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 고요하게 이는 균열2021.03.26.
“전서구를 가져가라고요?”
길롯 백작은 터무니없는 요구에 입을 떡 벌렸다. 제 누이는 정말 미친 모양이었다. 아무리 황제의 총애가 나날이 깊어진다고는 하나, 고작 별장공사 보고를 받자고 전서구를 띄운다고?
“저, 황후 폐하. 전서구는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어째서죠?”
“콰이펄른은 가는 데만 닷새가 걸리는 곳입니다. 전서구가 날아올 만한 거리가 아닙니다.”
“어머나…….”
길롯의 말에 캐서린이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놀란 듯했으나, 기실 그것이 못마땅함임을 모를 리 있나. 길롯은 자신도 모르게 캐서린 황후 옆에 앉은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힐끔. 오늘도 황제는 캐서린 황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얼간이 같은 놈. 길롯은 황제를 두려워하면서도 업신여겼다. 패트릭 시오도르는 역대 시오도르중 성격이 가장 강퍅했고, 가장 무능했다. 그의 능력과 선량함은 줄리아나 황후의 죽음과 함께 휘발해버린 건지, 그는 도통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무능하고 무능한 놈. 황제랍시고 할 줄 아는 건 되지도 않게 호령하는 것뿐인 머저리.
“되고 안 되고는 그대가 결정할 일이 아니지. 길롯 백작.”
이것 보라지. 예상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그를 힐난하는, 황제를 향해 길롯은 허리를 깊게 숙였다.
“하지만, 폐하. 그 어떤 전서구도 5일 거리를 날지는 못합니다.”
“멍청하긴.”
으득. 진짜 머저리가 누군데! 길롯은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가뜩이나 예정에도 없던 콰이펄른을 오가느라 요즘 그는 몸이 남아 남지 않고 있었다. 말이 좋아 닷새 거리지, 그는 황제의 눈치를 살피느라 거의 하루 반만에 주파하는 실정이 아니던가. 그 거리를 달려오느라 아직도 온몸이 욱신거리는데, 뭐?? 그까짓 별장에 하다하다 이젠 전서구도 날리라고?
“중간쯤 적당한 영지 주인에게서 전서구를 받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하여간.”
말처럼, 새도 바꿔 날리면 된다고 황제는 쉽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럼…… 보안은? 기가 찼으나, 황제의 말에 반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길롯 백작은 피가 쏠려 벌게진 얼굴을 한 그대로 ‘현명하신 생각입니다.’라고 말을 주워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 도착하는 대로 새를 보내주세요.”
“……네, 황후 폐하.”
길롯은 어여쁜 제 누이를 향해서 다시 한번 허리를 깊게 조아렸다.
그날 오후 키릭슨이 다소 상기된 얼굴로 레이얼을 찾았다.
“전하. 잠깐 시간을 내어주십시오.”
“재경부에서 또, 달라붙기라도 했나?”
“그런 깜찍한 일이 아닙니다.”
키릭슨 손에 들고 온 상자를 그대로 열었다. 안 그래도 웬 상자인가 하고 있었는데…….
“보석?”
“예, 전하 이베트 가에서 전하께 보내온 것입니다.”
“굳이, 그걸 네게 보내 들고 오게 했다고?”
“전 전하의 보좌관이니까요.”
“어째서 내게 직접 보내지 않았지?”
“아직 이목을 끌기엔 이르니까요.”
뚜벅. 묵직한 소리와 함께, 키릭슨의 뒤에서 이베트 후작이 나타났다.
“이베트 후작?”
레이얼은 살짝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이베트 후작이 허리를 굽혀, 정중한 인사를 보내왔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그대가 무슨 일입니까?”
“갚을 빚이 많아 자진 납세하러 왔습니다.”
이베트 후작은 키릭슨이 들고 있는 상자를 건네받아 레이얼에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더없이 진중하고 공손한 자태였다.
“이베트 후작, 이게 뭡니까?”
“늦었지만, 약혼 축하 선물입니다.”
“이걸?”
별것 아니라는 듯 이베트 후작은 가볍게 이야기했으나, 고급스러운 벨벳 상자 안에 든 것은 그렇게 쉽게 말할 게 아니었다. 보석류에 크게 관심 없는 레이얼도 눈이 번쩍 뜨일 만큼 그 광택과 크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심지어 이베트 후작이 내민 건, 분명 한 쌍이었다. 커프스 단추와 귀걸이.
