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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 안달난다 (60/121)

060. 안달난다2021.03.30.

“밤 한 주먹에 장정 하나라니. 뭐 이렇게 기쁜 셈법이 다 있지?”

말레사는 ‘이주민’을 싣고 온 마차를 보며 한껏 미소지었다. 날이 평년보다 빨리 차가워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괴수의 동면 역시 빨라질 것이다. 내리는 눈이 얼기 전 토벌대가 꾸려져야 하건만, 공작가를 덮친 비보에 절로 시름이 깊어지던 차 일꾼이라니! 심지어 수도에서 쉬지 않고 도착하는 장정은 하나 같이 그 기량이 쓸만하지 않았나. 이번엔 어느 초소로 보낼까. 즐거운 상상을 하던 말레사는 마차에서 꺼내지는 사람들을 보고 작게 신음했다.

“어머나…….”

이전과 달리 상태가 하나같이 엉망이었다. 의식이 없기도 했으나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만 해도 보통이 아니라 한동안 잘 보살펴야 할 이들이 무려 수십이었다.

“이번엔 좀 성가신 분들이 왔네.”

들떴던 마음이 푸시식 식었다. 그러나 뭐 어떠랴.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아문다. 어차피 이들은 이 북부에서 살아야 할 테니, 오래지 않아 제 한몫을 톡톡히 해낼 것이다. 그렇게 서운함을 달래며 서류를 넘겨 한 명 한 명 대조하던 말레사의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문구가 있었다.

“황실 근위대?”

미소를 싹 지운 말레사의 얼굴은 얼음장보다 더 싸늘했다.

“이거, 황실 근위대라고?”

“네. 말레사 님.”

마차를 몰고 온 이가 공손히 대답했다. 민란지로 차출되었던 공작을 황실 근위대가 해쳤다는 것을 모르는 아르네 가신은 없다. 그런 것을 마주했으니 말레사의 반응은 오히려 온건하다 할만했다.

“받으라고? 이걸?”

“네. 에반 님이 특별히 당부하셨습니다.”

“하…….”

이따위 것을 받아야만 하다니. 에반이 특별히 당부했다는 말에 들리게 투덜거린 말레사가 거친 손놀림으로 서류에 인계받았다는 사인을 해주었다.

“그나저나, 이것들은 왜 이제 온 거지? 근위대라면 제일 처음 와야 하지 않았나?”

“아, 네. 상태가 좋지 않아서 좀 추슬러야 했거든요.”

“저런. 그냥 죽어도 좋았을걸.”

“아뇨, 아뇨. 안 돼요. 에반 님이 한 놈도 죽지 못하게 얼마나 애쓰셨는데요.”

“…….”

“반드시 북부에 평생 봉사하게 해야 한다고 정말 눈에 불을 켜고 돌봐주셨어요.”

“에반 님의 생각이 그러시다면야.”

점잖은 말투와 달리 말레사의 눈빛은 한껏 스산해져 있었다.

“이자가 블레이엄 헤논이라고?”

답이 필요 없는 질문을 한 말레사가 눈을 감고 쓰러져있는 창백한 안색의 기사 앞에 섰다. 안색은 안 좋았으나 상처 수습이 깔끔해 조금만 지나면 멀쩡해지리라. 어서 눈을 떠. 평생에 걸쳐 네 죄를 갚아. 말레사는 몸을 돌려 나가며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불렀다.

“전부 경계초소 의료소에 집어넣어! 한 달 후에 초소 배치를 할 테니 ‘성심성의껏’ 보살피도록 해!”

“네, 말레사 님.”

말레사의 부름에 달려온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축 늘어진 근위병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눈빛은 하나같이 살벌했으나, 상처를 입은 근위 기사를 옮기는 이들의 손만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성심성의껏’ 보살펴 반드시 초소병으로 만들고 말리라. 꼴같잖은 권력 싸움을 하는 수도 녀석에게 괴수와 함께하는 북부의 삶을 하루빨리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물씬 피어오른다.

“여기. 밤. 오십 주먹일세.”

“예, 밤 확인했습니다.”

“좀 더?”

“아니요.”

“왜? 아가씨께서 밤을 얼마나 즐기시는데.”

“됐습니다. 아직 올 사람이 많은 듯해서요.”

“……기뻐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한동안 ‘이주민’이 계속 올 것 같거든요.”

“저런…….”

짧은 인사 후 아르네 공작가의 마차가 바쁘게 영지를 떠나 수도를 향했다.

“오늘은 이걸.”

클로이는 치장이 끝나자 셀리아에게 간밤 레이얼에게 받은 귀걸이를 내밀었다.

“어머나……? 처음 보는 거네요?”

