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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7. 당신의 낯선 얼굴 (57/121)

057. 당신의 낯선 얼굴2021.03.19.

다시 눈을 떴을 땐, 캄캄한 밤이었다.

“어?”

분명히 로지가 내쉬 황자를 데려온다고 하지 않았나? 누워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클로이는 당혹감에 눈을 깜빡거리다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누워 있어라.”

레이얼이 어깨를 눌러 눕히지만 않았다면.

“헉! 전하? 언제 왔어? 내쉬 황자는 돌아갔어?”

갑자기 캄캄해진 하늘도 이해가 안 되는데, 레이얼까지 보이자 클로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쉬?”

클로이는 제 어깨를 짚은 레이얼의 손을 덥석 쥐었다. 손아귀를 꽉 채우는 따뜻하고도 거친 커다란 손. 실재다.

“내쉬가 왜 나오지? 혹시 찾아왔었나?”

“아? 응? 어…….”

클로이는 연신 눈을 굴리며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왜 밤이지? 아까 노을이 지고 있었거든.”

“꿈을 꾼 건가?”

“로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굳었던 레이얼의 얼굴이 횡설수설하는 클로이의 모습에 차츰 풀리기 시작했다. 일루미넴을 먹고 하루 내도록 자다 일어나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물 마셔라.”

물을 한 잔 따라온 레이얼이 그녀에게 차가운 물을 권했다. 클로이는 그가 일으켜주는 대로 반쯤 기대 누워 건네는 물을 한잔 말끔히 비웠다. 덕분에 정신이 말끔하게 깨였다.

“언제 왔어?”

“두 시간 쯤 전에.”

“오우. 나 오늘 아주 멋진데, 내쉬 황자는 세 시간을 기다렸거든.”

“……잠이 안 깨나?”

“아니, 잠이 깨서 하는 소리야. 내쉬 황자가 왔어. 약을 먹어서인지 로지가 날 깨웠는데도 못 일어났어. 덕분에 내쉬 황자가 세 시간이나 기다렸고.”

“왜 왔는지는 들었고?”

“불러놓고 기다리다 또 자버렸대도.”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지만, 민망함에 눈께가 붉다.

“내쉬가 혹시, 왜 이러는지 짚이는 구석은 없고?”

“레이디로 한번 마주친 적 말곤 없어. 클로이로는 제대로 본 적도 없는 걸.”

흠. 클로이의 설명에 레이얼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굳이, 아르네 공녀에 집착하는 이유는? 정치적 행보를 시작했다 한들, 클로이에게 이러는 이유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형제의 피앙세에 관심을 보여 얻을 것이 추문 말고 더 있나?

“혹시, 나한테 반했나?”

“뭐?”

매끈하게 뻗은 레이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 몰랐는데 은근히 길롯 취향인 것 같던데.”

농담이었는데 레이얼이 표정을 굳히니 여간 멋쩍은 게 아니다. 클로이는 하하하, 어색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내며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빌어먹을 시오도르. 무안하게. 하지만 이어지는 레이얼의 말엔, 클로이는 무안이 아니라 당황하고 말았다.

“그럴지도……?”

“뭐어? 돌았어?”

오늘 황실 수도관에 누가 독이라도 푼 걸까? 오후엔 황자가, 밤엔 황태자가 차례대로 이상하게 군다. 기겁하는 클로이의 모습을 보고도 레이얼은 농담이라는 소리를 끝까지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확신에 찬 어조로 한마디 더 보탰을 뿐이었다.

“그대는 미인이잖나.”

맙소사. 부끄러워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클로이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폐하.”

막, 잠이 들려던 차 패트릭 시오도르는 자신을 부르는 귀여운 목소리에 눈을 떴다.

“음?”

캐서린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눈을 반달모양으로 접어 환하게 웃었다.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 잊기 전에 말씀드리려고요.”

“그게 무엇일까.”

“오늘 오후 길롯 백작을 만났는데, 별장 바닥 다지기가 끝나서 이제 건물을 본격적으로 짓는다고 해요.”

“저런, 이제야?”

“큼직하고 예쁘게 지어놓으라 명령하셨으니, 일이 쉽지 않았을 테지요. 생각보다 빠르다 싶던걸요?”

길롯 백작을 두둔하면서도,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쓴 말투가 귀여웠다. 패트릭은 그런 캐서린을 보며 설핏 미소지었다. 언제 들어도 참 예쁜 말이었다.

