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 더욱 은밀히, 아무도 몰래2021.03.02.
결과적으로 레이얼이 따라온 건 클로이에게 잘된 일이었다. 만약 로지와 한 마차를 타고 왔다면 분명히 상처를 들키고 말았으리라. 향수를 무겁게 뿌려 겨우 감추었으나, 상처가 터지며 피가 새버렸다. 같은 제1 사냥꾼이라 해도 그 안에서도 당연히 급이 나뉘는데 로지는 클로이가 넘볼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레이얼도 후각이 예민하다고는 하나 로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타고난 사냥꾼과 한 마차를 타고 온다고? 제 향수를 열두 켜가 아니라 열두 병을 부어도 들켰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레이얼의 에스코트는 정말 시기적절했다. 생각해보니 새삼 고맙다. 그런데, 너무 빤히 바라봤던 걸까. 에스코트하는 척 그녀를 부축한 레이얼이 시선을 느낀 듯 불현듯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왜?”
“고마워서.”
생각지 못한 인사였다는 듯, 그의 표정이 일순 흐트러졌다. 매끄럽던 얼굴이 잠깐이었지만 깨지며 눈꼬리가 불긋하게 달아올랐다.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는 미인이라니! 아, 정말이지. 나쁜 상상을 하게 하는 얼굴이다. 클로이는 머릿속에 떠오른 이런저런 생각들을 떨쳐버리기라도 할 듯 거칠게 머리를 털었다.
“어지럽나?”
미간을 찌푸린 채 머리를 내젓는 모습을 오해한 듯 레이얼이 클로이를 바짝 끌어다 붙였다. 제게 더 기대라는 뜻이었을 테지만, 클로이는 옆구리를 따라 완벽히 밀착한 모습에 그만 한껏 당황하고 말았다. 정말 요만큼의 사심은커녕 오직 선심만 가득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전하. 저기…….”
두근두근두근. 머릿속에서 심장이 쿵덕거리며 뛰어댄다. 딱히 그에게 엉큼한 생각이 들어서가 아니다. 분명히, 그렇다 이건 당황해서다. 이런 식의 친밀한 접촉은 처음이니까. 클로이는 고장난 듯 난리를 부리는 제 심박을 그렇게 정리했다. 그런데 놀란 마음이 가라앉았는데도 쿵쿵거리는 심박이 여전하다. 어, 이거 뭐지? 이상을 클로이만 느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주기적으로 그러는 것 같은데……? 맞나?”
“응. 그런 거 같아 왜 이러는 거지? 상처가 잘못된 거면 계속, 그리고 점점 더 안 좋아져야 하는데. 그거랑은 다른 거 같아.”
“……일루미넴 말고 뭘 먹은 게 있나? 혹시 상극인 것을 먹어서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2층이었다. 클로이는 침실 곁에 딸린 작은 응접실로 그를 끌었다.
“차?”
“아, 나는…….”
“미안하지만 전하 스스로 준비해주겠어?”
“내가?”
“시간 좀 벌어줘.”
제 옷을 가리키며 하는 클로이의 말은 의도가 뻔했다.
“안 돼, 시녀를 불러. 혼자서 하려다 상처가 덧나면 어떻게 하려구.”
그러나 클로이는 레이얼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시녀를 부르라니. 무슨 그런 큰일 날 소리를.
“공작저의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돼. 로지랑 에반이 이 사실을 알면 정말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야.”
클로이는 차례로 제게 ‘반역’을 읊던 둘을 떠올리며 잘게 떨었다. 지금까지 버텨온 게 아까워서라도 절대 반역은 두고 보지 않을 작정이었다.
“여태 대충 혼자서 했단 말이야. 전하가 시간만 끌어주면 오늘도 무사하다고.”
“……싫다면?”
마주한 레이얼에게선 장난기라고는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늘한 눈빛은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클로이는 문득 그가 낯설어 내내 움켜쥐고 있던 팔뚝을 놓아버렸다. * * * 눈치 없이 따라붙는다고 실컷 욕했는데.
“미안합니다.”
로지는 아가씨를 데리고 공작저로 들어간 황태자의 뒷모습에 대고 작게 사과했다. 황태자 덕분에 은밀히 움직일 시간을 벌었다. 체드릭에게는 더 이상 추격은 없다고 딱 잘라 말했으나, 사실 로지는 절대 침입자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어딜 감히 아르네를!’
