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 상냥한 남자의 애걸2021.03.23.
지겹도록 영리한 남자. 클로이는 이를 아득, 물었다. 황태자의 권위 따위가 그녀에게 먹힐 리 없다고 생각한 그는 ‘상실’을 들먹이며 클로이를 들쑤셨다. 얼마 전 ‘상실’을 맛볼 뻔했던 그녀가 그 말에 흐무러지도록. 머리로는 뻔히 꾀를 부리는 게 보였으나 마음이 그러질 못했다. 물러진다. 산채로 심장이 타버리는 그 감각이 얼마나 끔찍한 건지를 알아서 바짝 세운 날이 뭉개져 버린다.
“제발.”
마치 그런 클로이의 마음을 빤히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레이얼이 한층 더 은근해진 목소리를 냈다. 흔들림 없는 곧고도 옅은 시선. 명징한 시선을 보고 있자니 그의 말을 한번 믿어 볼까 하는 충동마저 인다. 클로이는 거칠게 머리를 털었다. 충동이라니. 지금 그들의 상황이 어떤데 충동 같은 걸 떠올린단 말인가. 말도 안 되지. 클로이는 제 손목을 붙든 레이얼을 단호하게 떨구었다.
“일전에도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전하.”
“무얼.”
“나를 조금 더 믿어주는 건 어때? 로이든 클로이든. 그 누구도 전하의 생각만큼 나약하진 않으니.”
“…….”
“나를 밀어내려면, 일단 이베트 후작가에서 성과를 보이고 나서라는 걸, 잊지 마.”
협상은 결렬되었다. . . . 고얀놈. 핀잔하는 듯했으나, 정작 레이얼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굳이 저렇게까지 날을 세워 맞서는 건 자신을 위해서라는 걸 모를 리가 있나. 클로이의 말은 항상 옳았다. 이베트 후작이 힘을 보태주기로 하긴 하였으나, 그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또 어떻게 쓸 수 있을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레이디’를 무턱대고 빼거나 ‘레이디 아르네’가 칩거를 시작하면 정작 휘청이는 건 그가 될 테다. 담을 넘어 공작저를 빠져나온 레이얼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을 두른채 버티고 선 아르네 공작저를 본 순간, 분명 보일 리 없는데도 그는 새파란 무언가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완벽한 착각임을 안다. 그러나, 착각이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지기 전 그를 배웅하던 클로이는 옅게 웃고 있었고, 그 모습이 보기 좋았으니까. 이런 착각을 할 수도 있으리라. 탓. 발 끝에 힘을 줘 땅을 박찬 그가 이내, 소리 없이 어두운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에반은 더 멋있어졌네”
클로이는 며칠 사이 턱선이 한층 날카로워진 에반을 보며 눈을 찡긋했다.
“눈에 먼지라도 들어갔습니까?”
“에반, 오늘은 기분이 안 좋네.”
평소라면 웃어주었을 윙크에 정색하다니. 그는 클로이의 말에 느릿하게 미소지었다.
“오늘이 아니라 요즘이죠.”
“에이 그런다고 바뀌는 게 있나. 그래 봐야 나만 손해지. 기분 풀어 에반. 내가 오늘은 더 열심히 일할게.”
“……아프시다면서요.”
“급한 것만 좀 처리할게. 오늘 그래서 온 거 아니야?”
에반은 짧게 웃으며 클로이에게 다가섰다.
“그럼, 잠깐 실례해도 될까요?”
“물론.”
클로이는 그에게 두 팔을 내밀었다. 안아 일으키라는 뜻이었다. 클로이의 부상 소식을 들어 아는 에반이 즉시 손을 뻗어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에반의 상체가 숙이던 순간, 막 씻은 사람 특유의 청량한 향기 사이로 희미한 비린내가 맡아졌다. 사냥하러 다니며 숱하게 맡아본 뜨겁고 비린 향.
“요즘, 손님이 많구나?”
대답 대신 짧게 웃은 에반은 클로이의 등 뒤로 쿠션을 덧대 편하게 기대앉을 수 있게 도왔다. 퍽 조심스럽고 상냥한 손길이었다. 일어나는 통에 흘러내린 이불을 가슴 밑까지 끌어 올려 덮어주고 나서야 허리를 편 에반이 입을 열었다.
“블랙잉그리드 어떠세요?”
