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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 부하와 피앙세 (53/121)

053. 부하와 피앙세2021.03.05.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부하는 잃을지언정, 피앙세는 무사할 테니까.’

“……정말, 예사롭지 않단 말이야.”

간밤 레이얼이 했던 말이 귓가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진짜, 보통이 아니야.”

절대 곱씹고 싶지 않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도통 떨쳐지지가 않는다. 두근두근두근.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두근거린다. 클로이는 레이얼의 말을 떠올릴 때마다 격렬하게 반응하는 심박에 미간을 좁혔다. 작정하고 붙드는 남자의 말에 꼭 설레기라도 한 것처럼 이게 대체 뭐람. 꼴사납게.

“화내지 마세요. 아가씨.”

“응?”

“얼굴 새빨개지셨어요.”

곁에 있던 로지가 인상을 와락 찌푸리곤, 씩씩거려 보인다.

“내 얼굴이 그렇다고?”

“무슨 일이시길래 이렇게 화를 내세요? 저도 가만히 있는데.”

“기싸움.”

“어머.”

양자간 협박이니 이건 기 싸움이 분명하다. 그런데 로지는 어째서 자신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는 걸까.

“기 싸움 같은 걸 하시다니. 그깟 거로 대체 뭘 한다고. 선수 필승이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침대에 누운 채로 클로이는 작게 탄식했다. 아! 같잖다는 거구나.

“그나저나 아가씨. 몸은 좀 어떠세요?”

“죽겠어.”

“아니, 뭐 얼마나 미련하게 졸라매면 갈비뼈가 부러질 수 있죠?”

로지는 다가와 두껍게 붕대를 두른 클로이를 보며 작게 한숨 쉬었다. 클로이는 코르셋을 무리하게 졸라매 사달이 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아픈 것’은 반드시 알려야 한다는 레이얼의 고집에 서로 한 발짝씩 양보한 결과였다.

‘우리 아가씨가 겨우 그런 거로 기절할 리가 없는데요?’

‘이미 그랬고, 진찰했더니 갈비뼈가 부러져 내상이 좀 있었다는군. 공작저에서 신경을 좀 쓰도록 해.’

레이얼의 깔끔한 한마디 덕에 클로이는 대외적으로 회복할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말했다시피 기 싸움 중이다.

“질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거든.”

“어휴, 정말 멋지시지.”

들고 온 약을 숟가락 가득 따르며 로지가 감탄한 목소리를 냈다.

“자, 의욕 만발 아가씨. 이것 드세요. 거버가 그러는데 딱 보름이면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대요.”

“보름은 무슨, 당장 모레 황실에 가야 하는데.”

로지가 건넨 약을 냉큼 받아마신 클로이가 턱짓했다.

“빨리 낫게 한 숟가락 더.”

“어…… 그럴까요?”

이견이 있을 리 없었다. 넉넉하게 약을 챙겨 먹은 후, 클로이가 로지를 불렀다.

“로지.”

조금 전의 장난스러운 표정은 싹 지운 채였다.

“간밤 나들이는 재미있었어?”

“그냥 넘기시면 안 돼요? 너무 아는체하는 주인도 매력 없어요.”

“그럼 대충 눈감고 에반에게 귀띔해두면 되겠어? 우리 로지양께서 단신으로 황실을 들락거렸다고 말이야?”

“……가끔 아가씬 굉장히 악독한 것 같아요.”

“알면 빨리 털어놔. 왜 간 거며, 어딜 간 거며, 누구 때문인지. 그리고 뭘 알아낸 건지.”

요만한 빈틈도 없는 클로이의 질문세례에 로지가 어깨가 들썩이도록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럽게 환복을 요구하기에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황후 때문일 줄이야.

“예쁜 시오도르는 나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황가에서 아르네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그런데 황자와 옷을 맞추기 위해, 사람을 보내 염탐을 했다고? 이 무슨 수줍고 귀여운 작당질이지? 클로이의 머릿속에 황후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시종장을 제거했다는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건 애교였다. 길롯은 제 이득을 위해선 멀쩡한 마을도 수장시켜버렸고, 빈민가도 밀어버렸다. 그런데 시종장 하나 해치운 게 무슨 큰 감흥이 있겠나. 심지어 황후의 수하였으니, 더더욱 알 바 아니다. 난, 아르네가와 시오도르 하나 챙기기도 바쁘다고. 클로이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 턱을 쓸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레이얼과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들은 나름껏 ‘기싸움’ 중이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숙이고 들어가고 싶진 않은데…….

