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레이디 아르네2021.01.22.
사방이 눈이 아릴 만큼 화려하다. 내쉬는 그 가운데서도 빛나는 제 모친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아르네’ 공녀를 위로하기 위해 연 연회라더니, 제 모친의 차림은 연회의 주인공이 되고도 남을 만큼 휘황찬란하다.
“……어머나 폐하. 직접 둘러보시는 건가요?”
“아무래도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신경이 쓰이는군요.”
“세상에, 다정하기도 하셔라. 공녀도 폐하의 마음에 금세 기운을 차리겠지요.”
후작 부인의 호들갑스러운 말에 캐서린이 부채를 부드럽게 팔락인다. 부드럽게 겸양하는 모습인 것 같으나, 지극히 계산된 몸짓이다. 부채를 말아쥔 가느다란 손가락에 걸린 묵직한 다이아몬드 반지가 움직일 때마다 더없이 고혹적인 빛을 뿌린다.
“어머나! 폐하!”
아니나 다를까, 반지를 발견한 후작 부인이 숨넘어 가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이렇게 커다란 다이아몬드는 처음 봅니다!”
“아, 이런. 폐하께서 선물로 주신 터라 빼놓고 올 수가 없었답니다. 위로연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화려하지요?”
공녀를 신경 쓰는 듯 난처해하는 표정을 짓는 것까지 무척 자연스럽다.
“화려하긴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공녀가 보기에 민망해 조금 신경이 쓰입니다.”
“폐하, 감히 누가 그런 생각을 한단 말입니까.”
화들짝 놀란 후작 부인을 보아 하니 그 뒤의 일이야 언제나처럼 뻔한 것이라 내쉬는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은 제 어머니의 선량하고도 예쁘게 생긴 얼굴에 참 약했다. 오늘도 사람들은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황후가 민망해하던 모습만을 기억할 것이다. 물론 모후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을 테니 오늘의 이야기는 곧, 적당히 와전되어 황후를 눈치 보게 만든 아르네 공녀가 될까……?
“흠…….”
내쉬는 무료한 듯 잔을 굴리며 연회장 입구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연회는 지루했으나, 오늘처럼 시간이 더디게 흐른 적은 처음이었다.
“내쉬 황자님.”
살짝 카랑한 듯 갈라지는 목소리에 내쉬는 반듯한 미간을 접었다.
“길롯 백작.”
“여기 계셨습니까? 한참 찾았지 뭡니까. 어서 저와 함께 가세요.”
“됐습니다.”
어김없이 번쩍거리는 차림새를 한 길롯을 보자니 이제 한심하단 수준을 넘어서 혐오감이 든다. 모후는 그래도 제 혈통을, 제 이름이 가지는 무게를 알고 처신한다. 하지만 이 작자는 대체 뭐지. 그저 제 누이의 휘광에 기대 거들먹거리기나 할 뿐, 명예도 자긍심도 없는 버러지가 아닌가.
“그러지 말고 가세요. 황자님을 뵙고자 하는 이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답니다.”
이참에, 눈도장도 찍으시고요. 고개를 숙여 바짝 다가온 길롯 백작이 속삭일 때마다 귓가를 스치는 숨소리가 여간 불쾌한 게 아니다.
“괜찮소.”
내쉬는 귀를 움켜쥐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길롯의 패거리라 해봐야 돈푼깨나 굴리는 날파리에 불과하다. 이 황실이 겨우 황금 조각으로 비벼볼 곳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더는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게 느껴진다. 흉흉한 표정에, 근처에 있던 이들이 눈치를 보며 슬슬 물러나는데도 길롯은 물러나긴커녕 손을 뻗어 그를 끌어당기려고까지 했다.
“그러지 마시고-,”
“됐다잖아!”
내쉬가 치근덕거리는 길롯 백작을 향해 새된 목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입구를 지키는 기사의 목청이 우렁차게 울렸다. 그의 날카로운 거절은 기사의 말에 묻혀버렸다.
“레이얼 황태자와 아르네 공녀께서 입장하십니다.”
내쉬는 바람이 일만큼 홱 고개를 돌렸다. 연회장 입구에 들어서는 레이얼과 아르네 공녀를 본 순간, 내쉬는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레이얼 황태자?”