보통 일이 아니구나. 클로이는 거절하지 않았다. 에반이 차를 준비해 돌아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코끝을 스치는 상쾌한 향. 그 맛 또한 일품인데, 감각이 차단되어 한껏 음미할 수 없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일단 앉아. 짧게 끝날 이야기 아닌 거 같은데.”
이들에게 의례적인 예의는 필요 없었다. 에반은 클로이의 말에 곧바로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공작님을 찌른 녀석의 동생을 확보해두었어요.”
“오? 용케 살려두었네?”
“숨만 붙여뒀지요.”
숨만이라고 발음하는 에반의 녹안이 순간 예쁘게 빛이 났다. 절로 소름이 돋을 만큼 서늘한 눈빛이었으나 클로이는 에반을 보며 웃어주었다.
“잘 참았네. 그런데 뭐가 필요해서 온 거야?”
“배후를 캐고 있어요.”
“그런데?”
“곧, 입을 열 것 같은데 아가씨께 먼저 여쭈려고요.”
아……. 아직 아무것도 듣지 못했는데 정수리까지 소름이 돋으며 몸이 가늘게 떨렸다.
“아가씨. 배후가 예상하는 그쪽이라면, 어떻게 해드리길 원하세요?”
에반은 달달 떠는 떠는 클로이의 손목을 가볍게 붙들어 내려주었다. 덕분에 클로이의 손에서 출렁거리는 찻잔이 안전히 트레이에 내려왔다.
“어떻게……?”
“어떻게 해드릴까요?”
상냥한 듯 하나 에반의 표정엔 온기라곤 없었다.
“에반.”
“전 솔직한 아가씨의 마음이 듣고 싶습니다.”
“…….”
“염치, 도의 그리고 윤리 같은 것 따위에 붙들린 정제된 ‘공녀’님의 말씀 말고, 클로이 아가씨의 명령이 필요합니다.”
트레이를 받친 그의 손등에 파란 핏줄이 툭 불거져 나와 있다. 그러니까 이건…….
“얼씨구나?”
“네?”
클로이는 에반을 향해 짧게 웃어주었다.
“에반, 네가 누구지?”
“아르네 가의 집사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게, 등을 떠밀어 달라 구걸하는 거야?”
“아닙니다.”
“아니긴, 뭐든 들어주겠다며 날 꾀려 하던 거 아니었어?”
“그건…….”
“손에 잡힐 것 같으니 참기 힘든가 봐.”
조금 전까지 파르르 떨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클로이는 차분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창을 등지고 앉은 에반의 표정은 역광에 먹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그 표정이 읽히지 않을까. 지금 에반은 아르네의 미친개라는 표정에 어울릴법한, 더없이 살벌한 얼굴일 테다. 굳이 그가 창을 등지고 앉아 독대를 청한 이유를 모를 리가 있나. 그의 본래 얼굴에 ‘아가씨’가 놀라지 않게 배려했음이다. 그래서 클로이는 이 순간 더없이 차갑게 분노했다. 이토록 상냥한 이를 몰아세운 ‘시오도르’에게. 아니, 길롯이라 불러야 옳을까. 클로이는 비틀리는 입매를 앙다물곤 손을 내밀어 에반의 손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지난 이백 년, 설마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으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에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르네는 단 한 번도 사사로이 검을 빼 들지 않았어.”
“그렇게 미련하니 이 사달이 난 겁니다.”
“당연하지.”
설마 선선히 수긍할 줄 몰랐던지 에반의 손이 움찔 떤다.
“아르네는 미련하고 우직하지. 괴수를 일주일만 눈감아주면 이까짓 제국을 거머쥐는 건 문제도 아닐 거야.”
어둠을 가르고 곧게 쏘아지는 녹빛 시선이 제법 따가웠지만 클로이는 피하지 않았다.
“제국에서 아르네 말고, 괴수를 제대로 상대할 사람이 있긴 한가? 없어. 없지. 그런데 이 무력을 가지고도 아르네는 절대 사사로이 검을 빼 들지 않았어.”
“…….”
“그것이, 아르네의 긍지야.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건 괴수로 충분하니까. ‘사람’은 상식이, 도의가 통하니까.”
“저것들은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르네의 남자들은 강하지. 아버진 곧 일어나실 거야. 그러니 미리 분노하지 마.”
복수는 아직 일러.
“아직입니까?”
“아직이지.”
에반은 클로이의 손을 으스러뜨릴 듯 힘줘 움켜쥐었다. 금방이라도 손가락뼈가 가여운 소리를 내며 똑, 부러질 것 같다. 하지만 클로이는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웃어주었다.
