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 오랜만이야 레이디2021.04.16.
“어떤데?”
“무척. 잘.”
레이얼은 클로이의 말에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혼자서 아주.”
“혼자?”
“응. 황제가 아프다는 말이 있어.”
어째 연회에 얼굴만 대충 비춘다고 생각했더니 황제는 계절이 바뀌며 감기라도 든 모양이었다. 그가 아프다는 소식이 은근히 돌았다. 아픈 황제를 캐서린 황후가 정성으로 간호한다는 이야기는 덤이었다. 그런데,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 분께서 하루가 멀다하고 콰이펄른에서 온 전서구를 받는다고 한다.
“매일?”
“매일.”
“뭐 그렇게 보고할 게 많을까?”
“글쎄. 매번 보내오는 내용도 신통찮다던데……. 당연히 과시용이겠지.”
“그 내용을 어떻게 알아?”
“무려 거점을 두고 오가는 전서구이니, 말이 새는 건 당연하지.”
“……총애를 그렇게까지 과시하고 싶다고? 황제가 아픈 와중에도?”
클로이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말끝을 늘였다. 눈치가 기민하고, 제법 머리를 굴린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머저리 같은 짓을 한다고? 그럴 리가 있나?
“아…….”
한참을 눈만 끔뻑이던 클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총애에 기대 자란 권력이었다. 제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길롯이나 그가 부리는 위세는 황제의 한마디면 무너지고 말 모래성처럼 위태로운 것이었다. 길롯과 그들을 지지하는 일파는 계산이 확실했다. 돈과 권력을 등가교환 한 지극히 목적과 이유가 또렷한 사이. 그런데 길롯이 더 이상 황제를 등에 업을 수 없다면……? 황제가 건재함을, 그리고 그 총애가 여전함을 보여야 할 것이다.
“전서구를 동네 개처럼 부릴 수밖에 없겠어.”
“하다못해 계단참 난간 살 개수까지도 보고하더군.”
“……끔찍한데?”
“한 층에 모두 30개씩, 양쪽으로. 3층으로 증축 예정이라 도합 180개인데 이 정도면 충분하겠느냐고.”
“난간 살이 충분하냐고?”
“금색으로 도색하겠다고도 했지.”
“난간 살을?”
별것 아닌 게 너무 세세해서일까, 클로이는 괜히 기분이 찝찝했다.
“혹시, 그대도 일을 세세하게 지시하는 편인가?”
“나?”
이맛살을 찌푸리는 클로이에게 레이얼이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난간 살 개수를 정한다든지. 혹은 화원에 두를 관목과 정원의 개화 시기라던가.”
그간 그녀가 전서구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알 만해 클로이는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레이얼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뭔가 떠오를 것도 같았는데, 그만 모든 것이 연기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찝찝함까지도. 미인은 정말 할 일이 없나 봐. 뜨악한 기분으로 클로이는 손을 내저었다.
“……황제만큼은 아니나 대내외적인 업무가 있는 거로 아는데.”
에두른 말에 담긴 함의는 분명했다. 그러나 레이얼은 뻔히 알아들었음에도 재촉하는 듯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결국, 길어진 침묵에 진 건, 클로이쪽이었다. 말없이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게 뭐라고 괜히 멋쩍고 얼굴이 따가워 버틸 수가 없었다.
“난 그런 거 못 해.”
“으응.”
“설마 시킬 생각이라면, 꼼꼼한 보좌관을 붙여줘.”
“떠넘기게?”
“황후씩이나 되어서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아아……. 클로이는 순간 자신이 느꼈던 미묘한 위화감을 이해했다. 그래, 황후씩이나 되어 고작 별장 일에 매달리는 게 말이 되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으니 괴이쩍게 느껴지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상대는 길롯. 미모로 권력과 재력을 쌓는 사람이니 상식적으로 생각해서야 이해될 리 없다. 적어도 클로이 아르네, 자신은 긍지와 책임을 아는 사람이라, 절대 캐서린 황후와 같을 수가 없다.
“그래, 난 미인이 아니니까.”
생각 끝에 무심코 한 말이었다. 그런데 내내 턱을 괴고 있던 레이얼이 표정을 바짝 굳혔다.
“내 피앙세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응?”
