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 그럼, 난 네 취향이고?2021.03.09.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레이얼은 자신이 로이를 다치게 했다는 생각에 자책과 분노를 느꼈었다. 그런데 밤손님처럼 담벼락 뒤에서 숨죽여 기사들의 교대시간을 기다리다보니 자책이니 분노니 하는 것은 정말 티도 없이 사라지고 자괴감만이 남았다.
“하…….”
한반도 거들먹거려 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이렇게 담을 타 넘을 만한 위치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사납게 끝났는데, 먼저 오라고 손을 내민 게 의외라고 생각했더니. 이런 식으로 제 속을 긁어보겠다는 심산이었군.
“하…….”
말로만 전하라고 부르지 실상은 그를 아주 동네 똥개 부리듯 한다.
“고얀 놈. 감히, 공녀가 되어서 황태자인 나를 이렇게 부리다니.”
버릇처럼 중얼거리던 레이얼은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지고한 신분은 그만이 아니었다. 그가 매일 밤 불러들인 ‘로이’는 제국에 하나뿐인 공작가의 레이디가 아닌가. 황녀가 없는 관계로 이 제국에서 캐서린 황후 다음으로 고귀한 여성이기도 했다. 그런 이에게 그는 담을 넘는 정도가 아니라 도둑질까지 시키지 않았나. 심지어 칼부림 끝에 중상을 입기도 했다. 그런데 고작 담을 넘는 정도로 자신이 투덜거려서야 되나. 제 만행을 떠올린 레이얼은 어쩐지 민망해 입을 꾹 다물고는 담을 짚고 몸을 날렸다. 190이 넘는 장신의 남자에게 담을 타 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레이얼은 정식으로 서임을 받은 기사. 타고난 신체조건에 노력이 더해졌으니, 몸놀림이 가볍다 못해 날아갈 수준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아르네 공작가의 잠입이 처음이라는 정도랄까.
“……2층이 어디지?”
레이얼은 잠깐 담 위에서 고민했다. 일전에 아르네 공작가를 정식으로 방문했을 때 1층 현관에 가기 위해 올라가는 계단이 수십 개였다. 지금 그는 건물 뒤편이다. 헷갈리는 건 당연했다. 잠깐, 고민하는 사이 작은 소음이 일더니 창문 하나가 열렸다. 레이얼은 재빨리 나무 그늘이 드리운 어둠 아래로 숨었다.
“아가씬?…… 로지양, 조용히 다니세요. 다른 방에 계시다고는 하나 같은 층이 아닙니까. 시끄러워서 일어나시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요.”
“에반님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아가씨가 얼마나 잠귀가…….”
두런거리던 이야기 소리가 다시 창문이 닫히며 말끔히 사라졌다. 그러나 레이얼은 분명히 보았다. 창문이 닫히기 전, 그에게 곧게 쏘아지던 젊은 집사의 푸른 시선을. 마치, 자신을 알아본 듯한 명징한 눈빛에 절대 조금 전의 대화가 우연이 아님을 깨달았다.
“역시, 보통이 아니라니까.”
레이얼은 작게 웃으며 테라스로 몸을 날렸다. 젊은 집사가 있던 ‘같은’ 층이었다.
똑똑.
“어서 와!”
창문을 두드리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허락이 떨어졌다. 반기는 목소리에 싱긋 미소짓던 레이얼은 문을 열고 들어서던 그대로 잠깐 멈칫했다.
“……그건 대체 무슨 의미지?”
어서 오라는 말과 달리 침대에 반쯤 기대앉은 클로이의 손에는 날이 새파랗게 오른 단검이 두 개나 쥐어져 있었다. 물론 칼날은 그를 향해 겨눠진 상태였다.
“당연히, 전하라고 생각했지만 혹시라는 게 있잖아.”
그를 확인한 후에야 느긋하게 검을 회수하는 모습엔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요는 진심이라는 소리다.
“……어째서 이런 일에…….”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리던 레이얼의 입이 문득 꾹 다물렸다. 굳이 묻지 않아도 클로이가 이런 일에 익숙해 보이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꽤 시달렸나 보지?”