“그런데 에반 혹시, 그거 기억해? 그 누구도 나를 아르네라고 부르지 않았단 걸.”
찰나에 에반의 시선이 거칠게 흔들렸다.
“북부는 계산이 확실하지.”
여태 다독이던 것과 달리 클로이의 말은 제법 의미심장했다.
“나는 그냥 이 집의 귀염둥이라고. 그걸 잊으면 곤란해 에반.”
“클로이 아가씨.”
“맞아. 그게 나야. 그러니까, 진정해. 난 ‘아직’ 소원을 빌지 않았을 뿐, 빌지 않겠다고 거절한 건 아니니까.”
그 순간 클로이의 손을 억세게 쥐었던 에반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렸다.
“차가, 식었는데 새로 드릴까요?”
“좋아.”
트레이를 가져가는 에반은 클로이가 알던, 바로 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세상이 뒤집혔는데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캐서린은 제 손에 감기는 보드랍고 포근한 이불을 움켜쥔 채로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창밖에서 스미는 햇살을 바라보던 캐서린이 홀린 듯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눈이 부실 것을 염려해 쳐둔 커튼을 걷어내자 강렬한 태양 빛이 쏟아진다. 캐서린은 고개를 들어 그대로 쏟아지는 햇살을 두 눈에 담았다. 황금색의 찬란한 빛을 올려다보는 눈에서는 금세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알이 타는 것 같이 따갑고, 홧홧하다. 캐서린은 나직이 탄식했다. 뻔히 알고 있었는데,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태양은 태양일뿐이라는 것을. 한 겹 커튼을 두르고 그것이 보드라운 양, 내 것인 양 기껍게 즐겼으나 본디 그것은 자애로운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이렇게 사납고 강렬하다.
“아아……. 그랬지.”
캐서린은 간밤 자신을 깔아두고서 나른하게 웃던 황제를 떠올리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난, 그대가 주제 파악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눈치 있게 적당히 날뛴다고 믿었는데, 내 생각이 틀렸나?’
그를 자신의 치마폭에 싸안았다고 생각했다. 쥐고 흔든다 생각할 때도 있었다. 페트릭 시오도르는 캐서린 길롯을 사랑하니까. 그래서 그녀에게 ‘시오도르’의 성을 허락했다 생각했건만, 간밤 그가 던진 시선은 사랑하는 부인을 바라보는 게 아니었다.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재롱피우는 작은 동물의 건방을 깔보던 시선이었다.
“슬픈 결정?”
희고 반듯하게 난 앞니가 붉은 입술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슬픈 결정?”
그녀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같은 말투에 모멸감이 아니라 공포를 느꼈다. 그녀쯤은 너무도 쉽게 짓이겨버릴 것 같은 절대자의 오만함 앞에 자비를 바랄 수밖에 없던 처지가 초라하기만 했다. 그건 굉장한 충격이었으며 깨달음이었다. ‘내쉬’를 후계자로 바라봐주지 않은 건. 변방 출신이라 늘 트집잡히던 그녀의 소문을 황제의 이름으로 덮어버리지 않은 건. 바로…….
“아, 일어났습니까?”
“폐하?”
캐서린은 등뒤에서 울리는 황제의 목소리에 재빨리 눈물을 훔치곤 몸을 돌렸다.
“곤히 주무시기에 잠시 자리를 비웠건만. 이럴 줄 알았으면 기다릴 것을요.”
“곁이 허전하니, 저도 모르게 눈이 떠졌던 모양입니다.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으음. 콰이펄른으로 떠나기 전 길롯 백작이 인사를 드린다고 찾아왔었답니다.”
“어머나! 무슨 일인가요?”
“별건 아니고……. 관심이 있으시면 다시 불러드릴까요?”
“네, 폐하.”
“흠……. 아예 수도에 올 적마다 그대에게 ‘보고’하라고 해야겠습니다.”
“예?”
“황후, 표정이 퍽 어여쁘십니다.”
황제가 손을 들어 캐서린의 뺨을 슬쩍 쓸었다. 별장 생각에 살짝 흥분한 듯 두 뺨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까짓 것으로 이렇게 기쁠 수 있다니. 황제는 소리없이 실소하며 문밖을 향해 목청을 돋웠다.
“길롯 백작을 데려오너라.”
그의 말에 더는 못 참겠던지 기어이 캐서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억지로 참은 미소가, 씰룩 어색하게도. 파르르 떨리는 뺨이 아주 볼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