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 좋아해, 널 사랑해.2021.04.23.
시오도르들은 반드시 화술 선생을 붙여야 한다. 클로이는 누가 들어도 오해하기 딱 좋은 소리를 너무 진지하게 하는 레이얼을 보며 신음했다. 달달하다 못해 녹아내리는 고백에 얼굴이 달아올라서 식지를 않는다.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맙소사. 나 좀 설렜다고. 사랑 고백이 아니라, 솔직한 모습이 좋다는 말인 것을 아는데도.
“흠흠. 저기……그.”
“좋아해 클로이.”
이 남자가 진짜 누굴 잡으려고! 한마디 야무지게 쏘아주려던 클로이는 레이얼과 눈이 마주친 순간 턱을 살짝 떨궈버리고 말았다. 웃고 있었다. 레이얼 시오도르가. 너무도 사랑스러운 것을 바라보듯이 미치게 달콤하게. 댕댕댕댕!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타종 소리가 울리는 착각이 든다. 위험해, 위험해.
“굳이 수도에 ‘아르네’만 적응할 이유가 있나. 북부의 방식 굉장히 마음에 들어. 좋아해 클로이.”
“말 조심해. 전하. 그거 지금 잘못하면 고백처럼 들려.”
“제대로 듣고 있어. 고백하는 중이야.”
뭐? 이분이 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돌아버렸지? 주춤. 클로이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전하. 일단 진정하고…….”
그러나 클로이는 채 한 발짝 거리도 벌리지 못하고 붙들려서 또 다시 레이얼의 고백을 들어야 했다.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진심이야 클로이. 좋아해.”
“갑자기 왜? 아니 어째서.”
질문은 두 개였고, 진심이라는 레이얼만큼이나 클로이 역시 진지했다. 얼굴에 열이 올라 화끈거리는 것이 여실했으나, 지금 부끄러움에 몸을 뒤틀 때가 아니라는 자각은 있었다. 색이 옅은 레이얼의 푸른 눈동자에 비친 제 얼굴이 온통 붉었지만, 클로이는 답을 기다리며 빤히 응시했다.
“그대는 내 편이잖아.”
“…….”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나를 그대만이 한 편이라 해주지 않았나.”
“감사와 은애는 다른 감정이야 전하.”
“알아. 그래서, 고맙다는 소리 대신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거야.”
레이얼은 클로이를 가볍게 끌어당겼다. 강제한다고는 볼 수 없는 약한 힘이었다. 그 안에 담긴 청유가 너무도 또렷해, 클로이는 버티는 대신 선선히 끌려가 그의 코앞에 서주었다.
“매일 밤마다 생각났지. 처음엔 ‘계약’에 묶였으니 편해서라고 생각했고 다음엔 언제나 위험한 일에 나서는 그대가 걱정되어서라고 생각했다.”
옅은 눈동자가 그녀에게 작살처럼 박혀 떨어지지 않는다. 레이얼은 그런 시선을 해선 잘도, 달게 웃었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지, 이건 호기심과 걱정보다 조금 더 진득한…… 무언가라고. 그래서 다음엔 첫 우방에 대한 호감과 염려라고 생각했다.”
레이얼의 이야기는 끊어질 듯 끊기지 않고 나직하게 계속 이어졌다. 클로이는 고해하듯 제게 그간의 감정을 털어놓는 남자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듣기 좋은 목소리가 뭉개져 더는 ‘말’이 되지 못하고 의미 없이 흩어지는 이 순간. 클로이의 감각을 오롯이 앗아가는 것은 행복한 듯, 그러나 뭔가를 눌러 참는 것이 여실한 남자의 표정이었다. ‘함부로 다가가면 천박하다’는 세뇌를 깨끗이 떨쳐내지 못했기에 종종 레이얼의 눈꼬리는 붉게 달아오르기도 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어여쁜지 레이얼은 알고 있을까.
“너무 꽁꽁 감추니까 그래서 집착한다고 생각했지.”
중간중간 들리는 이야기는 클로이도 짐작하던 것들이었다. 철저히 신분을 감추고, 뭐든 시키는 대로 죽도록 굴러서라도 해낸다. 하나, 반 뼘쯤 벌어진 간극은 철저히 지킨다. 호기심과 집착 그리고 서운함과 묘한 호승심을 불러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그러다가, 그대의 정체를 알아차린 순간 깨달았다.”
