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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 갑옷처럼 두른 허세 (56/121)

056. 갑옷처럼 두른 허세2021.03.16.

‘개소리.’

치미는 감정을 눌러 삼키느라 꽉 쥔 주먹을 보았다. 하지만 클로이는 그런 레이얼을 보면서도 쉬지 않고 몰아세웠다. 왜냐하면, 그와 그녀는 똑같은 이유로 모친을 잃었으니까. 그는 유죄일 수 없었다.

‘역시, 두 번째 출산이 무리가 된 거지요? 공녀를 낳고 내내 앓으셨잖아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시름에 겨운 공작은 악의에 잠식되지 않았다. ‘아르네 공작부인이 혹한에 폐병이 들었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있는가? 그녀를 앗아간 건 북부다. 이후, 같잖은 말로 내 딸에게 죄를 씌우는 자는 직접 목을 치겠다!’ 아르네 공작은 세상이 제 딸의 목을 죄도록 두고 보지 않았다.

‘누구든 네 태생에 흠을 내도록 두고 보지 말아라. 죄가 되는 태생은 없단다. 내 사랑.’

‘누군가의 비극을 기회라고 생각하는 놈들이 있지. 결코, 개소리에 휘둘려선 안 된단다.’

‘개소리?’

‘사람이라면 하지 못할 소리.’

그때 클로이는 아버지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고작 네 살이었고, 태생이니 죄니 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라고 소리 내어 말하지 않은 건 자신에게 속삭이던 아버지의 표정이 너무도 슬퍼 보여서였다. 흐르지 못한 눈물이 굳어, 아버지의 눈은 시퍼렇게 질려있었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뭐든 대답해주고 싶었다.

‘압빠. 클로이도 아르네야.’

어눌한 발음으로 오직 웃음을 바라, 하였던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건 클로이의 다짐이 되었다. 악의에 짓눌리지 않고, 그녀는 아르네 안에서 그 누구보다 사랑스럽게 자라났다. 그랬기에 클로이는 참혹하게 일그러지는 레이얼의 모습에도 흔들리지 않고 외칠 수 있었다. 개소리! 죄가 되는 태생은 없다. 누군가의 비극을 기회라고 생각하는 놈들이 있지. 그녀가 어린 시절 아르네 공작이 그러했듯 다정하고도 단단하게 그를 다독이지 않았던 것은 이미 늦어서였다. 오랜 세월 그는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쓰고 자라버렸다. 그게 다정한 말 한마디로 벗겨질 리 없다. 이미 뼛속 깊이 박혀버린 후가 아닌가. 그래서 클로이는 아프게 할퀴고, 매섭게 뜯어냈다.

“……착하지.”

문득 클로이는 작게 웃었다. 화가 나서 주먹이 벌벌 떨리면서도, 고함 한 번 지르지 않았었다. 그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불렀을 따름이었다. 죄를 뒤집어쓰고서도, 그렇게 짓눌리고서도 정말이지 다정하게 잘 자랐지.

“우리 전하는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클로이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훌쩍 높아진 하늘이 하루가 다르게 투명해지고 있었다. 바야흐로 겨울이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 * * 훈김이 나는 찻잔이 그의 앞에 놓였다. 평소 후작이, 아침 정례회의에서 마시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레이얼은 붉게 우러난 찻물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뗐다.

“어머니께서 페이즐릿을 즐겼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말에 잔을 집어 들던 이베트 후작의 손이 흠칫, 떨렸다. 당황한 게 여실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레이얼은 이것이 무의식중에 내온 것임을 깨달았다. 생전, 딸이 즐기던 차를 후작은 남몰래 그녀를 그리며 집 안에서만 내내 마셨던 모양이었다. 안타깝고 사랑스러운 모습에, 레이얼은 어쩐지 눈시울이 화끈했지만 가만히 숨을 골라 치미는 감정을 눌렀다.

“……꺼려지면 다른 것으로 내어드리겠습니다.”

“제겐 허락되지 않아 한 번도 마셔보지 못했습니다만 오늘 덕분에 맛보게 되겠군요.”

“…….”

힐난인지 원망인진 모르겠으나 와닿는 후작의 시선이 제법 따끔하다. 레이얼은 제 몫의 차를 느긋하게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맛이었군요. 향이 상쾌하고 부드럽습니다.”

“차 이야기를 하자고 오신 건 아닐 테고요.”

이베트 후작은 지난 세월 그랬듯 몹시 냉랭한 태도였다. 손자가 아닌 딸을 앗아간 ‘죄인’을 대하듯. 그 모습에 쓴물이 왈칵 넘어오는 순간, 그의 머릿속을 낭랑한 목소리가 가득 채웠다.

