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8. 가지고 싶어요 (48/121)

048. 가지고 싶어요2021.02.16.

“이게 무슨…….”

레이얼은 눈으로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왜…….”

아르네 공녀는 공작 저에서부터 지금까지 자신과 단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레이얼은 멍하게 왜, 라는 소리만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레이디 아르네.”

품 안에 든 아르네 공녀를 불러보지만, 고개를 모로 꺾은 여자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레이디, 아르네?”

잔뜩 초조해진 목소리로 아르네 공녀를 부르던 레이얼은 깨달았다. 코앞에서 그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는 여자의 얼굴빛은 화장해서라고 하기엔 너무 희다는 것을. 새하얗던 공녀의 얼굴은 이제 푸르게 질려 있었다. 북부인들의 피부가 유독 흰 건 아르네 공작을 봐왔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눈앞에서 뻔히 보고도 넘겼다.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일삼는 여자를. 소리 없는 탄식이 아프게 터져 나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레이얼은 감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대신 이곳이 어딘지를 되새겼다.

“눈 뜨세요. 레이디 아르네.”

여기선 의사를 부를 수 없어요.

“눈떠요. 어서.”

그대를 안고 나가면, 그대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아르네의 건재함을 지켜줄 수가 없어요. 큰 소리를 낼 수 없어 낮게 부르짖던 레이얼은 문득 이 상황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언제인지 모를 과거의 그날. 일루미넴을 먹은 로이가 세상 모르게 잠들어 버린 날과 비슷하다. 로이가 생각나서였나. 문득 제게 기댄 아르네 공녀가 묘하게 로이와 닮은 듯도 싶다. 복면 아래로 보이는 오뚝한 콧날이라던가, 뾰족한 턱선이라던가 하는 것이. 특정될 수도 없는 것이 마치 특징이라도 된 듯. 피앙세가 쓰러진 와중에 아파 쉬고 있을 ‘부하씨’ 생각이라니. 파렴치한 제 꼴에 쓴물이 왈칵 넘어왔다. 인상을 구긴 것도 잠시 레이얼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지금은 마지막 피앙세를, 그의 신부가 될 아르네 공녀를 전력으로 지켜야 할 때다. 안고 있던 아르네 공녀를 살짝 의자에 뉘어둔 레이얼은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지혈을 할 셈이었다.

“미안합니다. 레이디 아르네.”

일단 사과를 건넨 뒤, 레이얼은 공녀에게 걸쳐둔 코트를 들췄다. 환부를 찾으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레이얼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가 만졌던 코르셋 안의 빡빡한 천은 붕대였다!

“…….”

부상을 작정하고 가린 모습에 레이얼은 침통함을 누르기 힘들었다. ‘누가 감히 아르네를.’ 오만함이 가득한 말을 쏟아내던 그의 피앙세는 아르네의 긍지 아래 이토록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벌겋게 젖은 왼쪽 옆구리를 보고 있자니 제 옆구리에 구멍이라도 난 듯 화끈거리고 아프다.

“후…….”

길고 깊은 한숨으로 마음을 진정시킨 레이얼은 공녀의 차림새를 빠르게 수습했다. 기본 처치가 되어 있는 상황이라, 그가 이곳에서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섣불리 붕대를 푸는 게 더 위험하리라. 그나마 다행이라면, 피가 배어 나온 부분이 그리 넓지 않았다는 정도일까. 공녀를 추슬러 안던 레이얼이 불현듯 얼굴을 굳혔다.

“왼쪽 옆구리?”

로이는 며칠 전, 옆구리에 검상을 입고 돌아왔었다. 바로, 왼쪽에.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나……? 한번 의심이 들기 시작하자 공녀의 모든 것이 ‘로이’와 연결되기 시작했다. 보통보다 큰 키, 마른 몸. 유독 길쭉한 팔다리. ‘신분’이 밝혀질까 봐 유독 꺼리던 태도와…….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레이얼은 신음했다. 로이가 처음으로 황궁을 찾아왔던 날. 그날은 아르네 공작이 민란지로 차출되었던 날이었다.

“아!”

그리고, 로이가 ‘살인’을 입에 올리며 유독 험하게 굴었던 날. 가족이 다쳤다며 울부짖던 바로 그 날은 바로 아르네 공작이 피습당한 날이었다! 하나하나 떠오르는 기억과 함께 비밀에 싸여 있던 ‘로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레이얼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런…….”