“오늘 연회에서 끼고 와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 될 것 같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남일 이야기하듯 이베트 후작의 표정은 덤덤하기만 하다. 그러나 레이얼은 작게 웃고 말았다. 남 일인 듯,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기하는 이베트 후작의 귀 끝이 아까부터 몹시 새빨갰다.
“흠.”
오랜 시간 서로가 서로를 원망했던 시간이었다. 속았다는 것은 알게 되었으나, 그렇다고 민망함과 미안함마저 들지 않을 순 없다. 이건 이베트 후작의 사과였다. 황후가 전한 말만 믿고선, 어린 외손주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싸안지 못했던 외조부의 에두른 사과와 조금 늦은 후회. 이건 그도 레이얼의 잘못도 아니다. 작정하고 속이는데 당할 도리가 있나. 하지만, 레이얼은 이베트 후작의 선물을 기쁘게 받기로 했다. 이걸로 후작의 마음이 편해진다면 얼마든지.
“내일은 연회 마지막 날이니, 착장에 신경 쓰는 편이 좋겠지요. 안 그래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했는데, 덕분에 큰 시름 덜었습니다.”
“흠흠.”
이베트 후작의 헛기침 소리가 조금 전보다 커졌다.
“오우…….”
복부 상처를 들춰본 클로이가 나직이 감탄했다. 중간에 한 번 터지기까지 했는데도 상처는 한눈에 봐도 많이 아물어 있었다. 거버가 준 약 덕분일까……? 이유야 어쨌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클로이는 재빨리 소독한 후 붕대를 갈았다. 며칠째 해서인지 손놀림이 확실히 첫날보다 안정적이고 노련했다. 간 붕대는 그대로 벽난로에 던져넣었다. 화르르륵. 부지깽이로 남는 부분이 생기지 않게 신경 써서 뒤적거려주자 금세 재만 남고 타버린다.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를 보고 있자니, 작년 이맘때가 생각난다. 북부의 사냥제를 마치고 나서였던가. 온종일 죽기 살기로 달리고, 목숨을 걸고 사냥한 뒤였다. 사냥감을 정산해 제1 사냥꾼을 가리고 나니 갑자기 온몸이 후들거렸다. 제1 사냥꾼이 된 기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뒤늦게 긴장이 풀려서인지는 모른다. 생각해보니 종일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도 먹지 못했었다. 그런 클로이의 모습에 로지가 그대로 주저앉히더니, 불을 피웠다. 바싹하게 마른 낙엽을 모아 불씨를 피우자 금세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새빨갛고 따끈한 불 앞에 앉은 그녀는 근처에서 주워온 밤을 던져 넣었다. 오래지 않아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밤이 익어갔다. 그날 로지가 재를 털어 건네던 밤은 달았고 불어오는 바람은 청량해 너무도 좋았다. 남들이 뭐라 해도 북부에 살아 다행이라고 아르네로 태어나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로지.”
클로이는 조금 전 슬쩍 들어와 침구를 정리하는 로지를 불렀다.
“우리, 영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순간 로지의 움직임이 딱 멎는가 싶더니 이내 태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밤 구워드려요?”
어쩌다 북부를 떠올렸는지 안다는 듯한 말투에 클로이는 작게 웃었다.
“북부 밤처럼 맛난 게 여기에도 있으려고?”
“무슨 말씀이세요? 이주민을 보내느라 썼던 마차가 되돌아오며 밤이며 온갖 것을 싣고 왔는걸요.”
“뭐?”
“여기서 거기가 어디라고 아깝게 빈 마차를 보내요. 말도 안 되지. 밤 구워요?”
“구워.”
“여기서? 아님 후원 뒤에서요?”
“나가자.”
의욕적인 클로이의 모습에 로지가 고개를 내젓던 것도 잠시, 드레스 룸에 다녀온 그녀의 손엔 두툼한 로브가 들려 있었다.
“입고요.”
찬 바람이 새지 않게 끈을 야무지게 묶어준 로지가 클로이의 어깨를 툭툭 털어 매무새를 정리해주었다.
“계시는 동안 실컷 쉬세요. 에반 님이 토벌 계획 짜둔 거 보니까, 떡하니 아가씨를 넣어놨더라고요.”
“나?”
“예, 예.”
“잠깐만 로지. 유사시에 후계자는 보호받는 거잖아.”
