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뺏고 싶어2021.02.19.
“아…….”
다행히 클로이는 오래지 않아 눈을 떴다. 정말이지 괴물 같은 체력이었다. 레이얼은 파르르 떨리다 올라가는 속눈썹을 바라보다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정신이 드나?”
그의 말에 클로이의 미간이 옅게 구겨지나 싶더니, 눈을 깜빡였다. 아직, 완전히 정신이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동공이 벌어져 새카매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클로이는 몹시 무방비해 보였다. 레이얼은 눈만 끔뻑이는 그녀를 불렀다.
“로이.”
“으응…….”
“로이 정신이 들어? 내가 보이나?”
“보여. 전하.”
짤막한 대답에 레이얼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얼핏 슬픈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얼굴이었다.
* * * 머리가 흐리멍덩하고, 시야가 뿌예 레이얼이라는 것도 목소리로 간신히 구분했다.
“전하……?”
목소리가 푸석하게 갈라져 남의 것인 양 낯설게 울렸다.
“집에서 쉬라고 했잖나.”
쯧.
“또또, 잔소리. 전하는 날 좀 믿어보라니까.”
“너도, 날 믿지 그랬어?”
“왜 또 그래.”
클로이는 자신을 내려보는 레이얼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그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홍채가 낱낱이 들여다보이는 거리. 깜빡. 눈꺼풀이 느릿하게 움직이며 속눈썹이 허공을 쓸어내리는 것까지 보인다.
“어…….”
그런데 왜 이러고 있는 거지? 클로이는 그대로 눈동자를 굴렀다. 그의 어깨에 기댄 제 모습에 놀랄 새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이 입고 있는 ‘드레스’를 보는 순간 자신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깨달아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왜? 어쩌다 들킨 거지?
“그…….”
“로이라고 부를까, 아니면, 레이디 아르네라고 불러드릴까요?”
나직한 미성이 자못 매섭다. 도망치고 싶다. 손을 들어 그를 밀치려던 순간,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설마, 도망가게?”
레이얼은 웃고 있었다. 말 끝에 그의 길쭉한 손가락이 머리칼 속으로 파고들어 가볍게 움켜쥔다. 단지 그뿐인데 클로이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몰아 본 적은 있어도, 달아나 본 적은 없다던 분이 아니었나?”
뿌리치고 달아나는 순간 모든 것을 시인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이미, 모든 것을 확신하고 있는 남자다. 클로이는 자신이 눈을 떴을 때 레이얼이 ‘로이’라고 불렀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시오도르. 사람이 정신이 없을 때 그런 얕은꾀를 쓰다니. 클로이는 더는 ‘공녀’답게 행동하길 포기한 듯, 로이처럼 스스럼없이 굴었다.
“치우지 전하.”
“아, 이거?”
빙긋 웃는 채로 레이얼이 손끝을 세워 장난스레 두피를 긁었다. 아니, 긁은 것 같았다. 귓가로 그의 손이 살을 긁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 짐작했을 뿐, 실제로는 어쨌는지 모른다. 감각이 없는 건 꽤 번거롭다.
“부축한 거야.”
“말투가 왜 그래?”
“한편인데 뭐 어때?”
빙글거리며 웃고 있으나, 그의 새파란 눈동자는 살얼음이 끼기라도 한 듯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화났구나. 클로이는 작게 한숨 쉬었다. 그가 로이를 신뢰하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다. 집착하고, 잃을까 봐 안달복달하던 것도 안다. 그건 단 하나뿐인 ‘내 편’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으리라. 그런데, 그런 로이가 그를 속였다……? 충분히 화가 나고도 남는다. 하지만 클로이는 문득 제게 화를 내는 것같은 레이얼의 모습에 울컥, 서운함이 차올랐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알면서. 내가 널, 얼마나 걱정했는지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의 밤’을 함께한 너는 나를 믿어야 하지 않나.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거라고 말이다.
“어째서……. 말이 왜.”
감정이 차올라 말끝이 파르르 떨린다.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연약한 목소리에, 클로이는 이를 악물었다. 울다니. 누가!
“못됐지! 어째서 말을 그렇게 하는 거야!”
