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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 신부가 되어주기로 했잖아 (50/121)

050. 신부가 되어주기로 했잖아2021.02.23.

로지는 클로이를 보자마자 인상을 왈칵 구겼다. 대체 뭘 하고 온 건지 클로이를 스치고 불어오는 바람에서 피비린내가 풍겼다. 평소라면 클로이가 누구와 함께 있건 간에 은밀히 다그쳤겠지만, 로지는 입을 씰룩이면서도 모르는 척해주었다. 궁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 작은 주인의 표정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피로에 전 낯빛이야 푸르스름하게 질린 그대로였으나, 새파랗게 얼었던 눈동자가 부드럽게 풀려 예쁘게도 빛이 났다. 제 주인의 속이 풀린 것 같으니 일단은 넘기자고 생각했다. 다치고 왔다면 거버가 치료해줄 테고, 소중한 아가씨에게 상처 입힌 녀석은 자신이 응징해주면 되니까. 그래서 로지는 피 냄새에 코끝이 찡하게 울리는 것을 무시하고 클로이와 황태자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넸다.

“귀택하시겠습니까?”

“응.”

“그럼 마차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마부가 말에게 먹일 물을 얻으러 잠시 자리를 비웠……. 레이얼 황태자 전하?”

유능한 시녀의 얼굴로 사정을 양해를 구하던 로지가 마차에 오르는 레이얼의 모습에 바보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아아, 자네는 마부와 함께 앉게.”

앉을 자리가 없을까 봐 부른 것인 양 태연하게 좌석을 지정해준 그는 그대로 마차에 올라 문을 탁 닫아버렸다.

“이게 무슨……?”

로지는 어버버거렸다. 같이? 이 밤에? 그 어느 것도 어려운 단어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저 둘을 붙여놓자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 밤에 같이?”

조합 위치를 바꿔도 이해가 되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꾹 닫힌 마차 문을 바라보던 로지는 옅은 한숨을 쉬며 걸음을 옮겼다. 이러나 저러나, 황태자가 가겠다는데 그녀가 말릴 수 있을 리가 있나. 체념한 듯 마부, 체드릭을 찾아 나선 로지는 기어이 작게 투덜거렸다.

“아가씨께서 연회 끝나면 문을 닫아건다고 했는데, 정말 운도 억세게 좋지.”

내색하지 않아서 그렇지 아르네가의 가신들은 모두 시오도르라면 모두 이를 갈고, 길롯이라면 칼을 갈 정도로 치를 떨었다. 다들 황태자가 반 황제파의 세력을 이끌며 고군분투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시오도르’. 패트릭 시오도르가 어떻게 변했는지 아는 아르네의 가신들은 ‘황태자’를 마냥 믿을 수가 없었다. 두리번거리는 로지의 귀에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잡혔다.

“로지 님?”

말이 마실 물을 얻으러 갔다던 체드릭이었다. 그런데 로지를 향해 다가오는 그는 빈손이었다.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로지 역시 그런 그를 대수롭지 않게 반겼다.

“가자 체드릭. 아가씨께서 오셨어.”

“아아……. 네.”

황급히 옷차림을 정리하며 따라나서는 체드릭을 향해 로지가 은근하게 물었다.

“그래서, 누군지 알아냈어?”

오늘 클로이의 옷은 우연이 아니었다. 클로이와 레이얼 황태자가 티타임을 가지는 동안 ‘침입자’가 있었다는 것 정도는 로지도 알고 있었다. ‘공작 침실’이 아니라 ‘아르네 공녀’를 집요하게 쫓길래 두고 지켜본 것은 결론적으로 신의 한 수였다. 침입자는 들킨 줄도 모르고 집요하게 클로이의 옷차림을 노려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후…….”

