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나의 레이디에게 전하는 구걸2021.02.26.
가여운 피앙세를 위해 기꺼이 십 년간 홀로 추모한 남자였다. 처음 만난 그녀에게 요구한 것이 ‘마지막 피앙세’가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다른 것도 아닌 생존을 부탁할 만큼 궁지에 몰린 가여운 사람.
“……전하.”
그런 남자에게 상처 입은 모습을 들키고 말았으니 이러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불안한 남자 앞에서 다시 숨이 가빠오는 게 느껴진다. 낭패였다. 슬쩍 이를 악물어 참아보려 했으나, 번번이 밭은 숨이 터지며 헐떡이는 소리가 새고 만다.
“조금만 버티면, 금세 도착한다.”
아니나 다를까, 레이얼의 얼굴이 단번에 희게 질렸다.
“……우리 집 가는 길을 내가 모를까 봐.”
달래주어야 하는데, 나는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안심시켜주어야 하는데 길지도 않은 한 문장을 말하기가 이토록 벅차다. 아무래도 몸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감각이 차단되어 괴롭진 않으나 가슴이 서늘해진다.
“앞으로 삼십 분은 더 가야 할 텐데 숨이 달리면 내가……줄까?”
“응?”
말이 뭉개져서 제대로 들리지 않아 되묻자 레이얼의 귀 끝이 발갛게 물들었다.
“풀어 줄까? 옷.”
……뭐요? 잠깐 이해가 되지 않아 눈만 껌뻑이던 클로이도 한박자 늦게 얼굴이 새빨개졌다.
“미, 미쳤어!”
“지극히 냉정한 판단이야.”
낮춰 소리 지르느라 호흡을 크게 해서일까. 허덕이던 숨이 오히려 차분하게 진정되기 시작했건만, 한껏 집중한 두 사람은 그만 그 사실을 놓쳐버렸다.
“한번 해봤으니, 잘할 수 있다.”
“지, 지, 진짜 이분이 큰일 낼 분이네! 말이 왜 그래!”
“말이 왜 그렇……아! 아아.”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렸던 레이얼의 눈빛이 별안간 짓궂게 변했다.
“내 말이 어디가 어때서?”
“뭐가 어때서야! 밖에서 들으면 충분히 오해하기 좋은 말이잖아!”
“위에 올라타고 손목을 결박했다던 말보다?”
그제야 클로이는 레이얼의 갑작스러운 능글맞음을 이해했다. 쪼잔하긴!
“전하 사람이 그러면 못써.”
“내가 어디가 어때서?”
“배포가 커야지. 지난 일을 하나하나 가슴에 품고 말이야 그걸 이런 식으로…….”
“이런 식이라니. 충고를 따르고 있잖나.”
“무슨 충고.”
이를 악다문 소리에 레이얼이 입꼬리를 길게 늘이더니 속삭였다.
“가슴에 새길 소리. 아내의 말을 잘 들으라고 누구씨가 내게 몇 번이고 다짐해주지 않았나?”
클로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영리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좋은 기억력을 이렇게 과시하나!
“안 그래, 레이디?”
로이라 부를 수 없으니 레이디라 부르며 그날 일을 들먹이는 건 분명 치사했다.
“아아…….”
발끈 화를 내야 하는데, 길쭉한 눈매를 곱게 접어 웃는 레이얼의 표정이 다디달아 그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졌다. 클로이는 자신의 패배를 깨끗하게 받아들였다. 능글맞은 말을 해도 사람을 설레게 하는 저 얼굴이 어떻게 되지 않는 이상, 이길 방법은 없다. 클로이는 자신이 새삼 미인에 약하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전하, 그런 얼굴은 반칙이지 않나?”
“레이디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뭐든 못 할까.”
“저, 저, 저!”
바람둥이나 할법한 소리를 태연히 속삭이는 레이얼의 모습에 조금 진정되는 것 같던 클로이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파르르 떨었다.
“적당히 하라니까!”
“안간힘을 다하고 있어.”
그를 향해 곧게 뻗은 손가락을 부드럽게 감아쥔 레이얼이 살짝 웃었다.
“그대를 홀리려, 정성을 들이고 있다고. 레이디 아르네.”
“그대라니! 갑자기 왜 그래!”
정중하고도 나긋한 말에 클로이는 등골이 오싹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데도 말이다.