“어째서냐니! 걱정했잖아. 걱정됐다고. 눈앞이 캄캄해졌어.”
생각과는 너무도 다른 말에, 클로이는 눈을 동그랗게 떠버렸다. 아득바득 이를 갈던 것도 깡그리 잊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걱정이라고?”
“그럼 뭐라고 생각했어? 대체 넌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상처 받은게 역력한 표정을 보자 뭐라고 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진다.
“클로이, 나의 로이. 내가 너를…….”
무언가 말을 나올 것 같던 그때. 레이얼의 시선이 뒤쪽 어딘가를 쓸더니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내가, 그대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정말 몰랐다고 할겁니까?”
클로이가 아는 레이얼도, 로이가 아는 전하도 절대 하지 않을 이상한 소리였다. 누가 있구나! 클로이는 손을 들어 그의 목을 감았다.
“왜, 모르겠어요.”
끌어당기려던 건 절대 아닌데, 골격이 큼직큼직한 남자의 목에 팔을 감는 것만으로도 그가 훅 당겨온다. 어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거 자세가 너무……. 날숨이 뒤섞이는 것과 동시에 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게 보였다. 발뺌할 수도 없을 만큼 선명하게 물든 두 볼에 클로이는 자포자기했다. 놀림당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붉다.
“정말이지 굉장한 표정인걸. 누구라도 속을 것 같아.”
분발할게 로이. 나직이 중얼거린 레이얼이 클로이의 허리를 감싸 안은 손에 힘을 줘 쭉 당겼다. 확 다가오는 얼굴에 놀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한껏 젖혔더니 자세가 몹시 묘해졌다. 마치 그를 끌어당기며 눕는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레이얼이 미간을 슬쩍 찌푸린다.
“상처도 있는데 올라오라는 거야? 그건 좀…….”
곤란해하는 남자의 한숨보다 희미한 속삭임이 입술로 고스란히 떨어진다.
“항상, 몸 사리지 않는 건 알지만, 이번엔 그냥 입맞춤 정도로 넘기면 어떨까?”
“뭐?”
잔뜩 당황해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클로이는 레이얼의 눈동자에 비친 제 바보스러운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해.”
아, 아니 난 그게 아니라. 그가 고개를 비트는 것만으로 충분히 거리가 좁혀진다. 클로이는 훅 다가오는 그를 어쩌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어깨가 바짝 솟고 목이 움츠러들었다. 잔뜩 긴장한 티가 나는 모습은 절대 우아하거나, 다정한 한때를 보내는 피앙세 같아 보이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첫, 첫 키스라고!’
쪽. 절대 그가 냈다고는 믿을 수 없는 깜찍한 소리에 클로이가 눈을 번쩍 떴다. 레이얼은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눈매를 휘어뜨려가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또, 쪽. 반대쪽 볼에서 또 한 번 귀여운 소리가 울렸다.
“안 잡아먹을게.”
쪽. 이번엔 이마.
“긴장 풀어.”
작은 새가 쪼듯 가볍고 부드러운 입맞춤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내렸다.
“뭐야 그게.”
클로이는 어느새 긴장이 풀려 그가 입맞춤을 건넬 때마다 작게 웃었다. 느낌은 없지만, 쪽쪽 거리는 소리에 괜히 간질간질했다. 그렇게나 하고서도 부족한지 고개를 비틀어 다가오는 레이얼의 모습에 클로이는 기습하듯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입술을 모아 그가 하듯이 쪽, 소리를 내보았다. 제대로 입을 맞추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놀란 듯 살짝 커진 레이얼의 눈을 보자니 훌륭히 해낸 모양이었다. 쪽. 그가 하듯 입술을 피해 이마에 콧날에, 그리고 날카롭게 뻗은 턱선에. 쪽쪽. 귀여운 소리 사이로 또 다른 소음이 끼어든 건 바로 그때였다. 두근! 머리끝까지 쾅, 하고 울리듯 커다란 심박이었다. 클로이는 눈이 동그랗게 뜬 채 뻣뻣하게 굳었다.
“왜 그래?”
“코르셋 때문인지 자꾸 두근, 거리고……. 숨이 차.”