‘개소리!’

‘대답해 봐. 전하에게 죄를 씌워 이득 볼 자가 누구지?’

레이얼은 숨을 느릿하고 길게 뿜으며 호흡을 골랐다.

“오랜만이라, 저 역시 어색하긴 하군요. 그럼, 오늘은 본론만 빨리 이야기해 볼까요?”

대답대신 돌아오는 건 싸늘한 침묵 뿐이었다.

“이베트 후작.”

“네, 황태자 전하.”

“그대가 필요합니다.”

“어지간히 다급하신 모양입니다.”

“네.”

화를 내고 뛰쳐나가길 바랐던 걸까. 그의 담담한 대답에 이베트 후작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내게 힘을 실어주세요. 후작.”

“이제 와서?”

후작은 레이얼의 말에 이를 으득 갈았다. 턱근육이 잔뜩 도드라져서 씩씩거리는 품새가 적잖이 화가 난 것 같았다. 하지만 레이얼은 그런 후작의 분노한 모습보다, 그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순식간에 모욕이라도 당한 듯 눈자위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후작이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힘줘 그의 말을 따라했다. 이제 와서……. 잔뜩 상심한 말투에 레이얼은 클로이가 말한 ‘죄’를 어쩌면 자신만 뒤집어 쓴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작,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뭡니까.”

“왜 날 버렸습니까?”

“하.”

실핏줄이 돋아 무섭도록 번들거리는 눈. 이베트 후작은 분노한 것을 숨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 제게 하시는 말씀이 분명합니까!”

후작의 얼굴에 서린 배신감을 읽은 순간, 레이얼은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죄를 씌워 이득 볼 자가 누구지?’

아아……. 사랑스러운 나의 부하씨. 영특한 내 피앙세. 분노한 이베트 후작을 바라보는 레이얼의 시선이 아득해지며 더없이 보드라워졌다.

“……가씨!”

귓가를 스치는 희미한 소리에 클로이는 뿌연 시야를 닦아내듯 눈을 깜빡였다. 시야가 마구 흔들리고 엉망인 걸 보니…….

“로지, 그만 흔들어.”

“아가씨. 불러도 흔들어도 어쩜 그렇게 뚝심 있게 주무시는 거예요!!”

빽, 소리를 지르는 로지의 얼굴에 서린 건 공포였다. 모든 감각을 차단하는 일루미넴을 먹은 줄 모르니 깨어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겁먹을 만했다.

“왜 그래. 좀 자게 두지.”

로지의 등 뒤 창으로 보이는 붉게 물든 하늘로 봐서, 해가 지는 모양이었다. 어쩌다 이만큼 자버린 걸까 싶은 생각도 잠깐이었다. 알게 뭐람. 난 아픈데.

“주무실 때가 아니에요. 일어나세요. 아가씨.”

“왜. 하늘이 무너진 거 아니면 다음에 해. 나 몸이 안 좋은 거 알면서.”

“손님이 왔어요.”

“누구?”

늘어져 있던 클로이가 대번에 얼굴을 굳혔다. 로지가 아픈 자신을 ‘굳이’ 깨울 정도면 보통 손님이 아닐 것이다. 사정을 아는 레이얼이 그녀를 깨울 리도 없다. 그렇다면,

“내쉬 황자전하께서 찾아오셨어요!”

맙소사…… . 혹시나 했건만 역시나다. 왜 나쁜 예감은 쓸데없이 잘 들어맞나 모르겠네. 클로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나 잔다고 말했어?”

“그럼요.”

“그런데?”

“잠깐이라도 좋으니, 얼굴만 뵙고 싶다고…….”

“돌았대?”

모욕하기 위해서라면 괜찮은 방법이다. 클로이가 누군가. 아르네 공작가의 임시 가주이며, 현 황태자의 피앙세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를, 약속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와 버틴다고?

“한 대충 두어 시간 기다리게 해볼까?”

“이미 세 시간째 기다리고 계세요.”

“뭐??”

진짜 미쳤나 봐! 이쪽 사정이야 어쨌건 간에 트집 잡히기 좋은 상황이다. 클로이는 정신없이 일어났다. 하지만 몇 시간 내리 녹진하게 풀어진 몸은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제대로 따라와 주질 못했다. 땅을 딛고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몸이 휘청이다 그대로 허물어졌다. 로지가 급히 붙들어 바닥에 처박히는 건 면했으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진짜 코르셋은 두 번 다시 입지 마세요.”

