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0. 레이얼 시오도르 (40/121)

040. 레이얼 시오도르2021.01.19.

“자리를 비우셨다고?”

“예, 전하. 죄송하지만 다른 날 방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디로 가셨지?”

“그건 알려드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어째서지?”

키릭슨은 내쉬의 공격적인 말투에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인내심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째서냐고.”

“전하, 저는 황태자의 보좌관입니다. 상관의 행선지를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 건 기본입니다.”

예의도 없고 기본도 없는 놈. 키릭슨은 눈앞의 황자를 그렇게 평했다.

“멍청하긴.”

뭐? 순간 입 밖으로 튀어 나갈 뻔했다. 하지만 찰나에 표정이 무너지는 것까진 막지 못해, 그만 고스란히 내쉬에게 읽히고 말았다.

“제대로 들은 게 맞아. 멍청이.”

내쉬는 눈꼬리를 접으며 몹시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기를 쓰고 감추려고 하면 더 궁금해진다는 거 모르나?”

“전하. 아무리 그러셔도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오기 생기게 하는군.”

키릭슨은 입을 꽉 물었다. 상대는 황족. 심지어 길롯을 뒷배로 둔 황자다. 개망나니처럼 굴며 속을 긁어대도 그가 참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황궁을 다 뒤져볼까?”

“…….”

“사람을 풀면 언제, 어떻게 어디로 움직이셨는지 금방 알게 될 텐데.”

그냥 지금 말해 주는 건 어때? 뒷말은 숫제 속삭임이었다. 작정하고 사람을 꾀는 은근한 목소리가 제법 달콤했다.

“사람을 풀면, 나만 알게 되는 게 아니란 걸 명심해.”

거기에 쐐기를 박듯 제법 날카로운 협박까지. 키릭슨은 작게 감탄했다.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것이 여간내기가 아니다. 노회한 귀족가의 수장이나 내보일 법한 능숙함이 아닌가. 과연, 캐서린 황후가 목맬만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다. 키릭슨은 내쉬에게 향했던 시선을 조금 더 멀리 던지며 싱긋 웃었다. 내쉬가 제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그보다 훌륭했기에 레이얼은 ‘황태자’였다.

“이런이런, 누가 들으면 내 부관을 겁박하는 줄 알겠구나.”

“전하, 다녀오셨습니까?”

내쉬에겐 꼿꼿하기만 하던 키릭슨의 고개가 더없이 공손하게 숙여진다.

“으음. 내쉬가 기다리는 줄 알았더라면 빨리 올 것을?”

키릭슨은 레이얼의 말에 볼살을 질끈 깨물었다. 아까부터, 와 있어 놓곤. 내쉬가 자신을 몰아 기어이 선을 넘는 말을 할 때까지 주시하던 것을 뻔히 알고 있었건만. 레이얼은 설핏 굳은 내쉬에게 옅게 웃어 주었다.

“내쉬.”

“네.”

“괜찮겠니?”

말 끝에 레이얼이 붉게 물든 하늘을 가리키듯 한 번, 그리고 아직 예장 전인 내쉬를 향해 한 번 턱짓을 했다. 레이디처럼 이른 아침부터 준비하진 않더라도, 황자인 이상 내쉬도 챙기고 걸쳐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레이얼의 지적은 타당했다. 하지만 내쉬도 바쁜 와중에도 굳이 여기까지 온건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오늘 레이얼 님이 외출하셨대!’

‘그게 뭐. 가끔 외출하시잖아.’

시녀들이 슬며시 눈을 감은 그가 얕은 잠이라도 든 줄 안듯 머리를 매만지며 소곤거렸다.

‘오늘 그런…… 연회 날이니 자릴 피하고 싶으셨나 보지.’

그래도 차마 저주받았다 소리를 입에 올리는 건 무서웠던 모양인지 슬그머니 말을 얼버무린다.

‘자릴 피하긴 무슨. 아르네가로 가셨다던데?’

‘뭐?’