“하, 이거 어쩌지.”

고민하던 클로이는 문득 시선이 창가에 세워둔 새장에 닿았다.

“오! 짹짹이! 그래 네가 있었구나.”

말 끝나기 무섭게, 마치 알아듣기라도 한 듯 짹! 하는 소리가 난다. 클로이는 곧장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한번 터졌던 상처다. 시간은 착실히 줄고 있었으니, 쉴 수 있는 동안 정말 꼼짝하지 않고 상처를 회복시킬 작정이었다. 설렁줄을 당기자 마자 거의 즉시라고 할만큼 빨리 달려온 로지를 보며 클로이가 생긋 웃었다.

“나, 펜과 잉크 그리고 전서구용 편지지와 쟤 좀 잡아 와 봐.”

“……뭐하시게요?”

“척 보면 몰라? ‘그’ 일이잖아.”

“몸이 이 지경이 됐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자꾸 이러시면, 저 실수인 척 쟤 구워버릴지도 몰라요.”

눈에 불이 올라 위협해본들 클로이는 로지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누가 뭐래? 나도 쉴 거야. 그러니까 쟤 좀 잡아 와 봐. 못 간다고 말해놓게.”

“이참에 아예 그만둬버리면 정말 좋겠네.”

“혼잣말인 척 크게 소리 내서 말하지 말고.”

“이거 요새 수도에서 유행하는 건데 모르시는구나.”

“퍽이나.”

툴툴거리면서도 로지는 재빨리 움직였다. 침대 위에 작은 테이블을 올려주고 클로이를 반쯤 일으켜 등 뒤로 쿠션을 잔뜩 집어 넣어주었다. 종이, 펜, 잉크까지 모든 준비가 끝나자 클로이가 종이에 대고 짧게 몇 마디인가를 썼다. 그리고 종이가 마르자마자 새를 잡아다 발목에 묶어 날려버렸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자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였다.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에요?”

“뭐가. 또.”

“하던 일을 빠지는 건데, 그래도 좀 사정 설명도 하셔야죠.”

“로지, 수도 생활이 좀 길었구나? 북부에서 언제 그런 걸 따졌다고?”

한마디에 로지의 입이 꽉 다물렸다. 북부인은 북부인다워야 한다. 벌써 수도에 머문 지 두 달째. 유례없이 길어진 수도살이에 자신도 모르게 수도에 물든 모양이었다.

“조심하겠습니다.”

말을 돌리고, 넌지시 떠보며 상대를 시험하는 사이 북부에선 생사가 갈린다. 언제나 내용은 정확하고 곧게. 나쁜 버릇이 붙어버렸다. 아르네라 불리는 것을 즐기지 않으면서도 그 누구보다 아르네다운 공녀. 로지는 클로이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심하세요.”

간밤 황궁에 잠입한 그녀의 시야에 든 사람 중 그 누구도 정상은 없었다. 사방이 미치광이들로 가득한 곳에서 돌아오며 로지는 다짐했다. 혹시라도 황후가, 황자가 제 작은 주인에게 손을 뻗는다면 그땐 정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두 끝장내버리겠다고. 이건 제 작은 주인을 위한 염려이자 충성이며 경고이기도 했다.

“내 걱정은 마. 난 본업이 따로 있는 아르네잖아.”

“…….”

“곧, 공녀가 아니라 모두의 귀염둥이로 돌아갈 거니까, 괜히 인상써가며 심각하게 굴지 마. 로지도 이제 주름에 슬슬 신경 쓸 나이라고.”

“제 걱정은 마세요. 아시다시피 가죽 손질에 일가견 있어서 그런 건 문제도 아니에요.”

“하긴.”

남들이 들으면 기겁할 말을 진지하게 덕담처럼 주고받는 이들을 비추는 햇살이 잔뜩 기울어 붉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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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파. 문병 와. 몰래. 내 침실은 알고 있지?

분명 글자인데 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든다. 아니, 표정도 보이는 것 같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잔뜩 부어터진 표정을 해선 목소리는 거만할 거다. 레이얼은 ‘로이’가 보낸 편지를 쥐곤 옅은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이야기를 마무리 짓지 못 하고 헤어져 내내 속이 답답하던 차였다. 만나러 오라고 해주어서였을까. 아직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내내 꽉 막힌 것 같던 속이 조금 트이며 호흡이 훨씬 수월해진다.

