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 그럼 그렇지2021.04.02.
분명히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클로이는 연회 두 번째 날 내쉬가 내보였던 눈빛을 똑똑히 보았다. 진득하고도 집요한 시선. 그런데 오늘 만난 내쉬는 산뜻하기 그지없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의례적이고도 정중한 인사를 남기고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오히려 그런 내쉬가 신경쓰여 클로이가 내내 힐끔거린 참이었다.
“뭘까…….”
나, 쉽게 질리는 편인가. 열없는 생각도 잠깐, 클로이는 곁을 차지한 레이얼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걱정이 된다며 곁을 도통 비우지 않는 남자는 이 밤 당연히 저택까지 에스코트를 자처한 터다. 일이 생긴다면 로지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 둘로 늘기야 하겠으나, 클로이는 그를 말릴 수 없었다.
‘제발’
클로이는 ‘제발’이라고 속삭이던 레이얼의 표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를 위한 거절이 죄악처럼 느껴질 만큼 간절하던 모습. 겨우 기억을 떠올리는 정도로 가슴이 아려온다. 심장이 비대하게 부풀어 버리면 이럴까? 밭은 숨이 터지고, 부푼 심장이 보내는 심박이 꽝꽝 가슴을 때리는 느낌.
“…….”
진정해라. 클로이는 말없이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그때였다. 마차 맞은편에 앉아 있던 레이얼이 감은 눈을 번쩍 뜨더니 곧장 자리를 넘어왔다. 조금 전까지 자는 듯 눈을 감고 있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괜찮나?”
클로이는 제게 내민 레이얼의 팔을 바라보았다. 곧게 뻗은 두 팔은…….
“안기렴. 이전에 비스듬히 세워 안아주었을 때가 가장 편해 보였어.”
단단하고도 단정한 얼굴엔 홍조 하나 없다. 요는 그녀를 환자로만 본다는 소리였다. 맙소사. 레이얼의 이 담백한 호의에 수치심이 든다. 그리고 분노도. 제 아무리 미인이라지만, 내가 무슨 곰인형도 아니고 진짜 너무 한다. 티없이 입술을 씰룩여 투덜거린 클로이가 레이얼의 양팔을 붙잡고 밀어내려던 순간이었다. 콰직! 심상찮은 소리와 함께 마차 문을 뚫고 화살이 박히는 것과 동시에 클로이는 레이얼의 품에 단단히 갇혔다.
“습격입니다!”
마차 밖에서 로지의 외침이 울렸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조용히 넘어가나 했다.
“아…… 잘 계시려나.”
테라스에 기댄 내쉬가 천천히 고개를 젖혀 하늘 바라보며 슬쩍 웃었다. 풍성한 속눈썹 아래 드러난 채도 높은 녹안이 달을 품고 예쁘게 반짝였다.
“꽉 잡아야 할 텐데.”
불어오는 바람에 천천히 눈을 감은 내쉬는 찬기를 즐기기라도 하듯 내내 희미하게 웃는 표정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뺨을 할퀴는 것 같은 시린바람에 그의 뺨이 창백하게 질렸을 무렵.
“두 번 다시 못 잡을지도 모르니까. 그 손 꽉, 잘 잡아보세요.”
노래하듯 흥얼거리며 중얼거린 내쉬가 몸을 바로 했다. 조금 전까지 희미하게 물고 있던 미소가 싹 사라진 그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더없이 비정해 보였다. 침실로 들어선 내쉬는 설렁줄을 잡아당겨 시종을 불러들였다.
“차를 가져오렴.”
“예. 전하.”
“아……. 오늘은 향이 없는 것으로.”
“예.”
시종이 자리를 뜨고나자 내쉬는 읽던 책을 찾아 들었다. 몸을 늘어뜨려 한껏 느긋한 자세를 취한 내쉬가 손을 들어 이미 수백 번쯤 읽은 문장을 더듬었다. 문장이 낱글자로 조각나 읽어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내쉬는 마치 무척 재미난 것을 읽기라도 하는 듯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같은 자리를 열 번쯤 읽었을 무렵, 시종이 잘 우려낸 차를 조심스레 그의 앞에 놓아주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차가 있는 줄도 모를 만큼 정말이지 아무런 향도 없다. 평소 향과 맛을 꽤 엄격하게 따지던 내쉬라면 질색하고 입에도 대지 않을 것이나 그는 몹시 달게 마셨다.
“역시, 이상해. 이런 걸 왜 마시는 거지.”