거치적거린다고 머리를 늘어뜨리는 것도 싫어하는 아가씨였다. 그런 아가씨의 장신구란 간신히 다섯 손가락을 채우는 정도라, 몰라보는 게 더 이상했다. 클로이는 셀리아의 말에 짧게 대꾸했다.

“선물.”

“선물요?”

“응. 레이얼 전하께서.”

“아, 그럼 끼셔야……전하께서 주셨다고요?”

“응? 응. 왜?”

귀걸이를 확인한 셀리아의 표정이 굉장해졌다. 잘하면 눈이 튀어나올 수도 있을 만큼 크게 뜨이고, 입도 벌어졌다.

“……왜 그래. 난 뭐 평생 아빠나 오빠가 사주는 거 아니면 어디 가서 선물 한번 못 받을 것 같았어?”

“아가씨, 이거 모르세요?”

“어어?”

모른다고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이 격렬한 반응이었다. 클로이는 두 손으로 귀걸이를 받쳐든 셀리아를 보며 엉덩이 걸음으로 슬쩍 물러섰다. 그래봤자 의자 위지만 눈꼽 만큼 떨어지니 좀 낫다. 셀리아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어떻게 이걸 몰라보실 수가 있으세요?”

대체 그게 뭔데. 클로이는 질린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스텔리아잖아요! 창백한 별!”

“…….”

그게 뭔데?

“블루 다이아몬드요.”

도통 알아듣지 못하는 제 주인을 위해 셀리아는 말을 쉽게 풀어주었다.

“……엄청 귀한 거예요.”

“아……그렇구나.”

“아아…….”

시큰둥한 반응에 셀리아는 클로이가 어떤 사람인지를 떠올렸다. 제국내 가장 고귀한 미혼 여성. 단 하나뿐인 공녀. 시오도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르네의 고명 따님. 그러나 북부의 제1 사냥꾼으로 불리는 것을 더 기뻐하는 사람. 애초에 온갖 보석이니 드레스이니 하는 것들이 단출한 것도, 그녀가 사냥에 방해가 된다며 꺼려서가 아니었나. 그런 아가씨에게 스텔리아의 가치를 다른 영애들게 말하듯 고해봐야 알아줄 리 없다. 북부의 제1 사냥꾼이 알아듣게 말해주어야 알아주시겠지.

“……스텔리아면 북부 경계를 따라 방책을 두 겹 정도 두를 수 있을 거예요.”

“뭐어?! 이게 그렇게 귀한 거라고?”

이것 봐. 셀리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아니 이런 걸 막 준다고?”

뒤늦게 경악하는 제 주인을 끌어다 똑바로 앉힌 뒤 셀리아가 하얀 귓불에 귀걸이를 물려주었다. 브릴리언트 컷으로 마감된 블루다이아몬드는 정말이지 클로이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가늘고 곧게 뻗은 하얀 목덜미에 흩뿌려지는 창백한 빛무리가 정말이지 너무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셀리아가 느슨한 클로이의 머리칼로 손을 뻗었다.

“역시, 머리는 다시 하는 게 좋겠어요.”

스텔리아는 뽐낼만한 거니까. 셀리아는 느슨하던 클로이의 머리칼을 바짝 잡아당겨 야무지게 틀어 올려버렸다. 훤하게 드러난 가는 목선과 귓불에서 달랑거리는 블루다이아몬드가 미치게 잘 어울린다. 좋다 좋아. 셀리아는 오늘 연회의 주인공은 하늘이 두 쪽 나도 클로이가 될 거라고 확신했다.

“다 됐어요. 아가씨.”

그녀의 말에 몸을 일으키는 클로이는 정말이지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치 근사했다. * * * 이베트 후작의 안목은 훌륭했다. 레이얼은 제가 건넨 귀걸이를 끼고 걸어오는 클로이를 보며 신음하지 않으려 애썼다. 철저하게 장식을 배제한 클로이가 유일하게 패용한 장신구는 간밤 그가 건넨 귀걸이가 전부였다. 길게 늘어져 걸을 때마다 가볍게 흔들리는 귀걸이에서 뿌리는 빛무리가 목덜미를 비출 때마다 그의 이성이 가늘어지다 못해 끊어질 것 같다.

“가실까요?”

그를 향해 내민 희고 곧은 손. 레이얼은 뻔히 제게 내민 것임을 알면서도 낚아채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역시 전하는 뭐든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

클로이가 건네는 칭찬이 인사말 같은 것임을 안다. 그런데도 쿵, 귓가를 요란하게 울리며 가슴이 무겁게 뛴다. 레이얼은 주먹을 가볍게 말아 명치를 툭툭 두드리고 나서야 간신히 입을 뗄 수 있었다.

