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 내가 바꿀게2021.04.20.
“오랜만이야.”
오……랜만? 클로이는 저도 모르게 입을 오므라뜨렸다. 순간 저 미친놈이 자신을 쫓아다니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레이디. 내쉬 황자가 이유 모를 집착을 하던 아르네 공녀가 아니다. 일순 굳었던 어깨가 풀리며 짙은 한숨이 터졌다. 진짜 시오도르들은 화법에 문제가 있다.
“오랜만이라고 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
“앙탈이 여전해.”
아, 앙탈? 정신이 혼미해지는 능글맞은 소리에 소름이 쫙 돋는다. 고작 며칠 만에 더 독해졌잖아. 소름 돋은 팔뚝을 힘껏 문지르며 클로이는 흥분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뻔한 도발인데 말려들면 손해다.
“어여쁜 황자님, 오늘은 선약이 있어 더는 놀아주기 힘들겠소. 양해를 구하지.”
허리를 굽혀 보내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클로이가 막 지붕을 박차려던 순간이었다.
“레이디. 오랑그리 후작과의 약속을 이어받았으니 그리 내외하지 않아도 되겠어.”
약속을 이어받다니? 뜻밖의 말에 클로이는 눈을 가느다랗게 찌푸려 내쉬 황자와 오랑그리 후작이 있는 곳을 살폈다. 빼곡하게 기사로 채워진 것은 아까도 본 것이나, 자세히 보니 전부 황실근위대다. 낯익은 열 명과 같은 차림을 한 스무 명.
“하…….”
황실근위대로만 서른 명이라고? 아직 옆구리 부상도 완전히 낫지 않았는데 난이도가 굉장해졌다. 클로이는 조금 더 집요하게 기사들을 훑었다. 만약 레이얼의 기사도 늘어났다면, 레이디 명성이고 자시고 간에 이대로 내뺄 생각이었다. 북부의 제1 사냥꾼이라고는 하나 그녀는 천하무적이 아니다. 살아남아야 뒷일도 도모할 수 있는 법.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레이얼의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처음 보는 표식을 단 기사 열 명이 보일 뿐이었다. 오랑그리 후작의 기사인가?
“……어쩔까.”
턱을 쓸며 고민하는 듯 중얼거렸으나, 클로이는 레이얼의 기사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기꺼이 이 판을 헤집을 용의가 생겼다. 제아무리 오랑그리 후작의 기사가 용맹하다고 한들, 황가의 기사보다 나을 순 없다. 유일한 예외는 시오도르와 함께 이 엘피디오 제국을 새로이 세운 아르네 뿐이다. 해볼 만하다. 허리를 곧게 세운 클로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내쉬를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역시 안 되겠어. 내쉬 황자. 애초에 내가 목표한 것은 오랑그리 후작가의 반지. 약속을 이어받을 수 있을 리 없지. 아쉽지만 빠져주시게.”
“흐응……. 그래?”
클로이의 말에 시큰둥하게 중얼거린 내쉬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후작.”
그 누구도 ‘귀족’을 그것도 후작가의 주인을 개 부르듯 저런 식으로 부르지 않는다. 심지어 황제라 할지라도. 오만과 거만의 뛰어넘는 경악할 행동에 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진다. 그런데 정작, 오랑그리 후작은 그리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황자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후작은 공손하다 못해 비굴하게 굴었다.
“레이디가 예고한 것이 ‘아틸라’ 홍염의 눈물이라고 했던가? 내가 사지.”
“예?”
“청구 대금을 황자궁에 보내.”
“예예. 황자님.”
내쉬의 내민 손바닥 위에 반지가 올라왔다. 타오르는 태양을 잘라 놓은 듯, 그 색이 선명하고도 찬란하다. 반지를 새끼손가락에 찔러넣은 내쉬가 클로이를 놀리듯 손을 내보이며 웃었다.
“자, 이제 주인이 바뀌었어. 레이디. 그럼 이제 약속을 이어받아도 되겠어?”
“……후작 신의를 저버리는군.”
“신의라니? 하하하하.”
“흥미가 식었어.”