“누가 뭐래. 나도 이번 연회 끝나면 다시는 안 입을 거야.”

그 와중에도 로지는 갈비뼈가 부러진 클로이의 환부를 생각해 겨드랑이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아가씨, 아무래도 안 되겠는데요?”

“그치?”

“큰일이네…….”

“큰일은 무슨. 나 세수 마치고 나거든 불러 와.”

“예?”

“이리로 불러오라고.”

무례엔 무례로 갚아주지 뭐. 클로이는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 가며 그때까지 굳어 있는 로지를 채근했다.

“어서.”

  . . .

“오래 기다리시게 해 죄송합니다.”

차를 다섯 잔째 새로 채웠을 때, 그가 있는 응접실로 시녀가 들어섰다. 내쉬는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린 시녀를 향해 짧게 웃어주었다.

“공녀께서 일어나셨나 보지?”

“네. 전하. 한데…….”

“한데?”

내쉬는 이번엔 무슨 핑계로 자신을 내칠지 기대되었다. 세상에 누가 잠을 잔다고 황자를 세 시간이나 기다리게 한단 말인가? 심지어 깨워도 일어나지 못한다니. 그가 화를 내고 돌아가 주길 바라서 한 짓이었겠으나, 내쉬는 공녀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늘 그가 바란 건 그저 차 한잔을 핑계로 얼굴이나 잠시 보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또, 이렇게 그를 들쑤신다. 그렇다면 반드시 그 비싼 얼굴을 보고 가야지.

“공녀께서……”

“눈은 뜨셨는데 일어나질 못하여, 황송하지만 보러 와주시면 어떻겠냐 여쭈어 달라 하셨습니다.”

치장을 핑계로 기다리게 할 셈이라고 생각했건만, 이어지는 시녀의 말은 의외였다. 아니, 의외이다 못해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일어나시질 못 한다고?”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에 조금 전까지 입술에 매여 있던 미소가 흔적도 없이 휘발됐다. 웃음기를 싹 지운 내쉬는 무척 비정하고도 서늘한 낯을 하고 있었다.

“레이디 아르네께서 아프신가?”

아프다는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내쉬는 미간을 좁혔다. 공녀에 대한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가 아는 아르네 공녀는 4년 전 기억이 전부였다. 치근덕거리는 머저리에게 주먹을 날리던 모습 말곤 아는 게 없었다. 애초에 아르네 공녀는 북부에서 도통 나오지도 않았고, 황실 연회도 일 년에 한 번 겨우 참석했다. 반드시 나와야 하는 것에만 잠깐 얼굴을 비치는 터라 내쉬가 아는 공녀는……. 그날 밤 단편적인 모습 말고는 없다. 아무것도.

“가지.”

내쉬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 * *

“아, 아가씨?”

그를 데리러 왔던 시녀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아르네 공녀를 깨우려 애를 썼다. 힐끔 힐끔 그의 눈치를 봐가며 제 주인의 어깨를 흔들고 낮게 부르짖는다.

“분명, 조금 전에 눈을 뜨셨는데. 왜 또 이러시지.”

당황한 티가 여실하다. 붉어진 뺨, 작게 일그러진 미간, 그리고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저런 표정은 꾸민다고 나오는 게 아니었다. 내쉬는 하얗다 못해 푸르게 질린 공녀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룻밤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레이얼의 팔짱을 끼고 웃던 여자는 죽은 듯 늘어져 있었다.

“그만하게.”

시녀가 흔들 때마다 힘없이 꺾이는 고개가 영 거슬려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충분히 무안하네.”

“예?”

“공녀께서 이렇게 상태가 안 좋으신 줄 몰랐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쓰러졌다고 했던가. 제 손목이 꺾여도 티도 없이 감추던 강철같은 여자가 그럴 리가 있나? 라고 생각했건만. 오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픈 손목은 참으면 되나, 쓰러져버리는 건 제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다. 내쉬는 침대 밖에 삐져나온 클로이의 가는 팔목을 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희고 가늘어 턱없이 유약해 보인다. 조금만 힘줘 잡으면 똑, 소리를 내며 부러질 것 같은 생김이다. 이건……. 갑각류도 못 되는 건가.

“아아…….”

갑옷처럼 두른 허세를 벗겨 보고 싶다. 저 보드랍고 말캉한 속내는 어떨까. 있는 줄도 몰랐던 가혹한 기대가 꿈틀거리며 눈을 뜨는 것을 느끼며 내쉬가 손을 들어 입매를 가렸다. 그렇지 않으면 웃는 모습을 들키고 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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