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 죄를 씌우는 자2021.03.12.
“난 네 취향인가?”
도망갈 구석도 없이 몰아붙이는 그는 확실히 집요했다.
“응?”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클로이를 향해 상체를 숙여 다가왔다. 입술에 닿는 그의 날숨이 따끈하다.
“말해봐. 난 그대의 취향인가?”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이 마치 피부를 핥는 것 같이 진득하게 반짝인다.
“그게 중요해?”
목이 졸린 것처럼 새 나오는 소리가 가련하기 짝이 없다.
“당연하지, 난 가진 게 없으니까. 그대의 취향에라도 매달려 볼 셈이야.”
담담한 듯 속삭이는 레이얼의 말에 얼굴이 일그러진 건 클로이 쪽이었다.
“왜, 말을 그렇게…….”
“왜겠어.”
클로이의 손을 움켜쥔 남자의 엄지 손가락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손목 안쪽을 뭉근히 쓰는 것이 뭐라고, 등골이 오싹하고 입안이 바짝 말라버리나! 목덜미로 솜털이 올올이 서는 것을 느끼며 이를 꽉 물었다.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얼은 클로이에게서 시선을 꽂아둔 채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로이, 네 말은 다 맞아.”
“……뭐?”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클로이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난 유능한 부하의 덕을 톡톡히 보았지. 길롯의 발목을 묶어준 덕에 더는 내 사람을 빼앗기지 않고 추스를 수 있었어.”
그는 고요한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건 임시방편일 뿐, 길롯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지. 알아. 네 말대로 나는 새로운 이들이 필요해. 돈으로 사지 못할 권력과 충심을 말이야.”
“전하.”
“나의 소중한 ‘레이디’가 활동을 멈추면 길롯이 더욱 날뛸 테니, 그전에 새 세력을 영입해야 한다는 건 당연한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쉽…….”
“불가능하다고 꼬리 말지 마.”
클로이는 이제야 레이얼이 하려는 말을 이해했다. 그가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지도.
“시간이 걸린다면, 내가 벌면 돼.”
“로이!”
“클로이.”
버릇처럼 그녀를 로이라 부르는 레이얼에게 단호한 목소리를 낸 클로이가 생긋 웃었다.
“클로이. 난, 클로이 디 레나나 아르네야. 시오도르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미들네임을 가진 아르네. 그 옛날 황좌를 기꺼이 시오도르에게 양보했던 아르네.”
클로이가 손목 잡힌 쪽 팔을 확 접자 레이얼이 순식간에 딸려왔다. 턱. 그들이 부딪히기 직전 팔을 뻗어 침대를 짚는 것으로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벌린 레이얼을 올려다보며 클로이는 웃었다.
“그런 아르네를 걱정이라는 단어로 붙들어 맬 생각은 접는 게 좋아. 시오도르.”
“억지 부리지 마. 네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이런 몸으로 ‘레이디’가 되는 건 불가능해.”
“그렇게 생각한다면 ‘열흘’이 지나기 전에 데려와. 내가 안심하고 본업으로 돌아갈 수 있게.”
결국 이야기는 제자리였다. 한 치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클로이의 말에 레이얼은 나직한 숨을 터트렸다.
“스스로도 잘 알 텐데? 지금 이게 얼마나 현실성 없는 억지인지?”
현 귀족가의 태반이 길롯의 휘하에 들어가 있었다. 레이얼의 편에 선 것은 손으로 꼽힐 만하고, 그 어디에도 연을 대지 않은 건 길롯과 시오도르의 눈치 볼 필요가 없는 거물들이다. 이를테면 아르네 공작가 같은. 하지만 얼마전 증세안으로 길롯에게 날을 세우던 아르네 공작가가 어떻게 되었던가. 그걸 봤는데, 여태도 버티던 이들이 중립을 풀고 레이얼의 곁에 서줄 리가 있나.
“왜 억지야. 전하의 외가가 건재한데.”
내내 침착하던 레이얼의 얼굴에 처음으로 조소가 떠올랐다. 입꼬리를 비틀어 짓는 미소가 더없이 흉흉하다.