“충분히 미인이라는 의미야. 공작과 소공작을 보고 자라 심미안이 남다른 건 알겠으나, 클로이. 그대는 넘치도록 미인이야.”
와……. 기습이다. 클로이는 생각지 못한 말에 그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종종 클로이의 정신을 쏙 빼놓는 미남이 정색하고 건네는 칭찬이라니. 당연히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라…….”
“미인이야.”
간신히 정신을 수습해 입을 떼기 바쁘게 엄숙하게 선언하는 듯한 말에 희미하게 돌아온 정신이 단번에 기화해버렸다. 결국 클로이는 공작저로 돌아올 때까지 더는 캐서린 황후에 대해서 입에 올릴 수도 없었다. * * * 미인이라니. 그런 게 미인일 리 없지. 레이얼은 얼굴이 달아올라 말문이 막힌 클로이를 떠올리며 희게 웃었다. 그가 설마 클로이가 하려던 말을 정말 몰랐을까. 하지만, 그는 절대 캐서린 황후 따위에게 그런 상냥한 말을 해주고 싶지 않았다. 저건, 뱀이었다. 독이 잔뜩 올라 언제든 그를 물어뜯고, 아르네를 무너뜨릴 궁리를 하는 색이 예쁜 독사. 커다랗게 벌어진 아가리에 황제를 가득 물고 어떻게든 황좌를 집어삼키려 애쓰는 모습이 딱하고도 역겹다. 그런데, 그런 것에 미인 소리가 가당키나 한가. 무해한 듯 호감을 바라 피워내는 향은 달긴 하나 코가 찡하게 울릴 만큼 독하다.
“…….”
탁, 탁. 레이얼은 검지 손가락을 탁자를 연신 두드렸다. 저런 게, 지금 클로이를 노리고 있다. 내쉬의 선전포고는 단독 선언이 아니다. 캐서린 황후가 어떤 사람인데 제 아들을 그냥 두겠나. 저건, 내쉬의 뜻이며 캐서린 황후의 의지이기도 하다. 탁. 탁자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거둔 레이얼이 이내 펜을 들고 뭔가를 써서 새에 매달아 날렸다. 어둠을 가른 새가 향하는 곳은 이베트 후작가였다. ‘레이디 아르네’를 갈취하겠다는 선언은 단순하게 아니었다. 아르네 공녀가 약혼한 것은 황태자. 지금 내쉬는 황권을 두고 겨루겠다고 선포한 것과 다름없다. 조금 더 시간이 주어지면 좋을 테지만, 상황이 급변했다. 반쯤 전면전이 될 테다.
“빨리 가거라.”
까만 밤하늘을 바라보는 레이얼의 눈이 차게 빛났다.
쿨럭거리는 기침 소리와 열에 들뜬 신음. 침대에 누워 괴로운 숨소리를 터트리는 황제의 안색이 새카맸다. 그를 진료한 수석 황의는 계절이 넘어가며 병이 난 거라고 했으나, 그냥 감기라고 보기엔 기침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캐서린 황후는 황의가 일러준 대로 미적지근하게 온도를 맞춘 물수건으로 연신 황제의 손발을 닦아주었다. 가뜩이나 체구가 여리여리하고 작았던 이었다. 평소에도 가냘팠건만, 밤을 새우고 난 황후는 금방이라도 픽 쓰러질 것같이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시녀들이 달려들어 떼놓고 어르고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황후는 고집스럽게 황제의 수발을 자처했다. 황제가 쓰러진 후 황후는 거의 자지도 먹지도 않았다.
“아…….”
뜨끈하게 달아오른 물수건 치우고 새것을 올려주던 황후가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그만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황후의 뒤에서 내내 애태우던 시녀들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폐하!”
“황의를 부르세요! 어서요!”
시녀들의 품 안에서 늘어진 황후는 기어이 눈을 뜨지 못했다. 두 분 폐하가 쓰러졌다는 비극적인 소식이 삽시간에 번져나갔다. 아르네와 시오도르에게 덮친 연이은 비보에 사람들은 동요했다. 다들 말은 하지 않으나, 모이기만 하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두 분 폐하께서도 몸져누우셨다지요?”
“계절이 넘어가는 중이니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전 좀 기분이 이상합니다. 아르네와 시오도르. 이 제국을 세운 두 가문이 동시에 이러니…….”
