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보고 싶다2021.02.02.
‘전하의 신부가 될 겁니다.’
그를 끌어다 코앞에 두고 선언하던 아르네 공녀의 모습은 지극히 오만했다. 올려다보는 대신, 끌어내려 시선을 맞추는 패기라니. 레이얼은 손을 들어 목덜미를 쓸었다. 기분 탓인지 아직도 목이 잡혀있는 기분이었다.
“레이디 아르네.”
처음 만난 피앙세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훨씬……. 문득 긴 한숨을 내쉰 레이얼은 손을 들어 얼굴을 거칠게 문질러버렸다. ‘아르네’ 공녀가 제게 그런 식으로 말한 이유를 알고 있다. 등 뒤의 감시자에게 지지 않겠다 선언한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아는데도 순간, 무척 기뻤다. 그와 함께하겠다는 당당한 선언에 그만 머저리같이 두근거리고 말았다. 그와 상실감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지 오래였다. 오래전 잃은 모친을 시작으로, 그는 제 주변의 모든 사람을 차근히 잃었다. 일부는 자의였고, 일부는 타의였다. 하지만, 이유는 모두 같았다. ‘길롯’ 그의 실각을 바라는 길롯 때문이었다. 시오도르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거의 모든 일은, 길롯 출신의 황후가 원해서임을 모르는 이는 없다. 차근한 회유와 서늘한 협박에 버틴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위협을 당하고도 그의 곁에 있어 주겠노라 선언한 아르네 공녀가 처음이었기에 특별해진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오직 그녀만이…….
“아…….”
레이얼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와 ‘시오도르’의 의미를 아는 것은 공녀만이 아니었다. 로이. 아르네 공녀보다 훨씬 더 일찍부터 그의 곁을 지켜주던 이가 있지 않았나. 작은 깨달음이었지만, 레이얼에겐 중요했다. 그간 레이얼은 자신이 로이에게 꽤 집착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나…….”
레이얼은 단박에 제 감정을 이해했다. 그의 첫 우방. 집착할 만하다. 집착해야 마땅하고. 그리고, 로이를 놓아줄 수 없다는 몹시 타당한 이유도 생각났다.
“보상을 해줘야지.”
무려, 그의 첫 우군이지 않나. 공녀껜, 황후의 자리와 더없는 영광을 그녀의 발아래에 깔아줄 것인데, 로이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기한은 레이얼 시오도르가 황제가 될 때까지, 시간은 밤만.’
피앙세가 있어 안 된다고 했던가. 그럼 피앙세인지 뭔지 하는 녀석도 그가 궁으로 불러들이면 될 일이 아닌가. 얼굴 한번 못 본 로이의 피앙세를 떠올리자, 어째 뱃속이 뒤틀리는 기분이다. 그까짓 녀석이 뭐라고, 감히 황태자의 보은을 거절해. 레이얼은 비틀리는 제 속을 그렇게 이해했다.
“하…….”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는 레이얼의 잇새로 나직한 한숨이 터졌다. 밤은 깊어만 가는데, 서류 한 장 넘기기도 쉽지 않았다. 십 년 만의 외유에 긴장해서도 흥분이 가시지 않아서도 아니다. 로이. 녀석이 오지 않는 밤이 언제나 그랬듯, 공허하고 길기만 해서였다.
신데렐라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클로이는 차츰 되살아나는 감각에 잘게 떨며 공작저로 들어섰다. 일찍 돌아왔어야 했는데, 지켜보는 시선을 알아 여유 부리다가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후…….”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식은땀이 뚝뚝 떨어진다. 누가 그녀의 옆구리에 불을 붙여놓은 듯 화끈거리며 견디기 힘든 고통이 치민다.
“힘드시죠? 코르셋이 쉽지 않아요.”
배를 움켜쥐고 걷는 것이, 코르셋에 졸려서 둔통이 이는 거라 생각한 로지가 뒤에서 드레스 자락을 잡아주며 상냥히 달랬다.
“내일은 제가 좀 느슨하게 만져드릴게요. 오늘 보니까 아주 단단히 매 놓으셨더라고요. 멍들었을지도 몰라요.”
“느슨……은 무슨. 뭐든 트집 잡고 싶어서 눈이 벌게져 있는데. 절대 어림없어. 멍들어도 돼.”
“아가씨. 그래도…….”
“사교계도 전쟁터라는 거 알잖아. 난 지는 싸움은 하지 않아. 로지.”