“흠?”

“겨울쯤 별장이 완성될 것 같다던데, 나들이를 떠날 때 아르네 공녀를 동행하면 어떨까 해요. 폐하께선 어떠세요?”

“아르네를?”

노곤한 듯 풀려 있던 황제의 눈매가 황후의 말에 일순 서늘하게 굳었다.

“네. 이번에 연회를 주관하며 보니 얼굴이 말이 아닌지라 마음이 아팠답니다. 별장이 곧 완성될 테니까 기분 전환 겸 공녀를 데려가면 어떨까 해서……. ”

“…….”

황제의 시선에 찔끔해서 캐서린은 혼나는 아이가 변명하듯 말을 늘였다. 단번에 허락이 떨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황제의 반응이 생각보다 날카롭다. 캐서린은 대답 없는 황제를 반드시 구슬려보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황가에 ‘저주’ 같은 추문이 붙는 건 그리 좋은 모양새가 아니지요. 좋은 풍광을 보며 쉬노라면 공녀도 금세 기운을 차릴테지요.”

“저주.”

“일국의 황태자인걸요. 사고에 사고가 연이어 터졌다지만, 아르네의 일까지 겹치자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대가 나서겠다……?”

황제가 몸을 돌리는가 싶더니 한 팔을 짚고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웠다. 캐서린은 꼼짝없이 그를 아래서 올려다 보는 모양새였다.

“캐서린.”

“네, 폐하.”

황제는 제 말에 유순하게 대답하는 캐서린을 보며 그 역시 웃어주었다.

“귀여운 사람. 내가 그대를 어째서 이토록 아끼는지 아나?”

평소보다 훨씬 부드러운 목소리와 심지어 웃어주기까지 하는데, 이상하게도 캐서린은 도통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허기진 짐승의 커다란 발톱에 깔린 먹잇감이 된 것처럼 온몸이 긴장감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난, 그대가 주제 파악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폐하?”

“눈치 있게 적당히 날뛴다고 믿었는데, 내 생각이 틀렸나?”

‘저주’라는 말을 입에 올려선 안 됐던 걸까? 캐서린은 이가 딱딱 소리가 나도록 부딪히며 떨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황제의 녹안은 기괴한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음험하고 비정한 시선을 받고 있자니,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지? 뭘까? 캐서린은 입안이 바짝 말랐으나, 감히 마른침을 삼켜보지도 못하고 허덕였다.

“아르네는 내버려 두도록 해. 그대가 내 말을 듣지 않고 아르네까지 쥐려고 하면, 난…….”

말끝을 흐린 황제가 고개를 들어 잠시, 먼 데를 바라보더니 다시 시선을 내렸다.

“난, 슬픈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아. 알아듣겠나?”

“예. 예예 폐하.”

“이대로 쭉, 그대를 어여뻐 할 수 있게 도와줘요.”

“예. 폐하.”

평소와 달리 캐서린의 목소리는 제 것이 아닌 듯 작게 쉬고 억눌린 듯해서 이상하게 울렸으나 황제는 그녀의 대답에 미소지었다. 가뜩이나 체격이 작은 그녀가 아니었던가. 푹신한 침구에 틀이 박혀 파들파들 떠는 캐서린은 패대기쳐놓은 눈뭉치보다 딱한 모습이었다. 예쁘고, 사랑스럽고 딱 그만큼의 크기로 하찮아 보인다. 패트릭 시오도르는 그런 캐서린을 보며 입술을 한껏 늘여 몹시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그렇듯, 어여쁜 분.”

그 말에 캐서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십 년이 넘는 시간 그녀가 알던 남자는 대체 누굴까. 황제의 시선에 배어난 옅은 혐오와 은근한 멸시가 어린 기색을 알아챈 캐서린은 그가 생판 처음 보는 이처럼 낯설기만 했다. 멸시라니! 갑자기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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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얼은 클로이가 진정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주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싯푸르게 질렸다가 다시 허옇게 떴다.

“혼자 보기 아까운 걸.”

“이, 이, 이 뻔뻔한 놈!”

“뻔뻔하다니, 솔직한 거지. 왜 사실에 부끄러워하는 거지? 그대는 아름답잖나?”

맙소사. 미인에게 예쁘다는 칭찬을 이렇게 꾸지람처럼 듣게 될 줄이야. 이건 신종 공격인 걸까. 클로이는 한없이 진지한 레이얼을 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리면 진정 될까?”