“큰일 날 소리!”
입을 틀어막을 듯 쉬쉬거리긴 하나, 듣는 자도 말하는 자도 이미 얼굴에 근심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제국을 세운 두 가문이었다. 겁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소리 내 떠들다니 도통 생각 같은 걸 할 머리가 없나? 머저리 같은 것들.
“……개가 맞다니까.”
창틀에 걸터앉아 책장을 넘기던 내쉬가 혀를 찼다.
“차를 더 드릴까요?”
“네 생각은 어때?”
“그…… 제가 무얼 알겠습니까.”
“로열 크라운도 손쉽게 우려내면서, 이게 어렵나?”
내쉬는 몸을 사리는 시종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하긴, 영리하지 못하면 눈치라도 살펴야겠지. 안 그래?”
“황송합니다.”
“그래서, 새는?”
굽실거리는 시종의 모습에 흥미가 떨어진 건지, 내쉬는 무료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황제에 이어 황후까지 쓰러진 터가 아닌가. 국정 업무는 레이얼이 맡아 꾸린다고는 하나, 별장을 진행하기는 모양새가 이상했다. 결국 콰이펄른의 별장은 내쉬에게 떨어졌다. 길롯 백작은 황후에게 하듯 매일같이 새를 날렸다. -난간 살은 모두 설치했습니다, 금박 작업은 아직입니다. 일전에 보내주신 대금은 전부 소진되었으니, 추가금을 부탁드립니다.
“……이건 개도 못 되겠어.”
길롯 백작이 써서 보낸 짧은 서신을 본 내쉬는 이내 한숨을 쉬었다. 개도 제 주인 꼴을 봐가면서 설치는데 길롯 백작은 제 누이가 쓰러졌다는 소식에도 여전히 돈타령밖에 할 줄 몰랐다.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원. 하긴, 그러니 여태 그러고 산 거겠지만. 내쉬는 혐오스러워 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별장 자금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황후궁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지어주신다고 한 게 아닌가?”
“그렇긴 한데, 규모가 자꾸 커져서 원래 견적의 세 배가 되었다고 합니다.”
“저런…….”
이럴 때면 정말 제 모친이 굉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하면 그 큰돈을 세배나 더 쥐어 짜낼 수가 있을까. 내쉬는 시종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 고작 그만한 돈이 없을 리가 없잖나.”
“예. 그건 그런데, 폐하께서 추가 승인을 내주시기 전에 쓰러지셔서요.”
“……그래?”
황제가 쓰러진 건 최근이다. 그건, 별장 견적이 최근에 갑자기 조정되었다는 건데……. 정말 징그럽다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황제 성격에 별장을 짓기 전 견적보다 넉넉하게 예산을 집행해주었을 텐데, 길롯 백작이 달려간 지 며칠 새 정확히 세배로 불려놨다.
“아아……. 금박이랬지.”
커프스 단추로 부족해 셔츠 단추에도 다이아몬드를 달던 머저리 아닌가. 까마귀도 아닌데 어쩜 그렇게 번쩍거리는 것에 집착하는지. 내쉬는 절대 콰이펄른 쪽으로는 걸음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황후궁 시종장을 불렀다. 그에게 서류를 건네받아, 대금 지급서에 사인을 해주는 것으로 오늘의 ‘대리’ 일정은 끝이 났다. 뉘엿뉘엿 지는 해가 붉게 물들여 놓은 하늘을 바라보던 그가 불현듯 날짜를 확인했다.
“오늘이 며칠이지?”
“27일입니다.”
시종의 대답에 내쉬의 표정이 일순 부드럽게 풀렸다. 옅은 주름이 새겨진 미간이 녹진하게 누그러지며 심술 맞게 비틀렸던 입매가 예쁜 호선을 그렸다.
“오늘이구나.”
반짝, 하늘을 바라보던 내쉬의 녹안이 기대감에 예쁘게 빛이 났다.
“약속한 날이 되어 왔소. 오랑그리 후작.”
“어서오게.”
그날 밤 예고장을 받은 오랑그리 후작저에서 ‘레이디’를 맞은 건 후작이 아니었다.
“오랜만이야. 레이디.”
“내쉬 황자?”
레이디의 목소리가 경악에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