“……그래도 너무 힘들어 보이니까 그러죠.”
“그럼, 먼저 가서 목욕물이나 받아줄래?”
“피곤하시죠? 제가 그럼 얼른 가서 준비해둘게요. 목욕 끝내고 마사지까지 받으시면 한결 나을 거예요.”
“아니야, 간단히 물만 끼얹을 거야. 목욕시중은 됐고, 먹을 거나 가져와. 오늘 아무것도 못 먹었어.”
지극히 실리적인 클로이의 말에, 로지는 이내 그러마 대답했다. 코르셋이란 게 얼마나 지독한지 그녀 역시 입어본 적이 있어서 잘 알고 있었다. 숨 한 번 크게 쉬기 어렵다. 저런 것을 입고 뭔가를 먹는 건 정말 곡예에 가까웠다. 이미 오후에 나가 한밤중이 되어 돌아온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클로이의 안색이 아주 엉망이다. 푸릇하게 질려선 입술이 버석하게 말라 있다.
“닷새 다 가실 거예요?”
“일단 이틀째랑 마지막 날은 꼭 가야지. 첫날과 마지막 날만 얼굴을 비치면 부족하잖아.”
“송아지 고기가 들어왔다는 것 같았어요. 고거 두툼하게 썰어 구워볼까요?”
“좋지.”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땀이 이내 턱 끝에서 뚝, 떨어진다. 힘들어하는 클로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로지가 문득, 어딘가를 보더니 쥐고 있던 드레스 자락을 넘겼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로지는 달리기 시작했다.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 올라가는 건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나 지금은 예외다. 침입자가 있으니까! 뻑! 로지는 갑자기 코너에서 튀어나와 주먹을 휘두르는 복면인을 그대로 발차기로 날려버렸다.
“……집 안 꼴이 왜 이 모양일까.”
에반의 성격에 이런 것들을 두고 보지 않을 텐데, 여태 이런 것들이 돌아다닌다는 의미는 하나였다.
“암살조를 어마어마하게 쏟아부었구만.”
애초 하루짜리인 줄 알았던 연회는 무려 5일로 늘어났다. 그 말은 앞으로도 나흘은 더 이럴 거라는 뜻이었다. 쓰러진 남자를 치운 로지는 빠르게 복도를 확인하며 달렸다. 공작 침실 앞을 지나칠 때 숨죽인 신음이 들린 거로 봐서, 에반은 안에서 둥지를 틀고 처리하는 모양이었다.
“칫.”
에반이 공작님을 두고 나올 리 없으니 암만해도 공작저 내부는 그녀의 몫이 될 모양이었다. 작게 툴툴거린 로지는 클로이의 방과 욕실을 확인한 후 간단히 씻을 준비를 해두었다. 갈아입을 옷까지 모두 챙겨두고 욕실에서 나오던 로지는 막, 방에 들어서던 클로이와 마주쳤다.
“아가씨, 세수만 하세요.”
“세수만?”
“누가 훔쳐볼까 봐서요. 머리도 내일 아침에 감겨드릴게요.”
“……저녁은?”
침입자가 있다는 에두른 말에도 태연하게 식사를 챙기는 모습에, 로지가 살짝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준비해올게요.”
“로지가 직접 해줄 거야?”
“그럼요. 그런데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소매 안쪽에서 번쩍이는 날붙이를 꺼낸 로지가 생긋 웃었다.
“천천히 해.”
“예, 아가씨.”
엉거주춤 허리를 굽힌 그대로 클로이가 손짓하는 것과 동시에 로지가 사라졌다.
오래 걸릴 거라는 생각과 달리 로지는 삼십 분만에 먹음직스럽게 생긴 스테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어머, 우리 아가씨. 얼굴이 환하게 폈네요.”
한쪽에 벗어던진 코르셋을 본 로지가 놀리듯 말끝을 쭈욱 늘렸다. 아닌 게 아니라 식은땀을 흘리며 허리를 움켜쥐고 쩔쩔매던 클로이는 몹시 평온한 모습이었다.
“진짜 우리 아가씬, 뼛속까지 북부 사람이라니까.”
북부에선 걸치지 않는 코르셋을 들먹이며 싱글거리는 말에 클로이가 눈썹을 구겼다.
“어허. 그만.”
“네네. 자 그럼 얼른 드시고 주무세요.”
“로지도 먹자.”