“고얀 놈.”

레이얼이 이젠 입에 밴 소리를 중얼거렸다. 아직 감정은 하나도 풀리지 않았는데 어째서 웃음이 나는진 모를 일이었다.

“전하, 그냥 제가 기특하면 기특하다! 미안하면 미안하다! 해주세요. 그게 뭡니까.”

문득, 이상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자 키릭슨이 보인다. 아마도 결재 서류를 들고 오던 중이었던지 하얀 종이 뭉치를 쥔 키릭슨이 질린 표정을 짓고 서 있다.

“……그, 서류 결재받기 싫은가 봐?”

“그럴 리가요!”

헛소리를 하면 반드시 응징해주겠다는 기운을 풍겼더니 키릭슨이 달려와 내던지듯 서류를 내려놓았다.

“정말 사인만 하면 되게 제가 성심성의껏 준비했답니다.”

“그거야 내가 보고 결정할……. 이게 뭐지?”

레이얼이 집어든 건 기사단에서 올라온 보고서였다. 키릭슨이 다가와 보더니 살짝 우쭐거리는 표정으로 설명했다.

“뭐긴요. ‘레이디’를 생포하기 위해 나갔던 기사들이 올린 보고서지요. 전하, 전 정말이지…….”

“레이디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잔뜩 흥분한 키릭슨과 달리, 길쭉한 손가락으로 문서 어딘가를 짚은 레이얼의 표정은 무척 서늘했다. 하지만 키릭슨은 레이얼이 짚은 기사의 ‘공적’에 조금 더 들떠, 그만 제 상관의 얼굴이 얼마나 차게 굳었는지를 미처 살피지 못했다.

“예예.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쩌다가?”

“이따가 보시면 아시겠지만, 홀켄 백작저의 사병은 진작에 나가떨어지고 황실 근위대랑 우리쪽 기사가 레이디를 궁지에 몰았는데요.”

“그랬는데?”

“서른 명의 기사에 둘러싸여, 퇴로를 차단당한 레이디가 그랬답니다. 엎드려!”

“엎드려?”

“자신을 점잖게 대해준 우리 기사들에 대한 보답이라며 속임수를 쓴 거지요.”

키릭슨은 그 뒤로도 마치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열과 성을 다해 떠들어 댔다. 대다수는 과장이었겠으나, 레이얼은 그의 기사가 창문을 향해 몸을 날린 레이디의 옆구리에 검상을 냈다는 대목에서 눈을 가늘게 늘였다.

“그게 누구라고?”

“아, 그게…… 어디 있지?”

키릭슨은 마구 서류를 넘겼으나 그 어디에도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맞다! 단장님이 이건 개인의 공적으로 돌릴만한 일이 아니라고 함구하라고 하셨대요.”

“……그렇군.”

“상이라도 내리실 작정이셨어요? 아쉽지만 기사는 단장님의 관리하에 있어서 아무리 전하라 하셔도…….”

“운이 좋아.”

“아, 뭐 운도 운이고 실력도 실력이죠.”

‘지금 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

작정하고 감추던 클로이와 고지식한 단장이 묻어버린 그 이름.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운이 좋았다.

“정말, 억세게 운이 좋군 그래.”

마치 이를 갈 듯 나직이 읊조린 소리가 영, 음산하다. 키릭슨은 다 잡은 레이디를 놓치고 이를 벅벅 갈아대는 레이얼을 보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겠지. 이번 기회에 황제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을 기회인데.

“이미 지난 일이에요. 전하.”

키릭슨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사납게 눈을 번뜩이는 레이얼을 달래려 애썼다.

“그러지 말고, 산책이라도 하시죠? 날이 쌀쌀한 것이 불어오는 바람이 어찌나 차가운지. 들이켜면 속이 후련하답니다.”

“…….”

“어서요.”

키릭슨의 말에 레이얼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산책이 길어질 것 같으니, 자네는 이만 가봐.”

산책을 권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그런데 키릭슨은 지금이라도 그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져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산책하러 간다는 레이얼의 표정이 결투하러 가는 사람보다 훨씬 흉흉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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