아가씨에게서 죽여도 좋다는 허락까지 떨어졌는데 곱게 놓아준다면 로지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로지는 클로이와 황태자가 본채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은밀히 별채로 향했다. 오래지 않아 검은 인영 하나가 소리 없이 공작저를 벗어났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소름 끼치도록 적막한 방안에서 내쉬는 의자에 기대앉아 속삭였다. 딱히 답을 바란 건 아니었던지 그의 시선은 천장에 매달린 화려한 빛을 뿌리는 샹들리에에 매달린 상태였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건, 확실하지 않은 거야. 변수, 변덕같이 예상을 벗어나는 건 더더욱!”
변수, 변덕. 단어를 하나씩 입에 올릴 때마다 내쉬의 표정은 섬뜩하게 변했다. 버럭 소리를 지르는 내쉬의 목덜미엔 푸르게 돋은 핏대가 선명했다. 샹들리에를 바라보던 내쉬는 문득, 고개를 떨궈 바닥으로 시선을 깔았다.
“어째서 ‘변수’ 따위에 휘둘려서 나를 곤란하게 하는 거야.”
내쉬의 시선이 닿은 곳엔 머리를 조아린 시종장이 있었다. 그는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상태가 온전하지 못했다. 고급 옷감으로 지은 옷은 갈가리 찢겨 있었고 찢어져 벌어진 옷감 사이로 비치는 살은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험하게 매를 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해서도 시종장은 신음 한번 흘리지 않았다. 숨소리도 조심스럽게 풀어놓을 뿐.
“파란색이라고 했잖아.”
내쉬의 어조는 추궁에 가까웠다.
“덕분에 내가 오늘 꼴이 얼마나 우스워졌는지 알아? 네 바보짓만 아니었어도 오늘 순순히 물러날 이유가 없었어.”
물큰물큰 풍기는 단내를 참아가며 억지로 스텝을 밟아야 할 이유도 없었겠지. 사람들의 눈에 스치던 옅은 경멸을 참아야 할 이유도 없었겠지. 생각하니 다시 속이 끓는다. 하지만, 내쉬는 붉게 물든 채찍을 다시 휘두르지 않았다. 죽이면 곤란했다. 저건 어머니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붙이려면 제대로 된 것으로 보내라는 무언의 항의. 적어도 원하는 것을 말만 하면 된다는 말을 할 정도면, 이런 머저리를 가져다 놓진 말았어야지.
“아 참, 그러고 보니 말했나? 내가 두 번째로 싫어하는 거.”
이번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무능한 자.”
“…….”
“무능한 자는 역겨우니까 가서 치우라고 해. 대답.”
“네.”
시종장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뻔히 알면서도 공손한 목소리를 냈다. 자신은 황후궁에 들어가 이 메시지를 전하고 나면 아마 그대로 궁 밖으로 내쫓길 것이다. 다른 이들이 그랬듯 빈털터리가 되어서.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뿐이었다. 살아만 있다면 돈은 언제든 다시 벌 수 있으니까 정말이지 괜찮았다. 시종장은 머리를 한껏 조아려 내쉬 황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꺼지라고 굳이 말해줘야 해?”
“아닙니다.”