“이베트 후작가를 말하나?”
“외가가 거기 말고 있나.”
“뭘 기대하는진 알겠는데, 그 생각은 접는 게 좋겠어. 그들은 내 어머니가 땅에 묻히기도 전 나를 버렸다.”
“뭐? 왜?”
“왜냐니, 내 어머니를 죽인 게 누군지 모르나?”
들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입을 막기 전에 이미 레이얼에게서 뒷말이 흘러나왔다.
“나다. 클로이. 내가 줄리아나 황후를 죽였지.”
얼음으로 빚은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속삭이는 말이 슬펐다.
* * *
“개소리.”
레이얼은 처음 들어보는 욕설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뭐, 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아 되물었으나 돌아오는 소리는 똑같았다.
“개소리라고 그거. 다시 말해 줄까? 개소리, 개소리, 개소리.”
클로이는 그를 올려다보면서도 마치 그를 하찮은 것을 대하듯 깔보는 시선을 하고 있었다.
“줄리아나 황후 폐하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신 걸 모르는 제국민이 있나?”
“클로이.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거라. 이건 네가 그렇게 쉽게 말할 게 아니야.”
“나보고 거짓말이 서툴다고 했지? 가끔 전하는 바보 같은 거 알고나 있어? 영리한 것 같은데 가끔 세상 다시 없을 멍청이같이 굴 때가 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이야.”
“적당히 하지.”
“레이얼 시오도르. 그대야말로 적당히 해. 어디서 되지도 않는 청승을 떨어.”
시정잡배보다 더 불량한 말투에 레이얼은 정신이 혼미했다. 줄리아나 황후의 죽음은 그의 역린이었다. 그런 것을 제 앞에서 꺼내 들어 마구 헤집다 못해 갈가리 찢어발기는데 제정신인 게 불가능했다.
“클로이. 클로이.”
울컥 울컥 솟아오르는 것을 억지로 눌러 삼키며 숨을 고르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클로이는 평소와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듯 그를 가차 없이 몰아세웠다.
“무려, 황태자라는 자가 이렇게 허술해서야.”
말릴 새도 없이 손을 뻗은 클로이가 레이얼의 멱살을 쥐고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그들의 거리가 종이 한 장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가까워졌다.
“제국민 모두가 아는 일을 ‘혼자만’ 다르게 알고 있는 게 이상하지 않나?”
“그건 그런 게 아니야. 모후는 나 때문에 돌아가신 거다. 나를, 나를 낳아서 돌아가신 거야.”
“누가 그런 소리를 했지?”
“뭐?”
“전하에게 죄를 씌워 이득 볼 자가 누구지?”
“……죄?”
되묻는 남자의 옅은 색의 눈동자가 파랑이라도 인 듯 거칠게 떨렸다.
“죄.”
단언하듯 속삭이는 목소리가 서릿발보다 매섭다. 깜빡. 그를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에 꺼지지 않는 불이 켜진 듯 형형하다. 또 한 번 깜빡. 깜빡이는 새파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그 언젠가 자신을 쏘아보던 푸른 눈동자가 떠오른다.
-전하, 자중하세요. 울면 안 됩니다.
얼굴은 흐릿하나 머릿속을 스치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선명히 떠오른다. 울먹이는 자신의 손을 움켜쥔 희고 보드라운 손. 그러나 길게 다듬은 뾰족한 손톱이 그를 아프게 찔렀었다.
“누구지?”
클로이의 말에 묻어두었던 기억이 마치 가까이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조금 더 선명해진다. 붉게 물들인 입술과 어깨에 늘어뜨린 새카맣고 윤나는 머리칼이 이제야 떠오른다.
“그건…….”
레이얼은 눈살을 찌푸렸다.
-철모르는 아이처럼 울면 안 됩니다.
상냥한 말투와 달리 그를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는 한없이 싸늘하게 빛났다. 숱한 사람들이 그에게 울지 말라 하였기에 잊고 있었다.
-출산은 허약한 이에게 독이에요. 황후 폐하께선, 전하를 위해 독배를 들이키셨는데 이렇게 못난 꼴을 보이시면 어떻게 합니까.