그를 향해 거리낌 없이 굴던 당당한 태도와 순간순간 드러나던 우아한 태도. 글을 읽고 셈을 하며, 영지민을 보살필 효과적인 제안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영특함과 황궁 기사들 따위는 우습게 따돌리는 실력. 로이는 남장한 스콰이어 따위가 아니었다. 모든 건 그녀가 ‘아르네’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클로이, 로이…….”

차마 모르는 척 해줄 수도 없는 이 성의 없는 작명이라니. 레이얼은 줄 끊어진 인형처럼 늘어진 클로이를 당겨 조심스레 안으며 속삭였다.

“몇 번이고 말했는데. 사람은 잘 속이지만 거짓말에 서투니까……. 의논하라고.”

“…….”

“나를 믿으라고, 말했잖아.”

이를 악문 채 건넨 레이얼의 속삭임은 흡사 상처 입은 짐승의 울음 같았다.

“봐도봐도 아쉽구나.”

내쉬는 희미한 속삭임에 먼데 두었던 시선을 끌어내려 황후에게 맞췄다.

“무엇이요?”

“아르네 공녀. 레이얼에게 주긴 아까워.”

“이미 넘어간 것을요.”

귀를 울리는 달콤한 목소리에 속이 울렁이는 기분이었다.

“이미라는 단어는 패자가 쓰는 말이란다 내쉬, 내 황자님. 그런 비루한 말은 입에 올리지 말렴.”

크게 돌아 다시 손을 맞잡은 황후에게서 훅, 독한 단내가 피어오른다. 정말 독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찡한 향이었다. 비강이 단내에 절여지다 못해 뱃속까지 설탕으로 꽉 찬 기분에 내쉬는 점점 더 표정 관리하기가 어려워졌다. 필사적으로 울렁거림을 참던 그때였다.

“모든 일엔 명분만 있으면 되는 거란다.”

새파란 눈을 접으며 웃는 캐서린에게서 묘한 말이 나왔다. 울렁거림도 잊을 만큼 충분히 의미심장했다.

“그게 무슨…….”

“넌, 어떠니 내쉬?”

“…….”

“어미에겐 솔직하게 말해주렴. 내쉬. 내겐 너뿐이란 걸 잘 알잖니? 어미는 너를 위해선 뭐든 할 수 있어요.”

실로 머리가 녹을 만큼 아찔하고도 유혹적인 말이었다. 쏘아지듯 닿아오는 곧은 시선. 내쉬는 캐서린의 푸른 눈동자에 홀린 듯 되물었다.

“무얼, 말씀이세요?”

“한마디면 돼. ‘가지고 싶어요’ 그럼 이 어미가 가져다 드리지.”

그 순간 내쉬는 벼락을 맞은 듯 잠깐 숨을 쉬지도 못했다. 아르네 공녀를 가지고 싶다고……? 내가? 공녀를? 누가 뒷머리를 쾅 내려친 듯 머릿속이 얼얼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혼란스러움은 잠시였다. 내쉬는 제 모친이 그 누구보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데 능숙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타고난 우아함이나 범접 못 할 귀한 혈통은 가지지 못했으나, 황제를 사로잡을 수 있었던 건 저 기민한 눈치 덕이었다.

“아…….”

작게 앓는 듯한 소리를 들은 캐서린이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나머지는 어미에게 맡기렴. 옷이 이렇게 예쁜데 참 아쉽게 되었지 뭐니.”

작정하고 보낸 코트라는 소리에 내쉬는 캐서린이 진작에 눈치챘음을 깨달았다. 이건 그러니까 확인이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를 바라는 재촉이다.

“내쉬, 내 황자님. 어서 대답을 해주렴.”

작게 덧붙이는 소리가 정말이지 미치게 달았다. 그는 처음으로 황제의 취향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런 진득한 달콤함이라니. 절대 뿌리칠 수 있을 리가 없다.

“내쉬.”

온건한 재촉에 내쉬는 짧게 웃어주었다. 캐서린의 것과 똑 닮은 다디단 미소였다.

