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 고작 이 정도로 되겠어요?2021.01.26.
제 편이 나타났다고 생각한 황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내쉬. 우리 황자님.”
한숨을 달콤하게 몰아쉰 황후는 조금 전과 달리 한껏 느긋해진 표정이었다.
“공녀, 연회에 잘 참석지 않아 모르려나?”
“내쉬 시오도르입니다. 레이디 아르네.”
기회를 잡은 황후가 추궁하듯 공녀를 몰아세우려는 찰나, 내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받았다.
“마지막으로 뵌 것이 성년전이니, 모르실법합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말을 자른 것으로 모자라 다정하게 구는 내쉬의 모습에 캐서린 황후의 시선이 사나워지던 순간이었다. 내쉬가 클로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클로이의 손등. 손등 입맞춤은 남자가 건넬 수 있는 가장 정중한 인사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맨손이었으면 모를까, 장갑을 ‘벗기는 건’ 금기시되어있다. 모욕하려는 의도가 뻔한 도발에 캐서린 황후의 얼굴이 봄날을 맞은 장미처럼 화사하게 펴졌다. 그러나 클로이는 내쉬의 손을 보고도 태연히 웃었다.
“전하, 덤벙거리는 건 좋지 못한 습관입니다.”
그를 나무라듯 장갑 낀 손을 들어 보이는 모습 그 어디에도 모멸감을 느낀 흔적은 없었다. 첨예한 신경전의 승자는 아르네 공녀였다. 장갑 낀 것을 알았다고 하면 저열한 인사가 될 테니 황자는 영락없이 덤벙거리는 인사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상대는 길롯가를 등에 업은 황자 아닌가, 아르네가 이래도 되는 걸까? 잔뜩 숨죽인 사람들의 시선이 내쉬를 향하던 그때.
“이런, 그럼 다음을 고대하지요.”
분노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내쉬 황자는 다디단 미소를 지으며 내민 손을 접었다. 탁. 엄지와 오므린 네 손가락이 맞물리는 순간, 들릴 리 없는 소리가 울린 것도 같았다. 그건 사랑스러운 표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흉포한 시선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치 갈고리 같은 시선이 얽힌 둘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느릿하게 구른 시선이 손끝에서 클로이의 얼굴을 지나 레이얼로 차례로 넘어갔다. 조금 떨어진 이들은 보지 못했겠지만 마주 보고 서 있던 클로이와 레이얼은 똑똑히 봤다. 희번덕이던 포악한 시선 아래 깔린 이유 모를 집착을.
“부디,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숨 막히는 대치는 내쉬가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끝났다. * * * 황제는 연회가 무르익었을 때야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시작과 동시에 들르거나, 혹은 같이 등장해 황후에게 힘을 실어주었을 평소와 달리 오늘은 꽤나 늦은 입장이었다. 이유야 알만했다. 아마, 누군가가 충분히 즐길 시간을 벌기 위해서 부탁했으리라. 곧은 걸음으로 다가온 황제는 곧장, 클로이를 불러들였다.
“아르네 공녀.”
“제국의 태양을 뵈옵니다.”
“공녀. 마음고생이 심했다지? 얼굴이 말이 아니구나.”
황제의 말에 클로이는 겸양하는 대신 옅게 웃으며 묵례로 대답을 대신했다.
“짐은 아르네의 충정을 잊지 않을 것이다. 공녀.”
“아르네는, 언제나 제국의 검으로 살 것입니다. 폐하.”
“아르네의 긍지를 내가 모를 것인가. 하나 표현에 인색해 다소 아쉬웠을 테지? 황후가 마음을 담아 연회를 준비했으니 닷새간, 즐기며 근심과 피로를 풀게.”
“닷새나…….”
결코, 입 밖으로 꺼내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클로이는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그만 작게 속삭이듯 외치고 말았다. 그 모습이 감격한 거라고 여겼던 것일까. 황제가 처음으로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그러지 않아도 좋네. 황후가 퍽 다정하지 않은가. 그대는 부담 없이 즐기게.”