“아르네 공녀예요!”
“이게 무슨 일이야?”
“말도 안 돼!”
사방에서 경악이 터지고 연회장이 무섭도록 들끓었다.
“같이 와?”
희고 가지런한 잇새로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나직한 목소리가 샜다. 이 순간 오직 그에게 선명하게 각인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얽혀 있는 두 사람의 손이었다. 레이얼이 내민 손위에 당연하게 겹쳐진 공녀의 손. 실제로는 레이얼의 손위에 손끝만 살짝 올려둔 것이었으나, 내쉬는 저 둘의 손이 맞닿았다는 것이 중요했다.
“웁!”
내쉬는 울컥 치미는 구역감에 작게 헐떡였다. 태연한 얼굴로 제 등을 떠밀던 레이얼 시오도르가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내쉬, 괜찮겠니?’
“내쉬 황자님, 괜찮으십니까?”
“이거 놔!”
길롯이 헛구역질을 하는 그를 붙들어 부축하려 했으나 내쉬는 거친 손길로 그를 밀어냈다.
“함부로 손대지 말라. 길롯 백작.”
그를 쏘아보는 내쉬의 녹안이 정제되지 못한 감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소름 끼치는 광기 어린 시선. 어떻게든 옭아매 보려던 길롯 백작은 내쉬의 모습에 찔끔해서 물러났다.
“그. 그럼 다음에…….”
발에 채인 개처럼 꼬리를 말고 물러서는 그의 광대가 모멸감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는 숙부가 아니던가. 황자를 소개해달라며 몰려든 이에게 큰소리를 탕탕치고 나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니! 절로 쓴 물이 왈칵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저렇게 독이 올라 있는데 괜히 말을 붙였다가는 정말 더러운 꼴을 보게 되리라. 하릴없이 물러나는 길롯 백작의 눈이 사납게 치뜨였다. 못돼쳐먹은 것. 오냐오냐하며 캐서린이 떠받드니 제가 뭐나 된 줄 알고 사는 망나니. 하지만, 저 꼴 좀 보라지. 레이얼 시오도르가 들어서자마자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지 않나. 제 어미가 아니면 반푼이 취급도 받지 못하는 조무래기 녀석일 뿐이다. 창백한 안색의 내쉬를 보자니 얻어맞은 손등의 따가움이 한풀 꺾이는 것도 같다. 살집 좋은 길롯 백작의 입술이 삐죽, 밉게 일그러지며 비웃음을 그려냈다.
“어머나.”
클로이는 작게 웃었다. 경악한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같이 바보 같았다.
“다들 놀라셨나 봐요.”
“흡족하십니까?”
“전하께선 어떠십니까?”
클로이의 질문에 레이얼은 진한 만족감이 서린 미소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가실까요.”
레이얼은 클로이의 손끝을 살짝 잡아 당겼다. 뚜벅. 그의 발걸음이 신호라도 된 듯 기괴한 침묵이 깨졌다.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경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레이얼 시오도르?”
“진짜 황태자 전하라고?”
클로이와 레이얼은 인파를 가르며 느릿하게 걸었다. 그리고 그 끝엔, 창백하게 질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캐서린 황후가 서 있었다. 우환이 겹친 아르네 공녀를 위로하기 위한 연회였건만, 지금으로 봐선 황후의 쾌차를 빌어야 할 모양새였다.
“제국의 광휘를. 자애로운 분을 뵈옵니다.”
“좋은 자리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캐서린 황후는 그들이 다가와 인사를 올리도록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버릇같던 미소도 어색하게 깨졌고, 시선은 아르네 공녀와 레이얼 황태자 사이를 갈팡질팡 헤맸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건 등 뒤에 서 있던 후작 부인이 작게 그녀를 부르고 나서였다.
“폐하, 폐하? 괜찮으십니까?”
“아아……. 어서 와요.”
평소 다정하고 매끄러운 인사와 달리, 어딘지 삐걱거리는 목소리였다.
“공녀, 몸은 좀 어떤가요?”