클로이는 지극히 진심이었다. 눈앞에서 목표물을 빼앗겼다. 내쉬의 손에 들린 반지를 털어오는 것쯤이야 어린아이 손에 들린 사탕을 빼가는 것만큼 쉬운일이다. 그러나 ‘레이디’의 예고를 이런 식으로 가뿐하게 가로채 가는 걸 두고 보는 건 다른 이야기다. 길롯파인 후작이야 내쉬에게 주인 눈치 보는 개처럼 머리를 조아릴지 몰라도, 그녀는 이런 모욕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돌아가야겠군. 아 참. 후작, 오늘 일은 다음에 어떤 방식으로든 갚게 해주겠소.”
“뭐?”
설마, 이런 일로 레이디가 물러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지 내쉬에게서 시린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레이디, 지금 꽁지 말고 도망가는 건가?”
“내쉬 황자. 그대는 항상 판단을 너무 경솔하게 내리는군. 어째서인지는 잘 생각해보도록 하오.”
“같잖은 말장난은 그만 두지.”
“이만.”
클로이는 그길로 지붕을 박차고 하늘로 날았다.
“레이디!”
등 뒤에서 내쉬가 외치는 소리가 울렸으나, 알 바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레이얼은 소리도 없이 대뜸 문을 열고 들어온 클로이의 모습에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건 내가 물어야 할 소리 같은데, 전하. 뭐 할 이야기 없어?”
“뭘?”
유리창을 깨뜨린 단검을 허리띠에 갈무리해서 정리하는 클로이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레이얼은 클로이가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쉬 황자가 와 있던데.”
“뭐라고?”
어리둥절해 하던 남자의 얼굴이 한마디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순식간에 차갑게 벼려진 칼날처럼 흉흉해진다. 그 모습에 클로이는 이마를 탁 소리 나게 세게 쳤다. 레이얼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하긴, 제 일에 내쉬가 끼어들게 놔둘 리가 없지 않나? 설령 끼어들었다 한들 그라면 분명히 경고를 해줬을 것이다. 모욕감에 흥분해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을 놓치고 말았다.
“무슨 일이야? 제대로 이야기해 봐. 내쉬가 어디에 왔다고? 그가 왜?”
“진정해 전하. 나도 당황해서 달려온 거니까.”
클로이는 벌떡 일어난 레이얼을 가볍게 떠밀어 다시 앉혔다.
“그가 오랑그리 후작저에 있었어.”
“몰랐다.”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린 레이얼이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그대에게 검을 들이밀지 못하도록 내 기사들을 후작저 밖에 둘러놓았거든. 안쪽에도 좀 남겨둘 것을.”
레이얼의 자책에 클로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됐어. 미리 알았다 한들 가지 않을 이유는 안 돼. 전하도 모른 걸 보니 아마, 근위대와 함께 들어갔을 테지.”
“그나저나, 그 탐욕은 유전되나 보군.”
클로이도 레이얼의 말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캐서린 황후가 잠잠해지자, 내쉬가 설친다.
“이것 역시, 대외활동을 시작한 것과 연관 있겠지?”
“‘레이디’를 붙잡아 주목받고 싶었겠지.”
“저런…….”
“그런데, 클, 흠. 로이. 오늘은 꽤 이른 느낌인데?”
자정도 되지 않은 시간.
“응. 그냥 왔거든.”
“아.”
짤막한 탄성. 클로이는 이것이 아쉬움인지, 아니면 언짢음인지 알아내려 레이얼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를 바라본 순간 클로이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잘했다.”
너무도 만족스럽게 웃는 남자의 얼굴에 거짓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클로이가 제 ‘안위’를 챙긴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 아니, 내쉬를 버리고 제게 온 것을 기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상대하지 말렴.”
“그것도 한두 번이지. 자꾸 이러면 예고장을 받는 귀족마다, 전부 내쉬 황자를 부를지도 몰라. 그럼, 내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위명을 챙길 수 있겠지!”
말하다 보니 살짝 분하다. 클로이는 씩씩거리는 걸 숨기지 않았다.
“내쉬가 설치기 전에 전하의 기사에게 ‘퇴치’당하는 걸 고려해볼걸! 아쉬워.”
“공이 내쉬에게 돌아가지 않게 할 테니 걱정 말아. 곧 ‘레이디’가 나서지 않아도 되게 해줄게.”
“레이디를?”
‘레이디’의 은퇴 조건을 아는 그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하다니. 이베트 후작과의 일에 급진전이 있는 건가……? 하지만, 그의 성과를 의심하듯 묻는 건 실례다. 혀끝까지 밀려 나온 질문을 점잖게 눌러 삼킨 클로이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
“응.”