거들먹거리는 듯한 황제의 말에 클로이는 나붓하게 허리를 굽혔다.
“폐하, 이토록 아르네를 생각해주심에 무어라 감사 인사를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공녀.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오늘, 두 분 폐하께서 아르네를 위해 보여주신 다정하고도 과분한 처사는 가슴 깊이 간직하여 더욱 더 제국에 헌신하겠습니다.”
“아르네답군 공녀.”
숨죽이고 바라만 보던 사람들이 하나 둘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자애로운 황제 내외와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려 충성을 맹세하는 아르네 공녀의 모습은 훈훈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짐이 즐거운 시간을 너무 오래 방해했군?”
“그럴 리가요 폐하.”
황제의 말에 황후가 부드럽게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럴 땐, 슬쩍 맞장구를 쳐주세요. 그래야 짐이 뒤로 빠지는 척 황후를 독점할 수 있을 테니.”
어머나. 달콤한 황제의 속삭임에 사방에서 귀부인들의 탄식이 터졌다. 황제는 무척 자연스럽고 노련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성큼, 한걸음 물러설 때마다 그 뒤를 바쁘게 따라잡는 이들이 한 무리씩 불어났다. 빠질 무리가 빠지고 남은 이들 중 서로 인사를 하며 다시 무리를 만든다. 어느샌가 딱 끊겼던 연주도 다시 울리기 시작하고, 자취를 감췄던 시중인도 다시 나타났다. 이제 진짜 연회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하지만, 너무 자연스러웠기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십 년 만의 칩거를 깨고 나온 황태자와 황제는 서로 인사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는 것을.
첫 춤은 연회의 주인공인 아르네 공녀의 몫이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권리이자 의무였기에, 클로이는 본격적으로 선율이 바뀌자 레이얼이 이끄는 대로 연회 홀의 가운데로 나섰다.
“레이디 아르네, 제게 그대와 춤을 함께 할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하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황태자 전하.”
클로이의 허락에 레이얼은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려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둘의 몸이 부드럽게 밀착하는 것과 동시에 춤이 시작되었다. 오랜 공백이 무색하게 레이얼은 굉장히 노련했다. 허리를 과하게 붙잡거나, 필요 이상으로 힘을 쓰지 않고도 충분히 클로이를 훌륭히 리드했다. 둘은 처음이라는 말이 무색하리만치 호흡이 잘 맞았다. 그뿐인가. ‘시오도르’답게 보통 사람보다 한 뼘 이상은 큰 황태자와 장신의 아르네 공녀는 너무도 완벽하게 어울렸다. 황제의 가슴팍에도 미치지 못하는 캐서린 황후와 달리.
“어머나…… 정말 아름답지요?”
“그러게요. 공녀께서 키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그렇지도 않아요.”
사람들은 곡조가 절정으로 치닫는 동안 넋을 놓고 아름다운 한 쌍을 바라보았다. 달라붙는 끈덕진 시선 탓에 클로이는 내내 미소를 지어야만 했다. 얼굴에 경련이 일 것 같았다. 하루인 줄 알았던 연회가 닷새로 늘어나서라고 생각해서인지 피곤하기도 하다. 무리할 필요 있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한 바퀴 빙글 돌아 품에 안기듯 다가선 클로이가 재빨리 레이얼에게 속삭였다.
“전하, 저는 첫 춤 후에 곧 돌아가려 합니다.”
“레이디 아르네.”
클로이는 레이얼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몸을 바짝 밀착해서 스텝을 밟는 부분이라 본의 아니게 그의 턱밑에서 올려다보는 모양새다. 날렵한 체형이라 그렇지 레이얼 시오도르는 정말 키가 큰 남자였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 번씩, 압도하는 듯한 체격 차이를 느낄 때마다 새삼스럽게 그가 ‘남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기분이 묘하다.
“괜찮으십니까? 역시, 무리하신 거지요?”