생각하니 또 슬슬 열이 오른다. 달려 나가 그대로 메다꽂아버리고 싶은 걸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나. 다행히 그 머저리가 뭔가 끄적거린 후, 새를 날린 통에 일이 쉽게 풀렸다. 새에 매둔 쪽지엔 클로이의 드레스 색이 적혀 있었다. 누가 봐도 못돼먹은 장난질이 예상되는 쪽지였다. 로지는 다시 쪽지를 잘 접어 새에게 매달아 날려주고는 맹렬히 고민했다. 그렇게 완성된 것이 오늘의 드레스였다. 그러나 로지는 이일을 그냥 넘길 생각이 없었다. 북부인들은 계산이 확실했고, 새가 향한 곳은 황궁이었다. 황급히 기사 하나를 붙여 보내 황후궁 방향에서 남자가 하나 나와 새를 데려갔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로지는 ‘황후’라고 섣불리 결론 내리지 않았다. 황후궁 쪽엔 내쉬 황자도, 그리고 황제가 머무는 본궁도 있었으니까. 게다가 캐서린 길롯이 얼마나 치밀하고 무서운 여자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여자가 이렇게 허술하게 일을 처리할 리가 있나. 그래서 새를 받아간 남자를 찾아보라고 그 ‘기사’를 데려온 건데……. 쯧. 갑자기 황태자가 따라나서는 통에 꼼짝없이 귀택해야 할 모양이었다.

“모셔다드리고 다시 다녀올까요?”

“아서. 어차피 상대는 엄마나 아들. 둘 중 하난 걸 아는데 뭐하러 위험을 감수해.”

“그래도…….”

“됐어.”

로지는 아쉬워하는 체드릭을 엄한 목소리로 다잡았다.

“그 어떤 여지도 줘선 안 돼. 우리 상황 알잖아.”

아르네는 벼랑 끝에 몰렸다. 자칫, 아르네의 기사가 황궁을 배회하다 잡히기라도 하면 간신히 벼랑 끝을 디딘 발끝을 누군가가 밀어버릴지도 모른다.

“돌아가, 다음번에 기회가 있을 거야.”

“……아쉬워서 그럽니다.”

“걱정 마. 결코 이번 한 번으로 끝내지 않을 거야. 다음번엔 반드시.”

“네. 로지 님.”

아르네가의 마차 근처에 도착하자 체드릭은 근처 덤불에 숨겨두었던 물통을 자연스럽게 꺼내 들었다. 찰랑. 곧고, 절도 있던 체드릭의 움직임은 어느 결엔가 무방비하게 흐트러졌고 소리도 없던 발끝에선 밑창이 종종 스치는 소리가 울렸다.

“빨리 와요. 공녀님을 기다리게 하면 어떻게 해.”

“죄송합니다. 길을 좀 헤매서요.”

찰랑. ‘마부’의 손에 들린 물통에 가득 든 물이 기어이 흘러넘쳐 바닥을 적셨다.

“열이 없어 천만다행이야.”

레이얼은 클로이의 정체를 알아차린 후, 매너 같은 건 죄다 내다 버린 듯 몹시 스스럼없이 굴었다. 그 편이 클로이도 편하긴 했으나…….

“그런데 전하.”

“응?”

“너무 막 대하는 기분이 들진 않아?”

“누가?”

“전하가.”

“누구를?”

“나를.”

클로이의 눈동자가 제 이마에 붙은 그의 손을 가리켰다.

“고얀 놈.”

“이것 봐. 고얀 놈이라니. 전하, 다른 피앙세에게도 그렇게 불러준 적 있어?”

“걱정해서라는 걸 뻔히 알면서.”

“대답해봐 전하. 다른 피앙세에게도 고얀 놈! 이래 본 적 있어?”

“…….”

“응?”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그런데 그런 말을 나한테는 하는구나.”

이쯤 되자 레이얼은 클로이가 농담을 하는 건지, 진담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신뢰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걱정이랬지.”

“그런데?”

이야기가 갑자기 튀었으나, 레이얼은 차분히 대답했다.

“그럼 이건 함부로 대해서가 아니라 뭐라고 할 참이야?”

“…….”

“응? 이건 뭔데?”

“……해서다.”

“응? 잘 안 들려.”

고얀 놈. 레이얼은 빙글거리는 클로이를 보며,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들었다. 분명히.

“뭐랬는데? 대답 못 하는 거 보니까 막대한 건가?”

제 침대인 양 편하게 드러누워서 싱글거리는 얼굴 그 어디에도 불쾌감은 없다. 그러니 이건 그를 놀리기 위함이 분명한데…….

“응응?”

아직 그는 클로이의 거짓말에 서운함이 채 떨치지도 않았는데.

“전하. 뭐랬는데?”

눈을 활처럼 휘어뜨리며 웃는 저 얼굴이 뭐라고.

“친근함의 표시라고 했다.”