뭐? 생각지 못한 소리에 움찔 떨었으나, 시녀들의 호들갑에 내쉬의 움찔거림은 묻혔다.

‘진짜야 그거?’

‘몰라. 그렇대.’

‘미쳤……! 아니, 아무튼 무슨 염치로 거기에 가신 거래?’

‘모르지 나야.’

거길 왜 간 거지? 더는 들어야 할 것이 없어진 내쉬는 그길로 레이얼의 궁에 달려왔다. 뒤에서 소란이 일었으나 그가 알 바 아니었다. 그렇게 달려온 길. 텅 빈 집무실은 사실이었고, 보좌관은 절대 그에게 행선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이 얼마나 수상한지! 정말, 아르네가로 간 건가? 왜? 레이디 아르네에겐 왜 여태와 달리 구는 거지? 고작 몇 가지 의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득한 불쾌감이 치밀어, 레이얼의 부관을 상대로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소리까지 하고 말았다. 대체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레이얼이 아르네 공녀와 가까워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연회 전 레이얼이 돌아왔다……? 심지어 레이얼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

조각상도 저것보다는 표정을 읽기 쉬울 텐데. 아쉬움도 잠시 내쉬는 옅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얼의 말이 옳았다. 작정하고 표정을 감추는 그에게선 얻어낼 게 없으니, 이만 돌아가 연회준비를 하는 편이 맞다.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뒷머리가 당기는 걸까.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곧 다시 보자꾸나.”

하다하다 인사말까지 의미심장하다. 내쉬는 반 건성으로 인사를 건네곤 황태자 궁을 빠져나왔다. 잠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았다.

“이런…….”

해가 지면 곧, 연회가 시작되는데 아직 머리도 채 만지지 못했다. 계절이 겨울로 접어든 것을 깜빡했다. 자칫 늦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역시, 만나봐야 즐거울 것 없는 사이가 분명하다.

“퉤!”

입안을 맴도는 은근한 홍차향이 짜증나 침을 뱉고 구두로 짓이겼으나 그래도 속이 풀리지 않는다.

‘이야기가 다 끝나셨으면 이만 돌아가 주세요.’

홀로 남겨진 레이얼은 문득 떠오르는 아르네 공녀의 목소리에 나직이 웃었다. 제법 당돌하고, 강단 있는 모습에 솟았던 호감이 매몰찬 한마디에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뜻밖의 축객령에 얼굴이 설핏 굳고 말았다.

‘아직 못 들으셨습니까? 전 오늘 에스코트하러 왔답니다. 레이디 아르네.’

‘들었습니다. 아르네의 사용인들은 제 본분에 충실하거든요. 그러니 돌아가 주십사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공녀는 황태자인 그를 향해, 당당하다 못해 오만하게 명령했다.

‘에스코트를 거절하시는 겁니까?’

내가, 저주받아서? 나와 약혼해서 아르네가 풍비박산 났다고 생각하는 건가? 속에서 쓴 물이 왈칵 넘어왔으나, 레이얼은 가까스로 담담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내 자신에게 붙어 있던 공녀의 새파란 시선이 부드럽게 누그러지며, 기어이 미소를 그려냈을 땐 그도 당황하고 말았다.

‘그럴 리 없잖습니까? 저는 화려한 등장을 좋아하는 편이라서요.’

‘화려한?’

‘전하의 에스코트는 전무후무할 테니, 기왕이면 조금 더 주목받고 싶습니다.’

공녀는 말을 가리지 않았다. 분명히 고상한 어휘를 사용하고 단정한 태도로 발성 또한 훌륭했는데 도통 ‘귀족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건, 그녀의 말투가 매끄럽다기보다는 압도적이라서일까. 레이얼은 등받이에 기대 있던 몸을 일으키며 남은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또다시 아르네 공녀가 떠올랐다. 내내 단정한 표정이던 그녀가 차를 마시던 순간, 몹시 달게 미소지었다. 서늘한 미인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는 굉장했다. 시린 빛이 거두어지며 단번에 사랑스럽게 변한다.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바라보던 그의 시선을 눈치챈 공녀가 살짝 겸연쩍어하며 덧붙였다.