빈정거리는 말과 달리 내쉬는 연거푸 세잔이나 들이켰다. 입맛엔 맞진 않으나 오늘 그는 아주 넉넉히 마실 참이었다. 어쩌면, 레이얼은 이제 두 번 다시 못 마실지도 모르니까. 꿀꺽. 뜨끈한 찻물을 삼키는 붉은 입술이 낭창하게 늘어지며 몹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려냈다.
“하아…….”
마시고 나니 흔적도 없다. * * *
“헉, 헉.”
숨소리를 터트리는 것같이 바보짓은 없는데, 코르셋 때문에 도통 조절이 되지 않았다. 클로이와 레이얼은 우거진 숲길을 마구 달렸다. 로지와 마부 체드릭의 응전에 안심하던 것도 잠깐이었다. 그들이 아무리 실력자라고는 하나,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모두 쳐내기는 무리였다. 마차 안에 있다가는 고슴도치가 될 판이었다.
“먼저 갈게!”
마차에서 뛰어내린 클로이는 날아드는 화살을 능숙하게 쳐내는 로지에게 크게 외쳐주었다.
“네 주인은 널 버렸군?”
“내 제자는 똑똑하지.”
“무슨 소리야.”
저 멍청이. 난 로지를 버린 게 아니라, 약점을 없애준 거란다.
“넌 이제 큰일 났다는 소리지.”
아니나 다를까, 대번에 스산해진 로지의 말투에 클로이는 웃음을 참으며 힘껏 뛰었다. 레이얼도 눈치껏 따라붙었다. 이런 상황에서 되지도 않는 의기를 부리기라도 했다면 귀찮았을 텐데 다행이었다. 습격을 당한 곳은 다행히 공작저와 아주 멀지 않은 곳이라 클로이에게 유리했다. 클로이는 레이얼을 공작저 뒤편, 야트막한 산으로 끌었다. 인원이 저게 전부일 리가 없다. 무려 아르네와 시오도르를 습격하는 건데, 필사의 명령을 받았을 것이다. 이미 사방으로 깔려있을 테니 엄폐물 없는 대로보다는 숲길이 안전했다.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하지만 코르셋이 복병이었다. 이렇게 헐떡이는데도 숨이 모자라 수시로 시야가 핑, 돈다. 이래선 안 된다. 잠시 상황을 살피던 클로이는 근처 바위 그늘로 레이얼을 이끌었다.
“전하, 이대로는 안 되겠어.”
“두고는 안 간다.”
“버리고 가라니 그럴 리 없잖아. ……난 내 거 손에서 안 놓는다고 한 거 잊었어?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마.”
생각지 못한 소리에 레이얼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내 거?”
“내 거.”
클로이의 대답에 레이얼의 목덜미가 어두운 가운데서도 또렷이 보일만큼 확, 붉어졌다. 그 모습에 클로이가 아차 싶었다. 피앙세라고 했어야 했는데. 내 거는 이제 생각하니 어감이 좀 이상하다. 하지만, 자책은 잠깐이었다. 그런 자잘한 것에 일일이 매이기엔 상황이 급박하다. 레이얼에게서 눈을 돌린 클로이는 달리느라 엉망이 된 머리칼을 한쪽으로 쓸어 모았다.
“옷 좀 벗겨줘.”
“뭐?”
“숨이 차서 코르셋을 느슨하게 풀어야겠어.”
등 뒤로 촘촘하게 박힌 진주 단추는 척 봐도 수십 개였다.
“뜯어.”
아직 당혹감이 가시지 않은 듯, 얼굴은 붉은 그대로였으나 레이얼은 클로이의 말에 두말없이 드레스를 시원하게 찢어버렸다. 투두둑. 천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진주가 튀어 나가고, 클로이를 졸라맨 코르셋이 드러났다. 단단히 매듭지어진 것을 푸는 것과 동시에 공기를 가르는 새된 소리가 울렸다. 핑! 화살이었다. 레이얼은 주저 없이 클로이를 끌어안고 가볍게 굴렀다. 손에 닿는 맨살이 끔찍하게 보드라웠으나, 내색할 순 없었다.
“가자!”
