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괜찮다는 말2021.02.05.
아주 푹 잘 자고 일어난 덕인지, 정신이 몹시 맑았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불러도 모르고 주무실 수가 있어요!”
“어제 피곤하다고 했잖아.”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죠. 불러도, 흔들어도 진짜 죽은 것처럼 주무셔서 제가 얼마나 놀란 줄 아세요?”
로지는 씩씩거리며 연신 눈을 흘겼다.
“소리는 신경 쓰지 말고 주무시랬다고 너무 마음 푹 놓은 거 아니세요?”
“그러게.”
일루미넴이 모든 감각을 막아놓은 것을 모르는 로지는 클로이를 천하의 잠꾸러기 보듯 했다.
“로지, 좀 잤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해. 넌 내가 외부에 대동하는 비밀 호위야. 넌 나가서 눈 좀 붙이고, 다른 애를 불러.”
“……치장만 해 드리고 나갈게요.”
“네 시중 필요 없으니까, 가.”
몸을 일으키는 클로이는 평소보다 훨씬 강경했다.
“아가씨.”
“시녀라면 차고 넘쳐. 하지만 로지 클라크는 하나뿐이지. 나가 로지.”
새파란 눈동자가 고집스럽게 로지를 쏘아보았다. 결국 진 건 로지였다. 클로이의 말은 합당했다. 치장에 목매다, 정작 공녀의 목숨을 위험하게 할지도 모른다. 간밤, 밤새 쉬지 않고 움직였기에 로지도 적잖이 피곤했다. 로지는 항복을 선언하듯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뒷걸음질 쳤다.
“맞아요. 머리가 멍해요. 이래서야 제대로 호위하긴 힘들지도 몰라요. 곧, 다른 아이를 보내드릴게요.”
“오늘은 느지막이 출발할 거야. 푹 자둬.”
“감사합니다.”
몸 관리를 제대로 못 한 거로 부족해 주인에게 배려받다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로지는 장난기를 싹 지운 얼굴로 허리를 깊게 숙였다.
“내일도…… 내일도 아가씨의 치장을 다른 아이에게 부탁해도 될까요?”
하루 만에 끝날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예 확실하게 움직이는 게 좋다. 솔직한 말 때문이었을까,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명령하던 클로이에게서 작은 웃음소리가 새 나왔다.
“당연하지. 빨리 가.”
“예.”
로지가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침대에 늘어져 있던 클로이가 번개같이 몸을 일으켰다. 혹시라도 로지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달라붙어 있으면 어쩌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호위로서의 긍지를 슬쩍 긁어본 게 아주 잘 먹혀서 다행이었다. 클로이는 침대를 벗어나자마자 코르셋을 찾아 걸쳤다. 혼자서 이 뻣뻣한 것을 죄고 입는 것은 정말 눈물이 날 만큼 극악했으나 해야 했다. 간밤 그렇게 움직이고도 꿰맨 상처가 터지지 않은 건, 코르셋이 아주 단단하게 환부를 붙잡아 줬기 때문이었다. 코르셋을 대충 걸치고 숨을 참고 힘껏 죄었다.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클로이는 수시로 제 허리 상태를 가늠하느라 그 작업은 더디고도 조심스러웠다.
“후…….”
찰나에 이렇게까지 해서 연회에 가야 하나 하는 생각과 절대로 길롯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든다. 찌이이익. 하얗게 관절이 돋은 손이 끈을 잡아당기자, 코르셋이 살을 죄는 소리가 요란하다. 클로이는 그 상태로 가만히 숨을 들이켰다. 적당히 숨이 벅찬 것이 제대로 몸을 지지하는 느낌이다. 끈을 야무지게 매듭지은 클로이는 귀를 쫑긋 세워 바깥소리를 들었다.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클로이는 협탁 서랍을 열여 일루미넴을 꺼냈다. 약 기운이 반나절 남아 있긴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약이라고는 하나 실상은 독초라 함부로 과용해도 되나 싶다.