-독…….
-전하를 위해 기꺼이 독을 삼키셨지요.
그러나 생각해보니 떠오른다. 어린 그에게 죄를 짐 지우던 이가. 더없이 사랑스러운 얼굴로 누구보다 무자비하게 어린 그의 마음을 찢어발기던 달콤한 목소리.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비강이 들큰한 향에 절여지는 기분이 든다.
-황후 폐하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마세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던 말을.
“누구야?”
무섭게 일그러지는 레이얼의 모습에 클로이는 추궁하듯 답을 재촉했다.
“그건…….”
“길롯이겠지.”
하얗게 질린 남자의 눈에 초점이 돌아오며 그를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와 맞닿았다. 기억 속 그를 송곳처럼 찌르던 시선과 똑같은 채도 높은 벽안. 그러나 눈앞에 둔 이의 시선은 단단하고 맑아 그를 헤집는 것이 아니라 술렁이는 마음을 안심시킨다.
“클로이.”
레이얼은 신음하듯 그녀를 불렀다. * * * 아침 조례가 끝나기 바쁘게 회의장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오늘 아침 정기 조례는 황태자도 부재하였기에, 가볍게 안건만 상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어둑했다. 황제도, 황태자도 그리고 아르네도 없는 조례회의에 길롯 백작은 제가 제국의 주인이라도 된 듯 날뛰었다. 사람들은 아르네 공작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나저나 아르네 공작님께선 좀 어떠시답니까?”
“아직 의식이 없으시다는 것 같습니다. 큰일입니다.”
“아르네 공작만 그런 게 아니니 정말 큰일이죠.”
“하긴, 소 공작께서도…….”
“공녀께서도 쓰러지셨다지요?”
“공녀께선 금방 일어났지요. 하지만 연회에서 보니, 얼굴이 말이 아니더군요.”
“모쪼록 쾌차하셔야 할 텐데요.”
“그럼요. 그럼요.”
작은 속삭임조차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듯 힐끔거리는 모양새가 궁상맞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려, 아르네를 쓰러뜨리지 않았나. 시오도르와 함께 이 엘피도르 제국을 세운 아르네. 제국의 검으로 이백 년의 세월 동안 흔들림 없이 제국을 지켜온 아르네. 아르네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그대로일,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무언가로 인식된 지 오래였다. 그런데, 아르네의 가주와 소가주가 쓰러져 눈을 뜨지 못한다니 다들 겁먹고 움츠러들 수밖에. 가린다고 모르나. 그들은 아르네의 기둥을 무너뜨린 것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아르네 공작이 쓰러진 이후, 황실 분위기는 일방적으로 쏠렸다. 길롯 백작이 천박한 소리를 해가며 설쳐도 함부로 한숨도 쉬지 못할 만큼.
“후작님?”
이베트 후작은 보좌관의 부름에 멈춰선 걸음을 떼었다.
“신경 쓰이십니까?”
“안 쓰일 순 없지.”
후작은 자신이 걸어 나온 회의장을 향해 몸을 돌려,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 미련 없이 걸음을 돌렸다.
“가지.”
“네. 마차는 동편에 준비 해두었습니다.”
서편에 마련된 마차 보관소는 회의장과 가까워서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턱에 붐비는 게 일상이었다. 후작이 사람을 꺼리는 것을 잘 아는 보좌관은 그래서 늘 마차를 한적한 동편에 준비 해두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길 한참. 동편 마차 보관소가 보이자 보좌관은 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천천히 오십시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네.”
“네, 각하.”
대답과 달리 보좌관은 숫제 뛰는 수준이었다. 조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보좌관이 사라지고 후작이 홀로 남아 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저벅. 묵직한 소리와 함께 후작 앞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오랜만입니다.”
귓가에 감겨드는 나직한 미성에 고개를 치켜든 후작의 눈에 들어 온건 저보다 한 뼘은 큰, 미남자였다. 햇살에 빛을 뿌리는 은발이 더없이 고아하다. 이윽고 이베트 후작의 나직한 음성이 울렸다.
“레이얼 황태자 전하!”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레이얼은 다만 옅게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