찢긴 드레스를 그대로 벗어 던진 클로이가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그를 재촉했다. 속 드레스와 헐겁게 늘어진 코르셋만을 걸치고서도 클로이는 당당했다. 손에 닿은 감촉에 예민하게 굴던 그가 부끄러워질 만큼. 잠깐 사이, 구두 굽을 바위에 대고 부러뜨린 클로이는 능숙하게 산을 달리기 시작했다. 상처를 입고도 저만한 체력을 가지고 있다니! 레이얼은 거침없이 산을 뛰어오르는 클로이의 모습에 작게 감탄했다. 코르셋을 푼 클로이는 조금 전과는 달리 고요하고 민첩하게 움직였다.
“너무 빨라?”
잠깐, 길을 가늠하며 묻는 말에 레이얼은 웃고 말았다. 저런 말은 그의 평생에 처음이었다. 배려라니. 심지어 ‘시오도르’인 그에게 체력을? 그리고 조금 유쾌했다. 언제나 보통 사람 같지 않은 체력과 체격 덕에 그는 힘들어도 힘들다 소리 한번 할 수 없이 꾹꾹 참아야만 했다. 그런데 난생처음 듣는 배려는 뭐랄까 참 간지럽고 말랑말랑한 느낌이었다.
“조금만 참아. 이제 다 왔어.”
“잠깐. 코트를 벗어줄게.”
레이얼은 금방 다시 뛰어나가려는 클로이를 제지했다. 아무리 급하다지만, 하얀 어깨를 죄다 드러낸 차림이 영 거슬렸다.
“됐어.”
“입어.”
“몸에 붙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치적거려. 그리고 힘들어.”
가볍게 뛰길래 역시 ‘북부의 아르네’라고 너무 태연히 생각했던 걸까. 힘들다는 말을 하는 클로이는 아까보다 덜 했을 뿐이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럼, 공작저에 들어서면 입어.”
힘들다는 그녀에게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레이얼은 클로이의 하얀 어깨를 사람들의 시선이 타게 두고 싶지 않았다. 말라서 뼈마디가 도드라진 어깨는 연약하지만 아름답다. 가녀리지만 단단해 보인다. 그래서, 자꾸만 시선이 매이는 이 어여쁜 것을 남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감추고 싶다. 이런 끔찍한 소유욕이 있는 줄 그도 난생처음 알게 되었다.
“……그래. 나도 뭐, 벗고 다니는 취미는 없어서.”
잠깐, 그를 바라보던 클로이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가자!”
그들은 다시 달렸다. 달빛 아래, 산길을 달려가는 클로이는 마치 하얀 사슴 같았다. 재빠르고 아름다우며, 우아하다. 레이얼은 제 앞을 스쳐가는 클로이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말처럼 오래지 않아 공작저 지붕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목책부터는 공작저야.”
손을 뻗어, 무언가를 가리키는 클로이의 모습에 레이얼은 문득 숨을 크게 들이켰다. 쿵쿵. 내내 달릴 때도 괜찮던 심박이 조금 전부터 난리였다. 금방이라도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가 뻐근한 명치에 손을 올리려던 순간 클로이가 그를 덮치듯 몸을 날렸다. 뻑!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틀이 박힌 단검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르르 떨렸다.
“큰일 날뻔했어.”
클로이의 말 레이얼이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큰일이야.”
“그러게. 가자.”
신경이 온통 추격자에게 쏠린 클로이는 ‘내쉬가 이해됐어’라는 레이얼의 중얼거림을 놓치고 말았다.
“……어머나.”
공작저에 돌아온 클로이와 레이얼을 반긴 건 로지였다. 심지어 그녀는 너무 멀쩡했다. 산길을 달리느라 드레스도 벗어 던지고 구두도 부러뜨리고 구르기까지 한 터라 머리가 산발이 된 클로이와 달리. 어째 허탈한 기분이 들며 몸이 축 가라앉았다. 클로이는 저만큼이나 지쳤을 레이얼을 잡아끌었다.
“들어오세요. 전하.”
“시간이 너무 늦었어.”
탁. 발에 힘을 줘 버티는 레이얼의 모습에 클로이의 입매가 못되게 비틀렸다. 클로이는 한걸음에 바짝 다가와 그에게만 들리게 입을 달싹여 속삭였다.
“난 벗은 몸도 보여줬는데 전하는 이제 와 내외하는 거야?”
“뭐? 버, 벗은 몸이라니!”
낮게 부르짖는 레이얼의 얼굴은 온통 새빨갰다. 하……. 클로이는 그 모습에 작게 콧소리를 냈다.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로 끼치는 홍조는 봐도 봐도 절경이다.
“아니라고 우기면, 코트 벗어 확인시켜줄 수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