“당연한 거 아니야? 난 여러모로 이유가 충분하잖아. 아르네에 심지어 전하의 피앙세이기도 하지.”
잔혹한 이야기를 잘도 태연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막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였을까. 희고 가는 손가락 끝에서 단검이 뱅글뱅글 도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머리끝이 쭈뼛해지며 소름이 돋는다.
“검은 내려 놔.”
“응?”
다시 한번 손끝에 퉁 튕겨 오른 검이 핑그르르 돌며 시린 빛을 뿜어낸다. 금방이라도 저 시퍼런 날에 여린 살이 찢길 것 같아 레이얼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로이!”
버릇처럼 부르는 말에,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따라붙는다.
“클로이. 조심해야 해. 다들 귀가 밝거든.”
“우선 그것부터 내려놓으렴.”
“아아……. 알았어. 그리고 미안하지만 차는 스스로 준비하겠어? 지금 일어나기가 곤란해서.”
“그러지.”
다기가 스치며 달칵이는 소리와 쪼르륵, 물이 떨어지는 맑은 소리가 몇 번 울리는 것으로 이내 레이얼은 차 두 잔을 준비했다. 심지어 피어오르는 향이 제법 근사하다.
“자, 그럼 이제 이리로 올래 전하? 우리 할 게 있잖아.”
그를 부르며 클로이가 팡팡, 두드리는 곳은 다름 아닌 침대였다. * * *
“에반님 지금 제 말 듣고 있는 거 확실해요?”
“그럼요 로지양. 그리고 미안하지만 목소리를 조금 낮춰주시겠어요? 공작님께서 주무고 계시잖습니까?”
시종일관 상냥한 목소리나 ‘공작’을 발음할 때 에반의 분위기가 순간 서릿발처럼 차갑게 굳었다. 긴 잠을 자는 제 주인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투지가 끓어오르는 모양이었다. 매일 밤 기어들어 오는 쥐새끼들을 상대로 서운하지 않을 만큼 풀어내면서도. 로지는 살기로 번들거리는 에반의 녹빛 눈동자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정말 봐도 봐도 섬뜩하다. 저 성질로 주인을 섬기는 게 가능하다니.
“로지양.”
“예. 에반님.”
“절대 불허합니다. 아르네는 단 한 번도 뒤로 일을 꾸미지 않았어요. 첩자니 하는 것은 아르네와 어울리지 않아요.”
“하지만 에반님. 몰랐다면 모를까, 황후가 아가씨를 노리는 게 분명한데……!”
“덫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까?”
로지 역시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그들은 캐서린 황후가 얼마나 매끄럽게 일을 처리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보낸 염탐꾼이 이렇게 쉽게 잡혔다고?
“그러니까, 사람을 심어두면 보다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잖아요.”
로지의 항변에도 에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걸 바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로지양. 잘 생각하세요. 여태 아르네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르네가 개국 공신이자 시오도르의 혈맹이었기도 했지만…….”
말을 묘한데서 자른 에반이 걸음을 옮겨 창가를 살폈다.
“아르네에게서 그 어떤 트집거리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르네는 원탁 회의에서 말곤 절대 시오도르에게 반기를 들지 않았어요.”
“…….”
“아르네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참으세요. 모든 건 공작님께서 깨어난 후, 처리 될 겁니다.”
사실상의 완벽한 거절이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공작을 두고 기다리라니. 설령 공작이 깨어난다고 해도 공작이 로지의 의견을 들어줄 리는 만무하다. 로지는 큰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에반님, 말을 살살 돌리는 게 꼭 수도 사람 같으세요.”
“상대가 수도 사람인걸요.”
듣고 보니 그럴싸하다. 이걸,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가씨가 따끔하게 한마디 할 때 지지 않을 수 있었는데! 조금 전까지 심각하던 로지의 눈에 문득 생기가 반짝 돌았다.
“에반님 저 차 한 잔만 주세요.”
“나가서 타 드세요.”
“전 지금 너무 대차게 거절당했더니 마음이 아파 차를 끓일 수 없다고요.”
“돌았습니까?”
“한 잔만 주세요.”