“먹고 뛰면, 옆구리 결려서 싫어요.”
스테이크를 크게 잘라 건네던 클로이의 손이 로지의 말에 급선회했다.
“그래 그럼.”
볼이 불룩해지도록 밀어 넣고 냠냠 씹는 모습은 전투적이었다.
“배가 많이 고프셨구나.”
“나 진짜 기절할 것 같은데 기운 차리려고 먹는 거야.”
“셋째 날은 쉬세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 죽겠어.”
“드시고 주무세요. 좀 시끄럽겠지만, 신경 쓰지 마시고요.”
“걱정 마. 나 지금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들어.”
포크를 든 손을 달달 떨어 보이는 클로이의 엄살 가득한 모습에 로지의 표정이 잠깐 일그러졌지만, 그건 정말 잠깐이었다.
“……그러시네요. 가엽게도.”
“응.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아무도 모를 거야.”
“그러게요. 북부 제1 사냥꾼을 무너뜨리는 코르셋이라니. 수도의 레이디들이 어떻게 보면 더 강건한지도 모르겠어요.”
“작작하라고. 내가……만 아니면 응?”
“음식 씹으며 말하면 안 돼요.”
우물거리며 말을 하느라 발음이 어눌하게 뭉개지자 로지가 대번에 눈을 치떴다.
“알았어. 식탁도 아닌데 좀 봐줘. 나 아프잖아.”
“이미 충분히 봐주고 있어요. 침대에 앉아서 아이처럼 포크를 움켜쥔 것도. 입에 가득 음식을 채우는 것도. 하지만, 말은 음식을 삼키고 해도 되잖아요.”
“그래그래. 내가 나빴어. 봐줘.”
클로이는 또 한 번 두툼한 고깃덩어리를 입에 밀어 넣고 우물거렸다. 일루미넴을 먹고 가라앉힌 통증이 다다닥 쏘아붙이는 로지의 잔소리에 다시 도지는 기분이었다.
“설마, 예법을 다시 한번 점검해야 하나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로지 님. 말씀드렸지만 오늘은 너무 힘들어서 그래요. 봐주세요.”
클로이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불쌍한 목소리를 냈다.
“믿어도 되겠지요?”
“그럼 그럼. 자 봐, 나이프로 접시를 긁는 소리도 안 내고 조용히 자르고 있잖아?”
볼멘 소리를 하던 클로이는 문득, 머리를 스치는 기억에 작게 웃었다.
‘로이 이중 너를 가르친 자가 있다면, 반드시 입을 막아야 한다.’
‘이들은 ‘귀족’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다. ‘평민’이 문제를 일으켰다면 나서서 정보를 풀어놓을 것이다. 반드시 막아야 해.’
입을 막다니. 레이얼 전하,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애초에 나를 가르친 건 북부인들. 수도의 예법 선생 따위가 아르네 공녀를 가르칠 수 있을 리가 없지. 클로이는 작게 자른 고기를 입에 밀어 넣으며 콧소리를 냈다.
“맙소사. 배가 그렇게 고프셨던 거예요? 콧노래라니.”
“그건 아닌데, 로지. 한 입 줄까?”
“어휴. 됐어요. 아가씨 많이 드세요.”
침입자를 정리하려면 바쁠 텐데, 식사 시중까지 바라는 건 너무 염치없다. 클로이는 제 곁을 지키는 로지를 슬쩍 떠밀었다.
“먼저 나가봐도 돼. 바쁘잖아.”
“아니에요. 방에 냄새 배지 않게 아예 다 챙겨서 나가려고요.”
“난 괜찮은데.”
“누군 안 괜찮을 거예요. 냄새가 나면 사람이라는 게 그래요. 괜히 한번 들여다보고 싶어지죠.”
코끝을 톡톡 두드리는 로지는 무척 진지했다. 그 모습에 클로이는 누군가가 겹쳐보였다.
‘냄새에 예민해서.’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던 누군가가. 오늘 내도록 붙어 있었는데도, 보고 싶다. 아르네 공녀를 에스코트하는 레이얼 시오도르 황태자가 아니라, 로이를 놀리고 투닥거리면서도 이가 보이게 크게 웃던 그녀의 전하가. 자신은 어느샌가 ‘전하’에게 정이 든 모양이었다. 질겅. 조금 전까지 보드랍던 고기가 이상하게 자꾸 이에 걸리기만 하고 넘어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