연푸른 눈동자가 마치 그녀를 꿰뚫어 보기라도 할 듯 집요하게 얼굴을 훑는다.
“괜찮습니다. 그저 마음이 버거워 그런답니다.”
지레 찔려서일까. ‘쓰러졌던’ 공녀를 걱정하는 게 분명한데, 클로이는 그의 시선이 버겁게 느껴졌다. 감각이 있을 리 없는 옆구리도 괜히 홧홧한 것 같다. 달아나고 싶다. 클로이는 음악에 맞춰 그를 가볍게 밀고는 달아나듯 뒤로 물러나 빙글, 돌았다. 산개하는 꽃잎처럼 층층이 껴입은 드레스가 예쁘게 부풀었다가 가라앉길 기다려, 클로이는 레이얼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넸다. 춤이 끝났다. 다행히. * * * 클로이는 레이얼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눈에 닿는 곳마다 빛 가루를 뿌려놓은 듯 여지없이 화려해, 살짝 현실감이 없다. 발끝이 대리석 위를 붕 떠다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춥진 않으십니까?”
영문 모를 소리에 눈을 깜빡이던 클로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루미넴을 먹어 감각은 없지만 살이 얼어 터지는 한이 있어도 춥다는 소리는 하고 싶지 않다.
“얼뜨기 취급은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아…….”
그 말에 연회장 앞에서의 소란을 떠올린 듯 미간을 찌푸린 것도 잠깐, 레이얼은 다시 물었다.
“그건, 추우시다는 건가요?”
문득 그의 시선이 어깨너머 어딘가로 향했다.
“참을만하다는 말이지요.”
“레이디 아르네께서, 참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럼……”
“제가 코트를 건넬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사 하는 것이지요.”
“네?”
목을 넘어서 볼까지 올라오는 높은 깃과 팔길이가 훌쩍 넘는 긴 소매. 제 어깨에 둘린 코트를 손을 쓸어보던 클로이는 가만히 입술을 감쳐 물었다. 옷을 벗어주다니!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클로이는 좀 멍한 기분이 되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배운 예법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없었다. 거절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입술을 질근질근 씹는 그녀에게 레이얼이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레이디 아르네, 모르셨습니까?”
“무얼요?”
미소짓는 레이얼은 잠깐 사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매끄럽게 말린 입꼬리며,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눈매는 다정하고 친밀해 보였으나, 전혀 그답지 않았다. 보이기 위한 위장된 미소. 딱, 그것이었다. 그런 얼굴을 한 레이얼이 고개를 비틀어 바짝 다가와 입술을 클로이의 귓바퀴에 갖다 붙였다. 필요 이상의 접근에 경계가 솟아 클로이는 어깨가 뾰족이 솟았다.
“연회가 닷새 동안 열린다는 것.”
“……몰랐습니다.”
“꽤 고전적인 수법이군요.”
“기상천외하다고 생각했는걸요. 보통 위로 연회를 닷새나 하나요?”
“위로가 아닌 건 그대도 나도 알지 않습니까.”
레이얼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심지어 ‘클로이’와 레이얼은 오늘 처음 보는 사이가 아니던가. 그녀가 아는 레이얼은 호색한도 무례한 남자도 아니었는데. 무슨 일일까.
“그럼, 레이디 아르네 이것도 모르셨겠군요. 누군가가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
마치 그녀의 속내를 들여다 본듯한 시기적절하게 넘어오는 속삭임. 귀를 울리는 나직한 음성에 방어적으로 솟았던 어깨가 사르르 풀린다. 거봐. 이 남자가 그냥 이럴 리 없지. 반쯤 안긴 것 같은 자세는 변함없건만, 레이얼을 바라보는 클로이의 얼굴에 물렸던 경계는 싹 빠졌다.
“그런데, 고작 이 정도로 되겠어요?”
한숨보다 작게 속삭인 클로이는 제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예쁜 표정으로 웃으며 레이얼에게 안겼다. 움찔. 레이얼의 몸이 경련하듯 희미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