괜찮은 것 같더니 다시 또 시작인 모양이었다. 클로이가 당황한 표정으로 허둥거렸다. 레이얼은 그런 클로이를 그대로 안아주었다.
“일루미넴을 먹고 몸을 조여서 그런 건지도 몰라. 코르셋을 풀어 줘도 눈을 뜨지 못했다.”
“뭐……? ”
경악에 물든 클로이의 목소리에 레이얼이 빠르게 덧붙였다.
“보지 않았어. 맹세해. 영애들은 종종 코르셋 때문에 기절하기도 하니까 그런 줄 알았다.”
어떻게 들켰나 했더니 그런 거였나. 갑자기 풀썩 쓰러진 제 피앙세를 깨우려면 살짝 풀어주는 게 맞을 테지. 그러니 오늘 일은…… 지그프리트 씨 덕분이구나. 저번에 그냥 다 일러버릴걸. 하……. 작게 투덜거리던 것도 잠시 클로이는 헐떡이는 숨을 고르려 애쓰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코르셋을 풀 순 없어. 상처를 잡아줄 게 없어서.”
“……이만하면 충분히 시간도 끌었으니 돌아가는 게 어때?”
“좋아.”
“바래다줄 테니 일어나. 부축하거나, 안고 나가선 안 되잖아.”
“맞아.”
클로이는 레이얼의 말에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자, 그럼 또 뻗어버리기 전에 에스코트를 부탁드릴게요.”
생긋 미소짓는 클로이의 얼굴은 밖에서 봤다면 밀어라도 속삭이는 듯 한껏 사랑스러웠다. 문을 열고 테라스를 빠져나온 그들을 반긴 건 달큼한 향이었다. * * * 얼음장 같은 얼굴로 턱을 치켜들어 비웃을 땐 언제고 레이얼에게 그런 표정을 지어주고 있었다고?
“하…….”
가지 말걸. 원래 그는 적당한 기회에 테라스로 밀고 들어가 아르네 공녀를 빼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테라스 문에 귀를 붙이자 들린 건 터무니없이 절절한 구애였다.
‘클로이, 나의 로이?’
레이얼이 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잔뜩 열 오른 목소리. 어머니를 여의었을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만큼 독한 사람이 아니었나……? 그런데. 그런데? 내쉬는 시큰거리는 숨을 고르며 연회장의 한쪽에 기대섰다. 감정은 ‘자각’할 때쯤엔 이미 덩치를 크게 불려 돌이키기 어려운 게 보통이다. 그리고 내쉬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그저 작은 호기심이었다. 감히, 황실 연회에서 경멸하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쏘아보던 고고한 여자가 시정잡배처럼 주먹을 날리는 모습에 생긴 작은 흥미. 그것이 호감인지 호기심인지는 모른다. 아르네 공녀는 그날 이후 보이지 않았고, 찰나에 느꼈던 감정은 4년이라는 세월에 희미하게 퇴색하고 말았다. 그런데 잊힌 채 풍화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도무지 그녀답지 않은 소문에. ‘그럴 리가.’ 하고 벌떡. 첫 시작은 아주 사소하게 시작되었다. 자신이 봤던 그날의 모습이 진짜인지 확인받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레이얼을 찾아갔다. 그때만 해도 별거 아니었다. 그저 ‘진짜’ 어떤 사람인지 확인할 수만 있다면 끝날 호기심 정도였다. 사실 공녀가 픽픽 쓰러진다 한들 못 믿을 이유가 없었다. 아르네 공작부인은 굉장히 병약했다고 했다. 이십 년 전, 혹한을 버티지 못하고 기어이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부인의 소생이니 희게 질린 낯빛만 봐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레이얼에게 ‘조롱’당하고 내쫓겼다. 감정이 비틀린 건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별것 아닌 그의 작은 호기심을 키운 것은 레이얼의 노골적인 경계였다. 그러니까. 내쉬는 레이얼의 코트를 걸치고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클로이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러니까 이건, 전부 내 잘못이 아니지요.”
내 눈에 띄질 말던가.
“내 앞에서 그러지 말던가.”
개도 도망치면 일단 쫓고 보는데, 그렇게 애지중지 싸안으면……. 당연히 뺏고 싶어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