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 전하의 신부가 될 겁니다2021.01.29.
그 시각 아르네 공작저는 정말 쏟아져 들어온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암살자들을 처리하느라 몹시 분주했다.
“개미 떼야 뭐야.”
담장을 지키던 아르네 기사 하나가 흠뻑 젖은 검을 털며 질린 목소리를 냈다. 이전과 달리 ‘처리’해도 된다는 명령이 떨어졌기에 제약은 덜했으나 상대가 늘었기에 피로도는 같았다.
“진짜, 지극정성이다.”
그 옆에 선 기사의 표정 역시 비슷했다. 어찌나 많은지, 간간이 놓칠 정도였다. 벌써 두 녀석이 본채로 달려갔다. 본채에도 방어인력이 있으니 걱정이 되진 않지만, 이상하게 고요하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에반 님 괜찮은 건가?”
검을 털던 기사가 하는 말에 옆에 선 기사가 입매를 비틀었다.
“무슨 소리야. 안에 들어간 녀석들을 가여워해야지.”
“응?”
“멋모르고 신나서 공작님 침실까지 갔을 텐데. 에반님 상태가 좀……그렇잖아.”
그의 말에 기사들은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에반 드이로에넬. 상냥해 보이는 젊은 집사의 이명을. 아르네의 미친개. 제 주인이 아니고선 그 누구의 말도, 그 누구의 사정도 듣지 않는다는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의 별명이 떠오른 순간 사방이 고요해졌다.
“잘 봐. 잘.”
미친개의 목줄을 쥔 주인은 지금 감은 눈을 뜨지 않고, 미친개가 유일하게 싸고도는 공녀는 오늘 공작저를 비웠다. 그 말은…….
“어이! 거기! 좀 신경 쓰란 말이야!”
목줄 풀린 미친개가 공작저를 배회하고 있다! 기사들은 등골이 서늘해져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해 버리고 말았다. 주변을 경계하는 기사들은 조금 전 보다 훨씬 비장한 표정이었다. * * *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사실 올리브의 색은 꽤 다양해요.”
“으윽!”
“익어가는 동안, 몇 번이고 변하거든요. 물론, 품종 차이는 있지만. 일단 당신은 다양한 색을 가진 쪽이라고 해둘까요?”
사람의 목을 짓밟고 있다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에반은 상냥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얼굴색은 확인했는데, 지조는 어떠려나.”
발 끝에 지그시 힘을 주자 목이 졸린 남자의 눈에서 반사적으로 눈물이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엉망이 되어서도 눈을 번뜩이며 이를 갈았다.
“주, 죽여라!”
부어터진 입술은 이미 보랏빛이 선명했다. 에반은 남자를 밟은 그대로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맞댔다.
“킬리언 헤논. 명령하지 마세요. 내게 명령을 할 수 있는 건, 주인님뿐입니다.”
“날 죽여라! 이런다고 해서 아무것도 얻어낼 수 있는 건 없을 테니!”
“역시, 근성은 형쪽이 나은 모양입니다. 블레이엄 헤논은 마지막까지, 검을 휘둘렀다던데.”
“이 개자식! 감히 헤논의 이름을 더러운 입에 올리다니!”
에반은 제게 밟혀서도 마구 욕설을 쏟아내는 헤논가의 둘째를 보며 입꼬리를 삐딱하게 틀었다. 개자식, 더러운 입…… 감히. 그중 에반을 가장 짜증 나게 하는 건, ‘감히’라는 오만함이 서린 한마디였다.
“감히……라?”
에반의 옅은 눈동자가 잔혹하게 빛을 발하는 것과 동시에 으득, 하얀 장갑을 낀 그의 손이 단단히 말렸다. 미련하게 크진 않으나, 맞아본 킬리언은 저것이 얼마나 단단한지 잘 알고 있었다.
“주, 주, 죽여!”
“몇 번을 더 알려드려야 할까……? 명령은 감히 헤논이 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아르네의 핏줄은 하나같이 영특했던지라, 인내심이란 걸 느껴볼 새가 없었는데. 오늘 밤, 진득하게 느껴보겠네요.”
에반이 깨끗하게 다려진 새 손수건을 꺼내, 킬리언에게 떨어뜨렸다.
“물어주시겠습니까? 주인님이 지저분한 소리로 깨는 건 곤란해서.”