“왜 그러긴, 마지막 피앙세가 되어 달라고 애원하는 거야. 아니, 그대 말처럼 구걸이라고 할까.”
구걸이라는 소리에 클로이는 침음을 흘렸다. 이번엔 콰이펄른 때의 일을 들먹이는 거냐.
‘구걸한다고 해. 이러다 정말, 혼자가 될 것 같아 구걸한다고.’
캐서린 황후를 속이기 위한 허울 좋은 핑계였다는걸 그도 알고 자신도 아는데 그걸!
“전하, 자꾸 이런 식으…….”
“구걸하고 애원할게. 뭐라도 좋아. 내 마지막 피앙세가 되어줘.”
반쯤의 장난과 반쯤의 진담이 섞인 말에 클로이는 이맛살을 구겼다. 구걸이라니. 그의 입을 통해 듣는 처량한 단어에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전하, 이미 말하지 않았어? 난 전하의 신부가 될 거라고.”
“그건 아르네가 시오도르에게 한 이야기였지.”
“아아…….”
그런 거였나. 어째서 이렇게 처량한 소리를 하나 했더니 그는 지금 ‘클로이 아르네’와 ‘로이’ 모두에게서 답을 달라고 하고 있었다.
“난 영원히 내 편일 그대에게 한편이라고 인정받고 싶어.”
“뭘 그렇게 거창하게.”
“걱정을 불신이라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사이가 되고 싶어.”
“전하, 그때는 사정이 그럴 만했잖아.”
“지금이라고 해서 달라졌나?”
질문은 길지 않았다. 말씨는 점잖았고, 목소리는 다정했다. 그런데 클로이는 마치 기습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푹.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송곳에 가슴이 깊게 찔린 듯, 뜨끔하니 아팠다.
“나는…….”
“나는 네가 날 완전히 믿지 않았다는 걸 알아.”
사랑을 구걸하는 얼간이처럼 굽신거리던 남자는 얼굴에서 미소를 싹 지웠다. 드러난 민낯은 덤덤하고 창백해 씁쓸해 보였다.
“아니라고 하지 마.”
“아니야.”
“아니야. 로이. 네가 날 전적으로 믿었다면, 나를 진짜 네 편이라 여겼다면 힘들었을 때…….”
말을 하던 레이얼이 이를 악문 채 숨을 길게 뿜었다. 후. 잇새로 터지는 숨소리가 무겁다.
“숨기지 말았어야지.”
“전하, 그건 걱정할까…….”
“정말 말 안 들어.”
눈을 내리깔아 시선을 맞댄 레이얼이 짧게 웃었다.
“거짓말 못 한다니까. 믿어, 정말 못해. 차마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울 정도야.”
레이얼은 클로이의 핑계를 단호하게 쳐냈다.
“클로이 아르네, 아니 로이. 내가 궁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나?”
“…….”
“늘 내게 진실 같은 거짓을 고하는 사람들 틈에서 살고 있단다.”
더는 같잖은 거짓말을 봐주지 않겠다는 에두른 경고에 클로이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넌,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내게 알리지 않았겠지.”
“…….”
“일이 끝나면 결혼한댔나? 그대는 끝까지 날 속일 작정이었어.”
“전하, 난 아르네야.”
몰아세우는 건 레이얼이었는데 상처받은 표정 역시 그가 짓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입이 바짝 말라, 클로이는 혀로 입술을 축이고 나서야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난, 아르네야. 시오도르를 섬겨야 하는 아르네. 시오도르의 변심은 변덕이라 치부되지만, 아르네의 변심은 반역이 돼.”
“……비난하려던 게 아니야.”
쥐고 있던 클로이의 손을 끌어 당겨 조심스럽게 입을 맞춘 레이얼이 속삭였다.
“네가, 날 못 믿는 걸 이해해. 그러니 노력하는 나를 밀어내지 말아 달라는 말이 하고 싶었어.”
이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덧붙인 마지막 말이 한숨인 양 희미했다.
“난, 네 편이야. 네가 누구이건 간에. 믿어줘.”
연이어 내리 이틀을 연회에 참석한 레이얼 황태자는 어딜 가도 화제였다.
“대체 무슨 일일까요? 오늘도 오실 줄은 몰랐는데.”
“글쎄요.”
파닥파닥. 바쁘게 움직이는 쥘부채 뒤로 쉬지 않고 이야기가 쏟아졌다.