‘일주일 이상 장복하면 안 돼. 그 이상은 부작용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그러나 레이얼의 경고는 일주일 이상의 장기 복용에 관한 것 뿐이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제야 처음이니 그냥저냥 넘어갔을지 몰라도 오늘 또 배를 움켜쥐고 식은땀을 흘려댔다간 로지에게 들키고 말 것이다. 이건 예감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자박. 자박. 그때 마치 고민하는 클로이의 등을 떠밀기라도 하듯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귀에 잡혔다. 자박 자박.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소리. 클로이는 눈을 질끈 감고, 일루미넴을 입에 털어 넣었다. 비강을 타고 달콤한 숨이 터지던 순간.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가씨.”
“들어와.”
클로이는 입안에 남은 것을 꼴딱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어머나……. 코르셋을 혼자 입으셨어요?”
“이게 뭐 별거라고.”
클로이는 어제와 똑같은 소리를 하고선 화장대 앞에 가서 앉았다.
“자, 그럼 오늘은 얼마나 예쁘게 꾸며줄지 한번 볼까?”
뒤척임 없이 푹 자고 일어났는데도, 두통이 여전하다. 침대에서 일어나던 내쉬는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은 기분에 미간을 험하게 구겼다.
“빌어먹을.”
쓸데없이 예민하기만 해서 조금만 신경을 쓰면 기다렸다는 듯 이 꼴이다. 머리를 감싸 쥐고 숨을 몰아쉬던 내쉬는 손을 뻗어 협탁에서 익숙하게 약병을 찾아 꺼냈다. 툭툭, 동그란 알약을 입에 털어 넣어 그대로 삼켰다. 바짝 마른 목구멍으로 억지로 삼켰더니, 온통 따갑고 아프다. 하지만 정말로 그를 괴롭히는 건 따로 있었다. 손을 얽고 들어서던 둘의 모습. 강철같다고 생각한 공녀가 짓던 부드러운 미소. 두 눈을 곱게 접어 웃는 공녀는 더없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제겐 허락지 않던 손으로 레이얼을 붙잡고, 레이얼을 안고, 레이얼을……! 쨍그랑! 길어지는 상념에 내쉬는 짜증을 못 이기고 협탁위에 올려진 꽃병을 들어 내던졌다. 제겐 허락하지 않았다! 그깟 장갑이 뭐라고!
“하…….”
치미는 짜증에 누가 머리를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이 스민다. 이를 악물어 참는 내쉬의 녹안은 실핏줄이 잔뜩 돋아 벌겠다.
“그까짓 게 뭐라고.”
우악스럽게 머리를 움켜쥔 내쉬에게서 탁한 목소리가 새 나왔다. 별것 아닌 질문. 별것 아닌 인사. 그 별것 아닌 것을 기어이 쳐내니, 오기가 돋는 거다. 울컥울컥 마음에 뭔가가 차오르고 신경이 솟아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간밤, 자신을 끝까지 쳐낸 공녀를 쫓아 나갔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뻣뻣하고 얼음장처럼 차게 굴던 공녀가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환하게 웃으며 레이얼의 가슴에 파고드는 것을 본 순간. 가면이라도 뒤집어쓴 듯 늘 덤덤하기만 한 레이얼이 은근히 치대는 것을 본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은 제겐 허락되지 않았던 것을 꼭 받아내고 싶다는 열망이 되어버렸다. 그건 짓이겨진 자존심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자신만 쳐내던 공녀를 향한, 설욕이라고 해야 할까. 그게 뭐가 됐건 받아내고 싶다는 열망이 또렷해진다. 뻣뻣한 여자가 지어 보이던 미소와, 나긋한 손끝.
“후…….”
내뿜는 한숨이 묵직하게 깔렸다.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레이얼이 찾아왔다.
“레이디 아르네, 오늘은 더욱 아름다우시군요.”
손등에 입맞춤을 남기며 하는 레이얼의 말은 의례적이었으나.
“전하께서도 아름다우십니다.”
아름답다는 클로이의 말은 진심이었다. 어제도 근사했던 남자는 오늘 아예 작정하고 온 건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아직 시간이 좀 이르니 차를 한잔할까 하는데 어떠세요?”
“감사합니다.”