“이 미친 자식이!”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알려주세요. 쉽잖아요. 증언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누군지만 말하면 되는 겁니다.”
“알아낸들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텐데!”
익어가기 시작하는 올리브를 닮은 눈동자에 희미하게 서린 공포를 보며 입맛을 다신 에반이 소리 내 웃었다.
“모르십니까? 가장 무서운 건, 아르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될 때라는 걸?”
펜이나 쥐었을 것 같이 생긴, 희멀건 한 얼굴이 이제 보니 사람을 지옥으로 밀어 넣는 악마를 닮았다. 킬리언은 작게 신음했다.
“그럼, 이만 손수건 물어주시겠어요?”
난, 아직 기분이 안 좋아서. 한숨 소리보다 나직한 에반의 뒷말과 함께 이내, 공작저는 고요해졌다. * * * 클로이는 문득 머리끝이 쭈뼛해지는 기묘한 감각에 잘게 떨었다. 이게 뭐지? 일루미넴의 효과는 유효한데 코트 아래로 보이는 팔엔 온통 소름이 돋아 엉망이었다. 감각이 차단되었는데 이럴 수 있나?
“추위를 많이 타시는군요.”
“그럴 리…….”
일루미넴 덕에 추위를 못 느낀다고는 하나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북부 출신의 자신이 이깟 추위에 떨 리 없다. 막 입을 떼던 클로이는 예의 오싹한 감각을 느끼곤 레이얼에게 몸을 붙였다. 방금 어둠 속의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정제되지 않은 적의와 살의. 감각 없는 몸뚱이가 저릿한 건 바로 저것 때문인 모양이었다. 이것 보라지. 클로이가 레이얼에게 다가서자 한층 더 또렷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이러고 있으면 싫은가 봐요.”
고개를 젖혀 레이얼을 올려다 보는 클로이는 생긋 웃었다.
“아아…….”
클로이의 말에 설핏 굳어 있던 레이얼이 픽, 숨을 터트리듯 짧게 웃었다. 경직된 그의 몸이 조금 부드럽게 풀린다. 그 모습에 클로이는 터지려는 웃음을 연신 눌러 삼켰다. 레이얼 시오도르. 정말 한결같은 남자다. 로이로 만날 적에도 제가 먼저 닿는 것은 아무렇지 않아 했으면서, 로이가 손을 대면 희롱이라도 당한 듯 굴었다. 밀어라도 속삭이듯 다가와 몸을 붙이고 은근히 관전자를 알려줄 때 그는 태연하기만 했다. 아니. 태연한 정도가 아니었다. 느긋한 태도는 일견 능글맞아 보이기까지 했건만, 지금 자신이 다가서자 맞붙은 반신이 얼음 조각처럼 뻣뻣해졌다. 이 간극이 정말 웃기다.
“재미있으십니까?”
볼을 씰룩이는 것을 본 모양인지, 레이얼이 물었다.
“어떤 것 같아 보이세요?”
“표정이 굉장히 짓궂어 보입니다.”
“조금 더 놀려보고 싶어서요.”
“어떻게요?”
제게 하는 소리인 줄도 모르고 되묻는 레이얼을 보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은 클로이가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요.”
그리고 레이얼이 뭔가 대답을 하기도 전 그의 팔짱을 끼며 바짝 다가섰다. 당황해서 움찔 떨면서도 그 얼굴만은 태연하다. 애써 감추는 모습이 가엽고도 귀엽다.
“산책, 어떠세요?”
어둠 속에 숨은 이에게도 잘 들리게 목청을 높인 클로이의 목소리엔 웃음이 가득 물려있었다. 사정 모르는 이가 보면, 레이얼과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워서라고 착각할 법한 모습이었다.
산책은 길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안전을 위해 연회 기간 동안 후원 개방을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정한 한때를 보여주기엔 충분했다. 클로이는 후원을 따라 촘촘하게 배치된 기사들의 눈에 맺힌 이채를 놓치지 않았다. 이 황궁에 있는 모든 이가 그들을 주시하고 있다. 저주받은 황태자와, 흔들리는 아르네. 몸이 축축 처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클로이가 무리한 건 그래서였다. 아르네가 멀쩡하다는 걸 보여줄 수만 있다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레이디 아르네. 밤바람이 차갑습니다.”