“아직도 비밀통로는 쓸 생각이 없고?”
“그건 혼인 후에 알려줘.”
“혼인?”
어……. 클로이는 진지하게 제 혀를 씹어버릴지에 대해 고민했다. 별생각 없이 한 말에, 레이얼의 눈가가 붉어졌다. 발긋하게 달아오른 눈꼬리가 예쁘고 야해서 덩달아 클로이도 쑥스러워졌다.
“어어. 그…….”
‘불리할 땐, 미련하게 버티는 게 아니라 도망치는 겁니다.’
로지의 음성이 떠오른 건 신의 한 수였다.
“그, 그럼 나 이만 갈게.”
슬금 슬금 뒷걸음질로 거리를 벌려, 막 뛰려던 순간 손목이 붙들렸다.
“약혼했는데, 그래도 안 되나?”
분명히 손도 그가 쥐고 있고 제의를 하는 것도 바로 레이얼 시오도르인데. 어째서 그가 쑥스러워하는 걸까. 클로이는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입을 열었다.
“왜, 부끄러워하는 거야.”
“…….”
“전하가 잡고 있고, 전하가 제의하는 건데. 왜 희롱이라도 당한 것처럼 수줍어하는 거냐고.”
평소의 그와는 그 간극이 너무 대단하다. 레이얼이 이유 없이 그럴 리가 없으니, 오늘 물어보자. 그렇게 별생각 없이 꺼낸 질문이었다. 하지만, 머뭇거리던 레이얼이 하는 말에 클로이는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제 입을 아주 세게 때려주고 싶었다.
“황가의 품위를 잊고 함부로, 함부로 다가서면 천박하다고 했다.”
“……길롯이?”
레이얼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행동해서인지……. 아직은 조금 버겁단다.”
“수고했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달리 할 말이 있나. 고개를 끄덕이던 클로이는 문득 웃음이 났다. 로이로 지낼 때 의외의 순간에 펄쩍거리며 얼굴을 붉히던 게 ‘세뇌’ 때문이었다니…….
“그런데도, 용기 내준 거였구나.”
“응?”
부하로만 대한 게 아니라서. 다가오려고 용기를 낸 거라서. 그렇게나 힘겨워했구나.
“전하, 내가 전에도 말했던 거 혹시 기억해? 북부는 틈날 때 즐겨둔다고.”
“아, 칭찬?”
“뭐 꼭 칭찬이라기보다는. 전부 다지. 왜냐하면 우리는 함부로 다음을 기약할 수가 없는 삶을 살고 있거든.”
“그런…….”
“심지어 ‘그’ 아르네 공작인 우리 아빠도 매년 겨울 토벌을 나가기 전, 유언장을 쓰고 나가셔.”
“맙소사.”
“후계자에게 남길 인장을 비롯한 사업 승계서까지. 전부 다. 난 그런 곳에서 자라서 늘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지.”
지금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말을 끊지 않는 태도에 마음속으로 감사를 전하며 클로이가 다시 입을 뗐다.
“그래서, 난 항상 전하에게 버거웠을지도 몰라.”
“…….”
“전하가 ‘다가서기 위해’ 이렇게 힘들어하듯. 나도 에둘러 전하거나 감추기 위해 많이 힘들지도 모르지.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주면-.”
“그러지 마.”
“……뭐?”
그러니까, 내가 이곳에 적응할 때까지. 훗날 황실에 들어왔을 때 서툴고, 다소 투박해도 그대가 나를 이해해줘. 기다려줘. 클로이의 가장 중요한 뒷말은 레이얼에게 뚝, 잘려버리고 말았다.
“그러지 마. 클로이 아르네. 나의 로이. 난 항상 너라서 좋았지.”
“뭐?”
이어지는 폭탄선언에 클로이는 정신이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북부 사냥제에 참가하는 것도 아닌데 레이얼은 왜 유언 같은 소리를 하는 거지?
“난, 널 좋아해 클로이. 있는 그대로.”
턱. 어깨를 단단히 붙든 레이얼이 고개를 내려 눈을 맞추고 선언하듯 다시 한 번 속삭였다.
“정말이지 좋아해. 그러니까 넌 변하지 마. 내가 바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