시종장은 기다리던 축객령이 떨어지자마자 잽싸게 움직여 궁을 빠져나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끔찍하게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황후궁을 향해 움직이는 그는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속도를 떨어뜨리지도 않았다. 지금은 내쫓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을지 몰라도 눈 한 번 깜빡일 사이 다시 바뀔지도 모른다. 이건 헛된 망상이 아니다. 바로 삼 년 전 그런 일이 있지 않았나. 그의 전 시종장이 바로 그 경우였다. 지금의 그와 똑같은 상황에 있던 전 시종장은 내쉬 황자의 때아닌 자비로움에 넋이 빠진 그는 몇 번이고 절을 했다. 바닥에 이마를 쿵쿵 박아가며 자비로운 주인이라고 쉬지 않고 떠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내쉬 황자는 귀가 예민해서 시끄러운 소리를 도통 참지 못했다. 결국, 쿵쿵거리던 전 시종장은 살아 나오지 못했다. 시종장은 자신의 첫 임무를 떠올렸다. 바로 전 시종장을 은밀히, 그리고 완벽하게 치우는 게 그의 첫 일이었다. 그는 그 일을 훌륭하게 해냈고 삼 년을 버텨왔다. 오늘의 일은 아쉽지만, 그는 살아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황후궁에 들러 메시지를 전하고 궁을 빠져나가야 하니 오늘은 꽤 고단하고 바쁠 것이다. 그의 발걸음에 점점 더 속도가 오르기 시작했다. * * * 그러나 시종장은 황후궁 밖으로 두 번 다시 나오지 못했다. 궁에서 소란이 일었던 건 아주 잠깐이었다. 내쉬 황자의 궁으로 새로운 시종장이 보내졌으나, 아무도 그를 서먹하게 대하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봐온 사람들처럼 대했다. 3년 전 그날처럼. 그렇게 황자궁의 시종장 이야기는 묻혔다.
레이얼은 아르네 공작저에서 돌아온 후 다시 두문불출했다.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던 것도 잠시. 연이틀을 꿈쩍도 하지 않고 궁에 처박힌 그를 어쩔 수 없으니 관심은 오래지 않아 흩어지고 말았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레이얼은 은근하던 시선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곤 키릭슨을 불러들였다.
“그래서 그 일은 잘 해결되었나?”
“해결이고 말고 할 게 뭐 있겠어요. 황후궁으로 보낸 시종장이 사라졌으니 황후 폐하께서 내쉬 황자님께 새 시종장을 내어준 것으로 끝난 것을요.”
“저런? 죽은 이만 안타깝게 되었군.”
“글쎄요. 전 세상에서 제가 제일 안쓰러워서.”
지난 이틀 황실을 뜨겁게 달군 일을 보고하는 내내 키릭슨은 부어터진 얼굴이었다. 레이얼은 보란 듯이 입을 씰룩이는 키릭슨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별로 귀엽지 않으니 그만하는 게 어때? 그리고 난 귀여운 게 취향은 아니라서.”
“귀여워 보이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정말 눈이 어떻게 된 건 아니세요? 이건 화난 거잖아요. 항의하는 거라고요!”
“항의?”
“항의요. 항의! 연회가 열리는 내내 저를 격무에 시달리게 하는 전하를 향한 항의.”
“어째서지? 연회를 갈 바에야 일을 하겠다고 한 건 바로 키릭슨 자네였잖아.”
“농담이었잖아요 전하.”
기가 찬다는 듯 키릭슨이 ‘항의’했으나 돌아온 건 싸늘한 코웃음이었다.
“네가 언제부터 나와 농담을 할 위치가 되었지?”
“……오늘 기분 안 좋으세요? 왜 이렇게 예민하세요? 그러고 보니 좀 초조해 보이기는 것 같기도 하고요.”
“전부다니까. 이만 나가봐.”
“예.”
키릭슨은 기분이 나쁘다는 주인에게 미련하게 매달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가라는 말에 냉큼 물러난 그가 레이얼을 향해 주먹을 쥐어 보였다.
“뭔진 모르겠지만 힘내세요!”
“……가.”
“예, 전하.”
키릭슨이 물러나고 난 후 레이얼은 그나마 형식적으로 짓던 미소마저 싹 지워버렸다.
“하아, 저 고집쟁이를 진짜 어쩌면 좋지.”
지금 그의 머릿속엔 클로이가 했던 말로 가득 차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싫다면?’
‘농담 아니야 전하. 내 정체를 들키는 순간 반드시 전하를 후회하게 해줄 거야. 그렇게 되어도 좋겠어?’
‘협박인가?’
‘경고지. 아니 안내지. 부하를 빼앗겨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하고 여쭙는 거야.’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부하는 잃을지언정, 피앙세는 무사할 테니까.’
그의 말에 클로이가 입을 길게 늘여 웃었더랬다.
‘누가 그래?’
‘뭐?’
‘누가, 얌전히 있겠다고 했느냐고. 난 만약 그렇게 되면 더욱 은밀히 움직일 거야. 아무도 몰래. 그게 좋다면 어디 해봐.’
‘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