“폐하께서 염려해주신 덕에 이렇게 좋은 모습으로 뵐 수 있게 되었답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쓰러졌다던 공녀는 그 어디에서도 병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새하얀 피부는 병자의 것과 달리 맑고 밝게 빛이 났고, 깊은 눈매는 퀭한 것이 아니라 그윽했다. 길게 뻗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내리깔아? 캐서린 황후는 문득, 공녀의 시선이 낮게 깔렸음을 깨달았다. 어지간한 남성의 키만한 아르네 공녀는 당연하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얀! 치미는 굴욕감에 부채를 뼈마디가 도드라지도록 힘껏 움켜쥔 것도 잠시, 캐서린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오호라 이제 보니 공녀께서 훌륭히 성장하셨군요.”
한껏 자애로운 목소리. 성장을 발음할 때 특별히 힘을 준 건 공녀가 어려 보이길 바라서였다. 쑥쑥 자라나는 어린아이는 어른의 귀여움을 받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아르네 공녀는 당황하거나 뜻도 모르고 기뻐하는 대신 방긋 미소지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또각.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공녀가 성큼 다가섰다. 거리를 두고도 올려다봐야 했던 공녀는 가까이에 서자, 고개를 꺾어야 할 만큼이 되었다. 머리 하나 차이.
“폐하.”
깔보기 딱 좋은 키 차이였다. 공녀는 눈만 내리깐 채 사르르 웃어 보였다.
“이렇듯 제게 넘치는 관심을 보여주시니, 그저 황공할 따름입니다. 하나 아쉽게도 성년식을 치른 이후론 키가 단 1센티도 크지 못해 작년에 뵈었을 때와 같답니다.”
공손한 말과 달리 공녀는 대놓고 황후의 말을 지적했다. 황후의 곁에 서 있던 귀부인 하나가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부채를 맹렬히 부치기 시작했다. 파닥파닥파닥. 마치 덫에 걸린 새가 바동이는 것 같이 안타까울 정도로 열성적인 소리였다.
“이런이런, 그랬던가요. 미안한 일입니다. 공녀.”
여전히 나긋한 말투이긴 했으나 말끝이 파르르 떨리고 말았다. 분한가……? 클로이는 캐서린 황후를 보며 살짝 웃었다. 말 끝에 지을 법한 상냥하고 우아한 미소였다. 하지만 지척에 있던 레이얼과 캐서린 황후는 똑똑히 보았다. 의례적인 미소를 짓는 아르네 공녀의 시선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내리깐 눈꺼풀 아래 푸른 눈동자가 얼음을 조각해 넣은 듯 시리기만 하다.
“그나저나 공녀. 소식과 달리 그대가 건강해 보여 몹시 안심됩니다.”
“말도 안 되는 해괴한 소문이 퍼졌다기에, 폐하께 걱정을 끼쳐드린 하여 나왔답니다. 세상 그 누가 감히 ‘아르네’의 안위를 걱정한단 말입니까.”
“공녀. 너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폐하. 아르네는 제국의 검. 그런 아르네의 안위를 이렇게나 함부로 입방아 찧어대는 건, 제국의 안위를 조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레이얼은 자꾸만 삐죽 새 나오는 미소를 참고 또 참느라 이를 지그시 물어야 했다.
“하니, 폐하. 언제라도 좋으니 불측한 자들이 폐하의 귀를 더럽히면, 이리 참지 마시지요.”
아르네 공녀의 말은 충심 가득해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오만했다. 자칫 아르네 공녀를 위로하기 위해 연회를 연 황후를 나무라는 것 같이 들리기도 했던 것이다. 물고 물리는 싸움. 길지 않은 격전 끝에 수세에 몰린 건 캐서린 황후 쪽이었다.
“공녀, 그리 생각해…….”
“쓰러지셨다더니, 괜찮으신가 봅니다.”
억지웃음을 짓는 황후의 말을 자르고 훤칠한 미남자가 끼어들었다. 황후와 똑 닮은 달콤한 얼굴, 바로 내쉬 황자였다. 명백히 대치한 네 사람의 모습에 누군가에게서 꼴깍, 마른 침을 넘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황자의 난입에 당황할 법도 하지만 아르네 공녀는 강력했다. 공녀는 한눈에 보아도 뻔히 ‘황자’임이 분명한 이를 두고도 내리깐 눈으로 싸늘하게 일갈했다.
“폐하의 말씀을 자르다니 무례하군.”
가차 없는 소감에 사방으로 경악이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