“어떻게?”
“다행이다. 그대가 로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맨 처음 든 생각은 안도였다. 그대의 피앙세를 떠올릴 때마다 느꼈던 불쾌감, 일이 끝난 후 그대가 예고한 부재에 대한 불안감. 그 모든 것은 결코 ‘우방’에게 가질 만한 감정이 아니지.”
팔목을 거머쥔 레이얼의 손이 풀어지나 싶더니 이내 허리를 감아 온다. 허리띠 위로 또렷하게 느껴지는 옅은 압박감을 느끼며, 클로이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래서 이 순간, 나는 감사 인사 따위는 하지 않으려고 해.”
“이기적이긴.”
“맞아. 이기적이야. 그러니까, 감사는 앞으로 남은 기간 느긋하게 갚도록 할게.”
얼렁뚱땅. 제멋대로에 이기적이고, 고백이라고 보기엔 너무 형편없다. 하지만 클로이는 레이얼의 고백이 싫지 않았다. 화려하고도 유려한 말들로 포장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레이얼의 고백은 거칠고 더러 이기적이기도 했으나 그래서 더욱 진실하였다.
“로이라서 좋은 거야, 나라서 좋은 거야?”
“모두가 그대라서 더욱 매력적이지.”
“언제부터?”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어. 처음부터 그대는 너무 강렬했잖나. 도통 제정신일 틈이 없었어.”
“흐응…….”
“그대는?”
“응?”
고개를 숙여 이마에 코끝을 가볍게 비빈 레이얼이 눅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는, 내가 어때?”
딱딱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가득 배인 건 긴장감이었다. 말도 안 돼. 클로이는 저를 선택해주길 바라며, 잔뜩 긴장한 모습의 미인을 보자니 속이 울렁이다 못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차라리 내 고백을 영광으로 여기라는 명령조의 오만한 말을 했다면 어울렸을 텐데. 긴장감에 뺨을 굳힌 그를 보자니, 반동으로 제가 흥분해서 날뛸 것 같다.
“……그대의 취향은 뭐지?”
나라고 해줘. 소리 없는 소리가 머릿속을 감미롭게 잠식한다.
“그대의 대답을 듣고 싶어.”
어서. 나라고 해. 나를 그대의 것으로 삼아 줘. 연푸른 눈동자가 클로이가 세운 벽을 날카롭게 파쇄하며 파고들었다.
“내가 싫지는 않은 거지?”
“아…….”
이건 못 버틴다. 나를 좋아해달라는 게 아니라, 싫어하지 않기만을 바라는 저 처연한 질문이라니. 작전이라면 제법 영리했고, 진심이라면 너무 가혹하다.
“싫긴.”
겨우 한마디에 목이 메 클로이는 잠깐 숨을 골라야 했다.
“그럼?”
두근두근. 이미 상체가 꼭 붙어있어서 지금 이 심박이 누구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클로이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레이얼을 보자니, 이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성싶었다. 내리깐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는 클로이가 여태 보아왔던 그 어떤 인물들보다 매혹적이고도 근사했다. 전체적으로 색이 옅은 남자에게서 유일하게 색이 또렷한 것은 이번에도 눈꼬리였다. 열이 쏠려 하얀 피부 위에 혼자 붉은데, 그것이 연푸른 눈동자와 어우러져 더없이 야해 보였다.
“그럼?”
잠깐 말을 머뭇거린 사이 레이얼이 재차 되물었다. 인내심을 잃은 목소리는 나직하다 못해, 살짝 쉰 듯 거칠게 울렸다.
“말했잖아 전하. 싫으면 꺼지라고 할 필요 없이 걷어찬다고. 싫은 남자랑 이러고 있을 리가 있겠어?”
“그럼?”
레이얼은 집요하게 캐물었다. 클로이 역시 말을 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좀처럼 이 말만은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 너머까지 꽉 차오른 설렘이 마치 아교인 양 입을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응?”
“나도……나도 조, 조.”
가까스로 소리를 내는데 성공한 클로이를 향해, 한숨 소리가 울렸다.
“보고 있자니 절로 안타까워지는 모습이야. 그만해도 돼. 대답을 들었다고 할게.”
“고, 고마워.”