어린애처럼 치덕거리는 말투를 받아주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어후 부끄럽게 그런 걸 소리 내서 말해? 역시 수도 남자야.”

“뭐?”

조금 전까지 내내 졸라놓고선, 그를 능글맞은 남자로 몰아가는 꼴이 가당치도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지금 마차 의자에 누워있지 않나? 친근함은 ‘로이’의 몫으로 챙기고, 그를 동등하게 대하는 건 ‘피앙세’의 지위를 사용한다. 정말이지 야무진 여자다. 의자에 누워 그를 올려다보는 클로이는 연신 웃고 있었다.

“웃음이 나와?”

“그럼 그런 능글맞은 소리를 듣고도 참으란 말이야?”

그가 하려는 말을 정말로 모르는 건 아닐 텐데. 레이얼은 하얗게 질린 클로이의 입술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내내 일루미넴을 먹었겠군?”

“……응. 뭐.”

내내 배실거리던 클로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일루미넴까지 나오자 더는 장난스럽게 넘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인지도 모른다.

“소독은?”

“대충?”

“……공작저에 의사가 있지 않나?”

“전하, 아르네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르네는 제국의 검이라는 긍지로 살아. 그런데 내가 하는 일을 두고 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가신들에게도 숨겼다고?”

기가 찬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였다. 매사에 대범하다 못해 비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무모함’이었을 줄이야.

“정말 아무도?”

“아무도.”

클로이는 로지 이야기는 쏙 뺐다. 레이얼을 의심하는 건 아니나, 말은 입 밖으로 나오면 내 것이 아니라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평상시엔 어떻게 움직인 거지? 옷도 혼자 차려입었다는 건가?”

“전하.”

클로이는 레이얼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나는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같은 사람인데, 로이일 땐 가능한 일을 클로이는 왜 혼자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한여름 하늘을 닮은 새파란 눈동자가 고요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맑은 시선은 곧고도 따가웠다. 레이얼은 손을 내려 클로이의 눈을 가렸다.

“그렇게 보지 마.”

“…….”

“부끄러우니까.”

미안해. 어영부영 넘어갈 거라는 생각과 다르게 레이얼은 나직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사과했다.

“편견이었어. 적어도 내가 아는 레이디들은 그랬거든.”

“당신이 아는 레이디는 전부 수도 출신이잖아.”

“맞아.”

“난 북부 사람이야. 제 목숨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북부인. 이렇게 느긋한 곳이 아니었으니 당연하잖아.”

“그래 네 말이 맞다.”

“하지만, 수도에서 나고 자란 전하가 알 수 있을 리 없었겠지. 사과는 됐어.”

눈을 깜빡이기라도 한 건지 손바닥이 깃털에 쓸리는 것처럼 간질간질했다.

“전하, 에스코트는 이만하면 충분해.”

“꺼지라는 말을 퍽 다정하게 하는구나.”

“무슨 소리야. 그런 걸 왜 말로 해. 발로 걷어차 버리면 되는데. 이건 전하를 생각해서 하는 소리잖아. 전하 집은 여기니까. 뭐 하러 번거롭게-.”

“여기, 어디에 내 집이 있나.”

“어허.”

“일단 같이 가자. 몰랐다면 모를까, 이대로는 못 보내.”

“뭘 걱정하는지 알겠는데, 난 안전해. 저래 보여도 실력자들인걸.”

레이얼은 클로이의 눈을 가렸던 손을 치워내곤 속삭였다.

“아르네 공작도 무너뜨린 작자들이다. 잊었나?”

그의 한마디에 조금 전까지 싱글거리던 여자의 얼굴이 가엽게도 바짝 얼어버렸다. 레이얼은 자신이 얼마나 지독한 소리를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아르네를 무너뜨리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다. 첩자와 여론몰이, 암살. 그 어떤 방법도 마련해낼 거다.”

“전하.”

“내 마지막 피앙세가 되어달라던 말을 잊은 거야?”

이마에서 눈을 거쳐 뺨을 따라 움직이는 남자의 커다란 손이 턱 끝에서 멎었다.

“신부가 되어주기로 했잖아.”

지키게 해줘. 턱 끝을 슬쩍 받친 손가락엔 힘이 하나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돌아가라는 말이 나오질 못했다. 그저, 목을 울려 ‘응’이라고 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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