16566376362178.jpg

  모든 일이 시큰둥하던 사람이 무언가에 시선이 매여 있는 건 아주 확실한 신호다. 캐서린은 요즘 내쉬가 종종 레이얼의 궁에 찾아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내쉬를 불러 이야기하기엔 위험했다. 그도 그럴 게 그녀가 아무리 공을 들여도 만사에 애착이 없던 아이었다. 내쉬는 권력도 재물도, 그리고 사람에게도 도통 흥미가 없었다. 캐서린의 갖은 노력에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캐서린은 레이얼이 황제가 되는 것을 두 눈 뻔히 뜨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게 말이 되나? 밤마다 캐서린은 가슴을 쥐어뜯었다. 황제의 절대적인 총애와, 번듯한 황자를 두었는데도 태후가 될 수 없다니. 제 아들이 그저 조금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저 지고한 자리에 오를 수 없다니. 티도 내지 못하고 속절없이 앓기만 하던 시절이 아니었나. 그런데 내쉬가 제 발로 레이얼의 궁에 찾아 미묘한 견제를 한다고? 그 이유가 궁금하나 섣불리 입을 뗐다가 내쉬가 혹 흥미를 잃거나 하면 곤란했다. 노심초사하며 지켜만 보던 그때. 캐서린 황후는 바로 어제, 내쉬의 눈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을 찾아냈다. ‘클로이 아르네’ 그녀가 호시탐탐 노리던 공녀였다. 그 옛날 시오도르와 함께 이 제국을 세운 그야말로 고귀한 혈통의 영애. 아르네라면 변두리 귀족 출신의 어미를 두었다는 내쉬의 꼬리표를 확실히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은근히 몇 번이고 황제에게 청하기도 했었다. 제 아들의 짝으로 달라면 속이 너무 내보일까 봐 이 황실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영애라고. 황가와 연을 맺으면 좋겠다고. 은근히 그러나 착실하고 성실히 그에게 제 소망을 속삭였다. 그건 결코 ‘저주’받은 황태자의 짝으로 달라는 말은 아니었건만. 아르네 공작과 몇 번 마찰을 겪나 싶더니, 황제는 덜컥 공녀를 레이얼의 짝으로 정해버렸다. 그날 얼마나 분하고 속이 상했는지 모른다. 캐서린은 그날 일만 떠올리면, 뱃속에 끓는 기름을 들이부은 것처럼 아리고 타는 느낌이 들었다. 시오도르와 아르네의 조합이라니! 모두가 반길만한 모습이 아닌가. 그날, 캐서린은 깨달았다. 패트릭 시오도르는 내쉬를 전혀 단 한 번도 그의 후계자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음을. 황제가 아르네가의 공녀를 레이얼과 짝지어준 것은 징벌의 의미가 강했지만, 캐서린은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았다. 황제는 레이얼을 경계하는 만큼 내쉬를 경계하지 않았다. 언제나 발치 아래서 노는 어린 고양이를 보듯 하찮게만 생각했다. 아이가 어리니, 좀 자라면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그건 캐서린의 헛된 소망이었음을 레이얼의 일곱 번째 약혼을 지켜보며 확실히 깨달았다. 그렇다면……. 춤이 끝나기 직전 캐서린 황후는 이제는 목을 꺾어 올려다보아야 하는 제 아름다운 아들을 보며 웃었다.

“내쉬, 내 황자님. 두고 보세요. 이 어미가 그대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

캐서린 황후는 황제가 내쉬에게 주지 않는 것을 이제 제가 직접 주기로 결심했다. 클로이 아르네는 시작이다.

“기대해요.”

“…….”

“이 어미는, 정말이지 뭐든 해줄 작정이에요.”

“…….”

“더는 기대할 곳이 없으니 직접 움직일 거랍니다.”

“어머니?”

“그러니 그대는 기대하고 원하기만 됩니다.”

나직한 듯 이어지는 캐서린의 말은 광기가 진득했다. 그러나 내쉬는 그런 제 모친의 모습에 겁을 내긴커녕, 그녀처럼 몹시 화사하게 웃었다.

“좋은 말씀이십니다.”

때마침 바뀌는 선율에 캐서린과 크게 턴하던 순간. 내쉬의 시선이 아르네 공녀가 사라진 테라스 쪽을 향해 반짝 빛났다. 짙고, 집요하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