기겁한 클로이의 목소리에 로지가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어찌나 호탕한지, 클로이는 제가 무슨 웃긴 소리를 했는지 생각을 되짚어볼 정도였다. 한참이나 웃은 로지가 눈물이 글썽한 눈을 손등으로 밀어 닦았다.
“유사시는 무슨 유사시예요. 공작님과 소공작님이 좀 쉬고 계시기로서니. 꾀부리지 말고 올 한해는 열심히 움직여보세요.”
“유사시가 아니라고?”
“……우리 아가씨 곱게 커서 정말 유사시를 모르시는구나.”
로지는 코웃음을 치며 클로이를 떠밀었다.
“밤 맛있게 구워드릴게요. 얼른 자리 떨치고 일어나세요. 유사시 아니니까.”
“진짜 아니야?”
“방금, 그 소리 거버가 들었으면 자길 못 믿냐고 얼굴이 시뻘게져서 사흘 밤낮을 쫓아다닐걸요?”
“거버가 괜찮대?”
“돌팔이같이 생겼지만, 은근히 솜씨는 쓸만하잖아요.”
어어 하며 떠밀리다 보니, 어느새 건물 밖이었다. 훅 불어닥치는 바람이 매섭다. 코끝을 스치는 시린 계절의 향이 북부의 것과 똑같아 클로이는 얼굴을 할퀴는 바람에 가슴이 설레고 말았다. 그날 밤, 클로이는 제 침실을 찾는 레이얼을 웃음으로 반겼다.
“전하 왔어?”
한껏 들떠서, 몹쓸 거라도 본 듯 저렇게 얼굴을 굳힐 것을 깜빡하고! 클로이는 제 웃는 얼굴에 표정이 바짝 굳은 레이얼을 보며 입안으로 투덜거렸다. 염병할 시오도르! 사람 웃는 걸 갖고 매번 저래! 밉상이야 정말! 아빠는 괜찮아, 오빠도 괜찮아. 우리는 곧 북부로 돌아갈 수 있어. 종일 가슴을 귀엽게 간질이던 즐거운 생각이 바짝 굳은 남자의 표정에 단박에 휘발되고 말았다.
“무슨 일이야.”
절로 말투가 퉁명스러워졌다.
“무슨 일은. 잘 있었는지 걱정되어 보러 왔답니다.”
“웬 공대.”
“로이는 없으니까.”
“계약은 아직 유효할 텐데.”
“뭐, 그래봤자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굳이 원하신다면.”
펄펄 뛰리라고 생각한 남자에게서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거 무슨 소리야?”
“너의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지.”
“잊지 않았겠지 전하. 납득시키지 못하면, 난 개인행동도 불사한다고 했어.”
“물론이야.”
으름장에도 레이얼은 눈썹 한번 찡그리지 않았다. 어제와 사뭇 다른 선선한 태도가 오히려 불안할 때였다. 지척에 다가온 그가 손을 뻗어 클로이의 뺨을 덧그리듯 쓸었다.
“얼굴이 좋아졌네.”
“밤 구워 먹었거든.”
“밤?”
“응. 이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클로이가 이불 속에서 손수건으로 싼 것을 건넸다.
“응. 북부의 밤이야. 맛있어.”
“북부의?”
“그럼, 수도 거랑 달라. 먹어봐. 구워 줄까 생각했는데 그럼 냄새나서 들킬 거야.”
이불에 넣어놔서 아직 안 식었다고 덧붙이는 클로이의 표정은 꽤 의기양양해 보였다.
“고맙기도 하지.”
“별말씀을.”
레이얼은 밤을 꽤 능숙하게 깠다. 길쭉한 손가락으로 속껍질을 어렵잖게 쑥 걷어낸다. 노릇하게 잘 익은 속살을 입에 털어 넣고 우물거리며 금세 또 하나 깐 그가 클로이의 입에 물려주었다. 달고, 고소하다. 클로이는 어느새 저도 모르게 아기 새처럼 그에게서 밤을 받아먹고 있었다.
“이렇게 좋아하는 밤을 나눠주다니.”
까주기 바빠 겨우 두 알을 먹은 남자에게 감사 인사를 받기엔 좀 무안했는데, 레이얼은 한술 더 떴다.
“답례를 해야지.”
“응?”
“답례.”
그의 품에서 나온 까만 벨벳 상자. 양 볼이 불룩해져 받은 클로이가 상자를 열어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하?”
놀란 목소리가 가냘프게도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