“뭐, 사실 아르네정도면 황태자 전하께서도 굽히고 들어갈 만하지 않아요?”
“굽히고 들어간다니요?”
“요새 형편이 좀, 그러시잖아요.”
둘러둘러 속삭이는 말이나, 자리에 있던 이중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화려한 부채 뒤에 숨은 눈동자로 연회장을 훑은 백작 부인이 삐죽한 목소리를 냈다.
“어쩜, 그러고 보니 여기엔 정말 아무도 없네요.”
연회장을 메운 인파는 길롯의 직계와 방계, 혹은 길롯 백작에게 연을 대보려 애쓰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그중 레이얼 황태자를 지지하는 가문은 정말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남은 건 중립을 지키는 이들 몇이 유일했다. 하지만 저들은 절대로 레이얼의 편에 서주지 않으리라. 중립파의 수장이자 제국의 검이라는 별호가 있던 아르네 공작이 이번에 어떻게 되었는지 다들 보지 않았나.
“이베트 후작 각하는 어떨까요?”
레이얼 황태자의 외조부를 콕 찍어 하는 질문에 부채를 팔랑거리던 백작 부인이 코웃음을 쳤다. 입을 한쪽만 비틀어 보란 듯이 비웃음을 지어 보인 그녀는 한심해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제랑드 자작 부인.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줄리아나 황후 폐하께서 승하하신 후 혼자 된 레이얼 전하를 제일 먼저 내친 건 바로 이베트 후작 각하세요. 그런데 이제와서 힘이 되어줄 리가 없잖아요.”
“참, 비정하기도 하지.”
제랑드 자작 부인이라 불린 여자가 연신 혀를 차며 연회장 한쪽에서 대화중인 이베트 후작을 흘겼다.
“정말 피도 눈물도 없네요.”
“말조심하세요.”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은 백작 부인이 다소 당황한 목소리로 자작 부인의 입을 단속했다.
“벌써 두 번이나 이쪽을 보셨다고요.”
“어머나.”
다시 파닥파닥, 부채가 쉬지 않고 펄럭이는 소리가 울렸다. 한참 동안 그들 사이에선 말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핏덩이 같은 제 혈육도 내친 자가 아닌가. 감히 건방을 떨다 엮이기라도 하면 정말 끔찍한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 화려한 은발을 한 노신사가 역병이라도 되는 듯 부인들은 부채 뒤에 숨어 한참이나 나오지 않았다. * * * 나쁘진 않았으나 공기가 무겁다. 클로이는 말이 다그닥 거리는 소리만이 유일한 가운데 이어지는 침묵에 몸을 틀었다. 어색한 건 도저히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번 일은 장난스럽게 잘 넘길 수가 없었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장난스럽기라도 했다면 빈틈을 놓치지 않고 이 무거운 분위기를 단숨에 바꿔버렸을 텐데. 시종일관 처연한 표정을 짓는 미인 앞에선 숨 쉬는 듯 자연스럽게 터지던 경박한 농담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다. 사실 그에게 잡힌 손이 신경 쓰여 도통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와, 이거 어쩌나. 마차 의자에 누운 그대로 눈만 굴리던 그때 레이얼이 입을 열었다.
“왜, 손 떼?”
“응?”
마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듯한 말에 클로이는 펄쩍 뛸 만큼 놀라고 말았다.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아…… 뭐.”
“신경 쓰이면 손 놓을까?”
그러나 금방이라도 손을 놔줄 것 같은 말과 달리 레이얼은 오히려 손가락을 촘촘하게 얽어왔다. 두 손이 단단히 깍지껴져 제대로 달라붙었다. 오히려 조금 전보다 자세가 더 은근해졌다. 손가락 하나만 잡혀서도 신경이 쓰였는데, 이제 손을 다 얽어버렸다고? 맞닿은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에 클로이는 머리끝까지 다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웬만하면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더는 무리였다.
“전하, 그거 말하고 행동이 너무 다른 거 아니야?”
레이얼은 클로이의 말에 민망해하는 대신 생긋 웃었다.
“잊었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고 했잖아. 떨쳐내기 전에 미리 매달리는 거야.”
태연한 구걸에 이번에도 클로이의 입이 콱 막혀버렸다. 결국 클로이는 공작저에 도착할 때까지 그와 얽힌 손을 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