“뭘 기다려. 가버려. 이미 충분히 힘들어하고 있잖아. 아직 부족해?”

“본론은 아직인데?”

“……뭔데? 이제 전하의 말이라면 좀 무서운걸.”

“그럼 좀 더 진정해봐.”

부정하지 않는 레이얼의 모습에 클로이는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음을 눈치챘다. 하긴, 레이얼 시오도르가 이유도 없이 그녀를 이 밤에, 무단으로 찾아왔을 리는 없다. 클로이는 단번에 얼굴에서 감정을 싹 지워버린 후 입을 열었다.

“말 해봐. 무슨 일이야?”

레이얼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클로이의 목소리에 ‘용건’을 꺼내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내밀어 가볍게 까딱이는 건, 아무래도 손을 달라는 의미 같다. 클로이는 잠자코 손을 내밀어 주었다. 마치 에스코트를 받을 때처럼 손끝으로만 가볍게 그를 쥐었으나 레이얼이 두고 보지 않았다. 그는 손을 깊게 잡은 뒤 천천히 끌어당겨 클로이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내내 그의 시선은 클로이의 얼굴에 박힌 그대로였다. 의식을 치르듯 진중한 태도에 클로이는 갑자기 왜 이러느냐 차마 묻지도 못했다.

“클로이,”

“응?”

“나의 피앙세, 사랑스러운 부하씨. 내가 말한 적 있나.”

도무지 레이얼이 한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달짝지근한 소리에 소름이 돋았으나 클로이는 수선을 부리는 대신 턱짓을 했다. 계속 해보라는 의미였다.

“그대의 말은 항상 옳았다고.”

“내가 전하를 속일 이유가 없잖아.”

“오늘 난 죄를 벗고 왔어.”

“……뭐?”

“그리고, 또 다른 이의 죄를 벗겨주고 왔지.”

“설마.”

레이얼은 대답 대신 웃어 보였다. 여태 클로이가 보았던 그 어떤 미소보다 화려하고 예쁜 웃음이었다.

“이베트 후작이 나를 지지하기로 했다.”

이렇게 빨리! 클로이는 레이얼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지않으면 가슴이 벅차올라 이상한 소리를 질러버릴 것 같았다.

“그대, 기뻐 보여.”

“기뻐. 전하는 기쁘지 않아?”

“기뻐.”

“그치?”

“응. 그대를 나만의 ‘레이디’로 두게 되어 정말이지 기뻐.”

활짝 미소짓던 클로이가 굳은 건 그때였다. 도무지 흘려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나만의 레이디?”

“레이디. 너와의 계약을 해지하지. 앞으로 너의 활동 일체를 금한다. 아울러 레이디 아르네도 가급적이면 활동을 자제해주면 좋겠는데.”

“……뭐?”

“이유는 모르지만 내쉬가 노리고 있어. 이런 상황에서…….”

“적당히 해 전하.”

클로이는 조금 전 그의 말에 기분이 묘했던 이유를 알아냈다. 레이얼은 지금 그녀를 안전을 빌미로 가두려고 하고 있었다. 이 무슨.

“내가 일전에도 물었던 적 있을 텐데. 전하의 피앙세들을 쉬쉬하고 감춰서 제대로 지켰는지?”

“클로이!”

“전하, 태도를 확실히 밝혀. 지금 전하는 내게 피앙세의 걱정과 황태자의 권위를 교묘하게 행사하고 있어.”

“말장난하자는 게 아니야. 클로이.”

“전하, 나도 농담하는 게 아니야. 지금의 난 지금 아르네 공작대리지. 아르네 공작의 반경을 ‘걱정’해서 묶는 게 가능하다고 보는 거야?”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험악해졌다. 희미한 달빛만이 전부인 어두운 방을 가르는 첨예한 시선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레이디 아르네. 그대가 날 조금만 더 이해해주면 안 되겠어?”

레이얼이 고른 건 ‘피앙세의 걱정’이었다.

“여섯 번의 상실 끝에 맞은 그대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나를, 그대가 좀 봐주면 안 되겠어?”

“…….”

“제발.”

구구절절한 간원. 맞잡은 레이얼의 손이 긴장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일국의 황태자로서 도저히 내보일 수 없는 저자세에 숨이 턱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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