“레이디 아르네께서도 오늘 아름다우십니다.”

“오늘만?”

뒤따르던 시녀가 마부에게 다가가 뭔가를 이야기하는 사이, 그새 ‘로이’의 얼굴을 한 클로이가 몸을 바짝 붙이며 속삭였다. 클로이의 마른 어깨가 닿은 가슴께로 온 신경이 쏠린 듯 화끈하고 간질거린다.

“언제나.”

풋내기처럼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는데, 과연 잘 됐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말에 ‘으악! 수도 남자!’라며 활짝 웃는 클로이를 보고 있자니 생각보다 멀끔했던 모양이다. 레이얼은 잡은 손에 힘을 더해 클로이를 바짝 끌어당겨 어깨를 감싸 안았다. 눈이 동그래진 클로이를 향해, 레이얼이 짧게 덧붙였다.

“예뻐서 누가 채갈까 봐.”

“와……. 전하 내가 졌어.”

“아무렴.”

“진짜야. 난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말은 못 할 것 같아.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말이 술술 나오는 거지?”

“진담이니까. 내쉬가 노리고 것 역시 사실이지 않나.”

“꺄아. 무서워요.”

하나도 겁먹지 않은 표정으로 클로이가 장난스레 몸을 붙여온다. 움찔. 이번에도 여지없이 가슴이 울린다. 연회장에서 모든 이의 시선을 받은 건 당연하게도 클로이였다. 사람들은 아르네 공녀가 끼고 온 귀걸이를 보고 설탕에 들끓는 개미처럼 몰려들었다.

“레이디 아르네, 역시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빌려 쓴 안목입니다.”

“네?”

“레이얼 전하께서 주신 선물이거든요.”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기 바쁘게 레이얼이 빙긋 웃으며 그들 뒤 어딘가로 시선을 던졌다.

“아아, 나도 그럼 빌려 쓴 거라 할까? 어떤가 후작?”

“과찬이십니다.”

갑작스러운 이름에 사람들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 이베트 후작이 겸양하며 그들 사이로 나타났다. 웅성이던 이들의 입이 모두 꽉 다물리고 삽시간에 기묘한 정적이 찾아왔다. 줄리아나 황후의 일 이후로 단번에 황태자에게서 등을 돌린 후작이? 너무 뜻밖이라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한 가운데, 이베트 후작이 가벼운 묵례와 함께 아르네 공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생각보다 두 분께 잘 어울리시는군요.”

“고맙습니다.”

아르네 공녀의 인사를 듣고 나서야 한발 늦게 사람들은 경악했다. ……두 분? 놀란 눈동자가 허겁지겁 황태자를 훑자, 그제야 그의 커프스단추가 눈에 띄었다. 이베트 후작이 레이얼 황태자와 아르네 공녀에게 선물로 건넨 거라고? 스텔리아를? 짧은 순간 수없이 많은 눈빛이 허공에서 얽히고 풀어졌다. 궁금한 건 많았으나, 분명한 건 하나다. 이베트 후작이 레이얼 황태자 진영에 합류했다! 파란이 화마처럼 연회장을 휩쓸던 그때.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황제 내외의 입장에 일순 분위기가 흐트러지긴 했으나, 한번 스며든 술렁임은 절대 가라앉지 않았다.

“……무슨 재미난 일이 있었나 보네요.”

그 뒤를 따라 들어온 내쉬 황자가 이내 세 사람 사이로 나타났다. 어딘지 미묘한 공기. 황후와 헤어져 클로이에게 다가서던 내쉬는 평소완 다른 분위기에 입매를 비틀었다. 길롯 백작이 아니더라도 수선부리며 달라붙는 날파리가 있는데, 오늘은 깔끔하다. 하루 아침 만에 정신을 차린 게 아닐 테니, 분명 더 먹음직스러운 것을 발견했다는 의미이리라.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탐색하듯 느릿하게 구른 내쉬의 시선이, 레이얼과 아르네 공녀에 닿으며 사납게 일렁였다. 매번 그에게 달라붙던 날파리 떼가 그들 곁에 있어서가 아니었다.

“또…….”

당연하게 얽혀있는 두 손이 문제였다. 그 모습을 보자 ‘이유’를 찾던 것도 잊고, 눈앞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당장에라도 손에 잡히는 걸 죄다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이 치민다. 아니, 저 가는 손목을 잡아채 제 곁에 딱 붙여놓고 싶다.

“하…….”

무겁게 차오른 숨을 터트리던 내쉬가 문득 들끓는 사나운 감정을 두고 빙긋 미소지었다. 아아……. 이게 그건가. 안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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