까, 순간 내쉬와 눈이 마주친 듯도 싶었다. 서로를 빤히 응시하며 걸음을 옮기던 끝에 드디어 지척에 닿았다. 굳게 닫힌 공작저의 정문을 두고 마주 보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문이 창살 형식이라서일까, 클로이는 불청객을 쫓으러 왔는데도 꼭 갇힌 느낌이 들었다.
“레이디 아르네.”
“내쉬 황자님.”
클로이는 저를 부르며 웃는 내쉬를 향해 형식적인 인사도 없이 건조하게 대꾸했다.
“자는 걸 깨웠습니까?”
“아르네는 문을 닫아걸었지요.”
대화가 뚝 끊겼으나, 내쉬는 무안해하는 대신 한 발짝 더 바짝 다가왔다. 그의 구두 끝에 철창문이 부딪히며 철컹거리는 쇳소리가 울렸다.
“인사할 틈도 주지 않으셔서 어쩔 수 없었답니다.”
“굳이. 이 시간에요?”
“지나가던 길이라고 핑계라도 대보게요.”
“지나가던 길?”
“또 다른 레이디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거든요.”
담백한 말투가 뭔가 눈치채고 쫓아온 건 아닌 듯싶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긴장이 봄눈 녹듯 사라지던 차, 내쉬가 고개를 기울여 철창에 이마를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혹시, 이러면 관심을 좀 받을 수 있을까 했는데. 어떻습니까?”
“……!”
클로이는 주먹을 움켜쥔 채 한걸음 물러섰다. 방금, 저 개자식을 후려칠뻔했다. 싱긋 웃으며 건넨 말은 완벽한 ‘유혹’이었다.
“아, 이런 거로는 부족한가.”
“내쉬 황자. 난 황태자비가 될 몸입니다. 부디. 그 사실을 잊지 말길 바라요.”
예비 황태자비를 ‘유혹’하는 황자라고?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다. 이를 으득 문 클로이는 문득 실소했다. 도발이라면 제법이고, 조롱이라면 역시 수준급이다. 지금 내쉬의 모습은 철창에 갇힌 짐승을 슬슬 약 올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화를 내면 ‘짐승’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꼴이다. 용암처럼 끓어오르던 분노가 차게 가라앉았다.
“에반. 돌아가지.”
“레이디 아르네, 방금 황태자비가 되실 거라고 하셨나요?”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유들거리는 내쉬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렇습니다.”
“……내가 황태자가 되어도?”
대놓고 레이얼을 제거하겠다는 소리에 형식적으로 짓던 미소도 죄다 휘발되었다. 이미 에반과 로지의 눈은 흉흉한 시선을 흩뿌리고 있었다.
“꿈은 이뤄지지 않아 꿈일 뿐일 것을요.”
“아니지 레이디 아르네. 이건 꿈같은 말랑한 소리가 아니야.”
제멋대로 뻗고 싶어하는 주먹에 힘을 바짝 줘 가까스로 버티는 클로이에게 얄밉도록 느긋한 목소리가 울렸다.
“선전포고야. 그대.”
“…….”
“그동안, 얌전히 기다려줘. 오래지 않아 맞으러 올 테니까.”
“에반. 들어가자. 앞으로 그 어떤 방문객에게도 예외를 두지 말아.”
“예. 공녀님.”
하핫. 공작저로 돌아가는 클로이의 등 뒤로 내쉬의 웃음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콕콕콕. 유리창을 쪼는 소리에 레이얼이 창문을 열어주었다. 밤하늘을 날아온 작은 새를 손 위에 올리자 얄팍한 피부를 타고 냉기가 스며들었다.
“저런. 이 밤에 무슨 일일까?”
레이얼은 새의 갈색 머리를 검지로 슬슬 쓸어주면 좋은 목소리를 내주었다. 새가 물어온 편지를 펴든 레이얼의 얼굴은 바짝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그는 헛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살인은 안 된대도.”
새는 클로이에게서 온 것이었다.
-내쉬 황자, 그 개자식이 이 밤에 감히 아르네를 방문했어! 원한다면 오늘 밤 후계 자리를 공고히 해주지. 말만 해. 곧장 처리해버릴 테니까.
“개자식이라니.”
거의 일생을 시달린 그조차도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소리였다. 내쉬가 아르네 공작저를 함부로 다녀간 건 괘씸하나, 폭언에 가까운 클로이의 서신을 보고 있자니 속이 시원해진다. 레이얼은 몇 번이고 다시 읽고 나서야 아쉬워하는 손길로 편지를 벽난로에 던져넣었다. 흔적이 남지 않게 완벽히 재가 된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편지지를 집어 들었다.
-이 밤, 무료하진 않으셨겠습니다. 좋은 꿈 꾸세요. 속히 뵐 날을 기다립니다.
피앙세에게 전할 법한 다정한 서신을 완성한 그는 다시 새를 하늘로 날려주었다. 내쉬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새를 쓰는 것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설령 잡히더라도 꼬투리 잡히지 않게. 내일이라도 이야기를 해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레이얼이 막, 창을 닫으려던 찰나에 새가 날아왔다.
“어째서……?”
당혹한 표정으로 돌아온 새를 받아든 레이얼은 낮게 신음했다. 이건 이베트 후작가로 보냈던 새다! 레이얼은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새가 물어온 편지를 펴들었다. 설마 실패인 건가? 불길한 상상에 절로 편지를 쥔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편지를 훑어내린 레이얼은 클로이의 새를 받았을 때보다 더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이베트 후작은 지난 세월을 만회하려는 듯 무척이나 열성적이고도 유능하게 움직여주었다. 레이얼이 부탁한 것은 귀족파의 세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아르네 공작이 쓰러진 이후 레이얼은 제대로 곤경에 처했다. 그를 지지한 후 ‘아르네’ 공작이 망가진 것을 본 귀족들이 정말 너나 할 것 없이 등을 돌렸다. 현재 레이얼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황태자비’로 딸을 보냈다가 잃은 가문들이었다. 황가의 손에 억울하게 쓰러진 딸을 유일하게 추모해준 레이얼을 그들은 기억해주었다. 원망은 이내 이해로 바뀌었으며, 이제는 유일한 그의 편이 되었다. 하지만 겨우 여섯 가문으로는 부족했다. 심지어 그들은 캐서린 황후가 레이얼을 위해 손수 고른 가문이 아니었던가. 정치적 입지가 현저히 떨어지고, 아르네 공작처럼 수도에서 먼 곳에 영지를 둔 귀족들이었다. 수도 안에서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레이얼은 이베트 후작에게 포섭을 요구했다. 그것이 수일 전의 일인데 잠깐사이 이베트 후작은 놀랍도록 많은 것을 해냈다. 그의 가신들에게 충성맹세를 받아온 것으로 부족해 중립 귀족파 둘을 새로이 영입했다. 그뿐인가 사병 규모를 연말까지 두 배로 늘리겠단다. 이 정도라면 해볼 만하다. 게다가 레이디가 죄다 길롯의 세력을 털어 허덕이는 제국민에 아낌없이 뿌려주지 않았나. 지금, 완벽히 ‘반황제파’의 모습으로 길롯을 타도하겠다고 나선다면 민심이 그를 지지하리라. 늘 혼자였던 레이얼 시오도르의 곁이 빼곡히 채워지는 순간. 비록 혼자였으나, 결코 혼자가 아닌 순간. 레이얼이 습관처럼 속삭였다.
“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