하염없이 걷는 클로이를 멈춰 세운 건 레이얼이었다. 숨소리가 한참 전부터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말로는 괜찮다고는 하나, 그녀가 쓰러졌었다는 건 수도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탈색된 듯 하얀 얼굴, 핏기를 잃은 입술. 아직 그녀는 회복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밤, 굳이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이 황궁을 거니는 이유는 아르네의 건재함을 보이기 위함이리라. 공녀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혼자. 그 어디에도 그에게 기댄다는 선택지는 없어 보여 레이얼은 입맛이 썼다.
“이만 귀택하시면 어떨까요?”
“아, 밤바람이 상쾌해서 들떴나 봅니다. 그럼, 요 앞까지만…….”
“레이디 아르네, 이만 귀택해주세요. 그리고 부디 늦도록 푹 주무시고요.”
팔랑이던 클로이의 걸음이 멈춘 건 그때였다. 아르네 공녀로 만난 레이얼은 다정한 남자가 아니었다. 정해놓은 선 안에서 예의를 갖춰 정중하게 대한다. 그런 남자가 한 말이라기엔 조금 전의 것은 너무 간절하게 울렸다. 이유는 하나다.
“그 정도로 얼굴이 엉망인가 보죠?”
무거워진 분위기를 수습해볼 생각에 가볍게 꺼낸 말이었는데, 레이어의 눈초리가 일순 날카롭게 빛난다. 아차. 클로이는 제 혀끝을 씹었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수습하는 데 정신이 팔려 ‘공녀’의 말투를 깜빡했다. 들켰나. 긴장해서 그의 눈치를 살피는 클로이에게 레이얼이 성큼 다가왔다.
“엉망이라기보다…… 아슬아슬합니다.”
지척에서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엔 웃음기 같은 건 없었다. 지독히 버석한, 그야 말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진심.
“전하?”
“도무지 눈이 떨어지지 않아요.”
클로이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옅은 눈동자를 보다 무심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제 보니 강직한 눈매 아래 푸른 눈동자에 불이 올라 잘잘 끓고 있었다. 왜……? 의문을 정리하기도 전, 레이얼이 벌린 간격을 단번에 좁혀 다가왔다.
“레이디 아르네.”
“전하.”
고개를 숙여 다가온 레이얼 덕에 그들은 자칫 콧날이 스칠 만큼 가까워졌다. 지척에서 반짝이는 푸른 시선. 일렁거리는 시선에 묶인 듯 꼼짝하지도 못하고 마냥 바라보는 클로이 향해 레이얼이 입을 열었다.
“레이디 아르네, 난 그대가 나의 마지막 피앙세가 되어주길 바라요.”
“…….”
“그 말은……그대 혼자 버텨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저주라는 이름을 달고 몰려드는 ‘불운’에 그대가 쓰러지지 않도록 제가 지켜드리-.”
“전하. 전 아르네입니다.”
클로이는 자신에게 미래를 약속하는 남자의 말을 뚝 잘라버렸다. 방금 제 말중 무엇이 그를 자극한 건진 모르겠으나, 그는 보드라운 속살을 찔린 것처럼 놀라 잔뜩 경계를 세우고 있다. 단호해 보는 표정과 서늘한 말투는 당당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보인다. 옅은색의 눈동자 안에 차곡히 쌓인 불안이. ‘로이’로 살아 그를 오래 두고 본 클로이의 눈에는 이젠 레이얼이 감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달래주어야 했다. 클로이는 한발 다가서서 목소리에 힘을 바짝 주었다.
“아르네는 ‘운’ 따위에 휘둘리지 않아요. 감히, 그럴 수도 없죠. 전 낙법을 알아서 계단에서 굴러도 목이 부러질 일도 없고, 호수에 빠져도 헤엄쳐 나올 수 있어요. 고작 2층짜리 테라스에서 떨어져 절명하는 일도 있을 수 없어요.”
촘촘히 단추를 채워둔 코트 사이에서 나온 가는 팔이 레이얼의 크라바트를 콱 움켜쥐었다.
“전 마지막 피앙세가 아니라, 전하의 신부가 될 겁니다.”
그러니 안심해. 빙긋 웃는 클로이를 바라보던 레이얼이 문득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렸다. 그러나 채 감추지 못한 귀 끝이 새빨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