시종을 불러 차를 준비시키고 돌아오는 사이 레이얼은 응접실에 자릴 잡고 있었다. 생각에 빠진 듯 레이얼의 시선이 먼 데 닿아 희미하게 풀려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단정한 자세인데도, 그 자태가 몹시 고혹적이라 절로 시선이 묶인다. 겨우, 의자에 앉은 정도로 말이다. 그때였다. 쿵. 마치 북을 울리기라도 한 듯 심박이 거세게 날뛰기 시작했다. 왜 이러지? 클로이는 제멋대로 날뛰는 심박에 적잖이 당황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클로이는 옅게 미소짓는 레이얼과 눈이 마주쳤다.
“머리를 푸는 것도 잘 어울리십니다.”
레이얼의 얼굴로 느릿하게 번지는 미소에 두근거림은 한층 더 거세졌다.
“아…….”
클로이는 대번에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다. 레이얼 시오도르잖아. 그저 옅게 웃는 것만으로도 사방을 녹진하게 만드는 미인. 두근거리는 게 당연하잖아.
“과한 칭찬이십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이 두근거리는 제 심박을 그렇게 다독이며 클로이는 자리에 앉았다.
“과하긴요. 그나저나, 몸은 좀 어떠십니까.”
말 끝에 레이얼의 시선이 얼굴께를 슬쩍 스쳤다.
“아……. 괜히 심려 끼쳤습니다. 전, 정말 괜찮습니다.”
관리한다고 했는데도 역시 무리한 게 티가 난 모양일까. 클로이는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보이도록 아주 활짝. 그런데,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레이얼이 얼굴을 굳힌다. 그 모습에 클로이는 문득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제가 웃을 때마다 질색하던 레이얼의 모습이.
‘고개 돌리거라.’
‘웃지 말래도.’
취향 한 번 올곧단 말이야. 일찍이 알고는 있었으나, 오랜만이라서일까? 아니면 로이가 아닌 공녀로, 심지어 공들여 치장했는데도 저런 모습을 봐서였을까. 얼굴을 굳힌 레이얼의 모습에 괜히 기분이 상한다.
“괜찮다는 말로 넘기시면 안 됩니다.”
잔뜩 굳은 얼굴을 해선, 아닌 척 염려를 늘어놓는 꼴을 보자니 그러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속이 비틀린다.
“어린아이도 아닌데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 혹시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감정이 상해 목소리에 살짝 날이 섰다 싶은 순간, 곧장 레이얼이 사과를 건넸다. 아차 싶었다.
“주변에 늘 괜찮다는 소리를 달고 다니는 사람이 있어서 그만…….”
“그게 누구인데요?”
어쩐지,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제 부……보좌관입니다.”
설마 부하라고 말하려던 건가? 로이? 나? 부루퉁하던 것도 잊고 클로이가 눈을 반짝였다.
“보좌관께서 괜찮다는 말을 즐겨 쓰시나 봅니다.”
“그, 렇습니다.”
“과로하나 보죠?”
“과로……라기보다는 꽤 무리하는 편입니다.”
“같은 말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일 자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꽤 유능하거든요.”
“그럼……?”
“버거운 일을 시키는 편입니다.”
“저런.”
알긴 아는구나. 클로이는 웃음이 터지기 전, 잔을 들어 차를 마시는 척 입매를 가렸다. 서두른 덕에 씰룩거리는 입꼬리가 만개한 꽃잎처럼 한껏 벌어지기 전 가까스로 감출 수 있었다.
“유능한 부, 보좌관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요.”
애써 태연한 척 찻잔을 내려놓으며 태연하게 한마디 보태기도 했다.
“글쎄요.”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생각 외로 미적지근한 말에 슬그머니 떠보듯 묻고 말았다. 파고들면 이상해 보일 거라는 걱정은 나중으로 미뤘다. 매일 밤 체면도 버리고 기꺼이 나쁜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데, 어째서 저렇게 시큰둥한 반응인지 알고 싶다는 충동이 강렬했다.
“레이디 아르네 이건 마음에 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랍니다. 우린 보통 괜찮아 보이는 사람에겐 그런 질문을 하지 않으니까요.”
“…….”
“그리고 대부분, 괜찮지 않은 사람들이 ‘괜찮다’는 말을 잘하더군요.”
말을 마친 레이얼이 클로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레이디 아르네, 몸은 괜찮으십니까.”
꿀꺽. 머금고 있던 꽃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꿀떡 넘어갔다. 기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