“입 맞춰도 될까?”
“응.”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그 정도야 뭐. 클로이는 솜털 같던 그의 입맞춤을 기억하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틀어 뺨을 내미는 순간, 레이얼의 고개가 깊게 숙여지는 듯싶더니 입술이 겹쳐졌다.
“……!”
뺨이 아니야? 당혹감에 ‘아!’ 작게 신음하던 순간이었다. 실금처럼 벌어진 틈새로 레이얼이 밀고 들어왔다. 예민한 점막을 스치는 타인의 살점을 실감하는 순간, 현이 울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핑, 아득한 소리와 함께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약한 추락감과 함께 설명하기 힘든 짜릿함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전신을 관통하는 벼락에 꿰인 듯 오싹하다. 레이얼은 당혹감에 뻣뻣하게 굳은 클로이를 살살 달래듯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보드라운 살을 쓸고, 옅게 빨아들이며 상냥하게. 그러나 착실히 그녀의 긴장을 녹이며 집요하게. 뾰족하게 솟은 어깨가 무너지는 긴장을 따라 차근히 내려앉고, 크게 뜨인 눈이 쏟아지는 아찔함에 감겼다. 허리를 받친 레이얼의 손이 목덜미를 움켜쥐더니, 고개를 슬쩍 꺾었다. 고개가 비틀리는 것과 함께 움직임이 한층 더 내밀해졌다. 저릿하고 간지럽다. 클로이는 마구잡이로 엉킨 숨을 어쩌지 못하고 한껏 허덕였다. 중간 중간 레이얼이 입술을 떼주지 않았다면 진작에 숨이 막혀 뒤로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이얼은 그런 식으로 클로이가 달아나게 두지 않았다.
“숨, 쉬어야지.”
쪽. 붉게 달아오른 뜨끈한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며 정신을 깨우곤, 이내 다시 혼몽해질 때까지 몰아세웠다. 연이은 몰이에 클로이는 거의 사지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으나 탄탄하게 받쳐주는 레이얼 때문에 쓰러지지도 못했다. 클로이는 산채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뜨끈하고, 달큼하게. 그 어느 때보다도 질척하게. 쉽사리 달아날 수 없음을 깨달은 클로이는 내내 방어하듯 레이얼의 가슴을 밀어내던 손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뻗어난 넝쿨처럼 가는 팔이 남자의 목덜미에 둘리는 것과 함께, 옅은 소리가 터졌다.
“흐읍!”
울음소리 같기도 한 새빨간 신음. 클로이의 두 뺨과 똑같은 색이었다.
“헉, 헉. 이, 미친놈이.”
어두운 공기를 가르고 밭은 숨이 터질 때마다 허공에 숨이 하얗게 부서진다. 결국, 클로이는 도망쳐 나와버렸다. 사람이 곤죽이 되도록 좀처럼 놔주지 않으니 살 수가 있어야 말이지. 아직도 그에게 빨린 살점이 홧홧하고 아리다. 어째서 적당히 할 줄을 몰라.
‘그만 좀!’
‘왜? 난, 북부식이 좋다니까. 난 그대가 좋아. 늘 그대와 함께 있고 옆에 있으면 닿고 싶어. 더하고 싶은데 싫어?’
‘그…….’
‘싫어?’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게 아니긴! 그 소리를 왜 해서!”
클로이는 주먹을 휘둘러 제 머리를 쾅 소리가 나게 때렸다. 빈틈을 보이는 소리를 해서 오늘 이 사달이 난 게 아닌가! 상대는 시오도르였다는 것을 깜빡했다. 제 입으로도 ‘집착’을 타고났다는 시오도르에게 빌미를 주다니! 하지만, 제 손으로 머리를 퍽퍽 두들기는 와중에도 클로이는 연신 웃고 있었다.
‘좋아해.’
‘입 맞춰도 될까?’
머릿속에서 쉬지 않고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깃털도 아닌데, 온통 가슴이 간질거려 웃음이 참아지지 않는다. 히죽거리며 달리길 한참, 공작저가 시야에 든 순간이었다.
“하?”
클로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지워졌다. 공작저가 대낮같이 밝았다. 그 훤한 불빛 아래 공작저 정문에 있는 것은…….
“황실 마차……?”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건 분명히 내쉬 황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