돌았습니까. 로지는 에반이 읊는 말을 잊지 않으려 입안으로 한번 따라 했다. 돌았습니까?
“지극히 제정신이야.”
클로이는 밀랍처럼 얼굴을 굳힌 레이얼을 향해 생긋 웃어주었다.
“네가 지금, 나를 시험하겠다는 게 진담이라고?”
레이얼은 다시 없을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클로이는 눈에서 새파란 불이 피어오른 그를 보면서도 절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한술 더 떠 종알거리기까지 했다.
“그럼 내가 뭘 믿고, 전하에게 일임할 수 있지? 유능한 부하씨 덕을 톡톡히 본 시오도르. 말씀해보시죠.”
“내 평생 이런 치욕은 처음이다.”
“그걸 치욕이라 생각하면 곤란해. 가여운 피앙세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좋잖아. 전하는 왜 매번 극단적이야.”
말장난 같이 들릴지 모르나 클로이는 진심이었다. ‘레이디’ 노릇을 그만두라는 레이얼의 말에 클로이는 대안을 요구했다. 제가 빠지더라도 레이얼의 진영에 든든한 도움이 될만한 세력을 끌어오라고. 그러지 않으면 자신은 단독으로라도 움직일 거라고. 지금 레이얼은 새로운 세력이 절실했다. 그런데 그의 제일 효율 좋은 ‘레이디’라는 장기 말을 빼라니? 절대 안 될 소리였다. 하지만 클로이는 레이얼이 어째서 제게 이러는지 알기 때문에 나름껏 절충안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런데 치욕이라니. 진짜 치욕을 맛본 아르네 앞에서.
“난 농담 아니야. 그리고 전하를 모욕하기 위함도 아니야. 전하 나는 아르네답고 시오도르가 시오도르답길 바라는 사람이야. 그래서 하는 제안이야.”
레이얼은 자신을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를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여름 하늘을 닮은 채도 높은 푸른 눈동자는 더없이 곧고 맑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긴 굳은 의지가 너무도 여실해 레이얼은 타협의 여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명령을 설득처럼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어.”
“뭐든 재주는 많을수록 좋지.”
“좋아. 그렇다면 언제까지 답을 주면 되겠어?”
“우리가 말했던 열흘이 지나기 전 답을 줘.”
“뭐?”
조금 말랑하게 풀리던 분위기가 다시 매섭게 굳었다. 클로이의 말은 턱없는 억지였다. 누군가를 포섭해 내 사람으로 만드는 건 하루 이틀만에 되는 게 아니다. 그런 일을 클로이는 지금 고작 며칠 만에 해오라고 주문한 것이다. 불가능에 가까운 주문.
“말해봐 클로이. 넌 레이디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 건가?”
“그럴 리가. 난 내 본업도 바쁜걸. 손 뗄 수 있다면 굉장히 기쁠 거야.”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거지?”
그 말에 클로이는 짧게 웃었다.
“아무도 우리 사정을 봐주지 않으니까.”
“나를 못 믿나?”
“이건 신뢰로 넘길 문제가 아니야. 전하가 이번 일을 뭐라고 불러도 좋아. 억지? 고집? 혹은 행패? 뭐건 간에 내가 더 이상 나서지 않아도 좋을 세력가를 끌어와.”
“하지만 클로이…….”
“내쉬 황자가 눈독 들이고 있다고. 알잖아.”
“…….”
“난, 전하가 밀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라고. 설마 내쉬에게 날 넘길 작정이야?”
“클로이.”
클로이가 한 말에 연푸른 남자의 눈동자가 얼음처럼 시린 빛을 뿌렸다. 엄혹해진 시선이 마치 그녀를 힐난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클로이는 그런 레이얼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단 한 번도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뻗어 매끈하게 뻗은 그의 뺨을 살살 쓸기까지 했다.
“거긴 내 취향이 절대 아니란 말이야. 곤란해.”
웃자고 한 소리였는데.
“그럼, 난 네 취향이고?”
클로이의 손을 움켜쥔 레이얼이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더는 농담이 아닌 눈빛에 클로이가 이를 질끈 깨물었다. 지척에서 뒤엉키는 시선이 무척 뜨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