‘좋아하는 차거든요.’

‘이거 내가 좋아하는 건데!’

그 순간 레이얼은 공녀의 위로 허세를 부리던 제 부하의 얼굴이 덧씌워지는 착각이 일었다. 익숙한 이와 겹쳐 보이는 모습 덕일까. 안 그래도 우호적이던 감정이 한층 더 깊어졌다.

‘저도 좋아합니다.’

‘알아요.’

‘네?’

‘표정에 드러나거든요.’

“흐음…….”

레이얼은 차게 식은 찻물을 한 모금 더 마시며 짧게 웃었다. * * * 해가 졌다. 창밖을 내다 보던 클로이는 마지막 햇살이 저물자마자 부채를 챙겨 들고 몸을 일으켰다. 모든 준비는 끝났고, 시간이 되었으니 움직일 때였다. 대리석 바닥을 드레스 자락이 스치는 소리만이 유일한 가운데 로지가 따라붙었다.

“기사단 배치는?”

“끝났지요. 오늘 아가씨께서 귀택전까진 개미 한 마리 들어올 수 없을 겁니다.”

“어떻게든, 아르네를 끌어내리고 싶어 할 테니, 연회 때 반드시 암살자를 보낼 거야. 조심에 조심을 더해도 부족해.”

“걱정 마세요. 에반 님이 공작님과 소공작님의 곁을 지키고 있잖아요.”

“로지도 남아주면 좋겠는데.”

“잊으셨어요? ‘아르네’에 아가씨도 포함인 것을요. 심지어 ‘저주’를 완성하고 싶어 할 테니, 어떤 의미로는 아가씨가 제일 위험해요.”

“로지 나는 제1 사냥꾼인…….”

“공작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죠. 그런데 그런 공작님도 당하셨다고요.”

로지의 지적에 클로이는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서서히 어둠이 스미는 하늘을 바라보던 로지가 클로이를 재촉했다.

“가시죠. 지금쯤 출발하면 딱 맞아요.”

그리고 정확히 한 시간 후, 클로이가 탄 마차가 황실 정문을 통과했다. 몰려든 마차가 빼곡해 황실 정문 어귀에서만 삼십 분을 기다려야 했다. 물론 오늘 연회의 주인공임을 알린다면, 더 수월하게 입장할 수 있었겠지만 ‘주목’을 받는 건 지금이어서는 안 됐다. 그래서 부랴부랴 공작가 마차에서 문장도 떼고 온 것이 아닌가. 오래지 않아 마차가 멈추어 서자 클로이는 로브를 두른 채 조용히 내렸다. 사방이 어수선했기에 아무도 그녀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녀가 걸친 것은 수수한 디자인의 로브이기도 했지만 로브를 걸친 건 대부분 남주의 귀족들이었다. 그래서 아마 다들 생각기에 남부의 한미한 귀족 영애가 수도 추위에 놀라 허겁지겁 껴입은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드레스 위로 로브를 걸치다니. 촌스럽게!”

“누가 아니래요. 그 잠깐도 못 참고.”

이것 봐. 클로이는 들으라고 속닥거리는 소리에 소리 없이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황실내에서 마차 사용은 금지다. 모두 정문을 통과하면 곧 내려서 걸어야 했다. 그것은 황족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불만을 품은 이는 없었다. 사람들은 치렁한 차림을 해서 열심히 걸었다. 연회장 정문에 도착한 사람들은 걸어오느라 흐트러진 차림새를 정리하느라 또다시 한번 분주해졌다. 클로이는 로브를 벗어 로지에게 건네고 연회홀 문 앞에 섰다. 그러나 연회홀 앞을 지키는 기사는 그녀를 보고도 신분을 묻거나 초대장을 확인하지 않았다. 로브를 벗는 그녀의 모습에 낮잡아 보고선 무시한 것이다. 너같은 걸 굳이 알려야 하느냐는 듯 시선이 고압적이다. 클로이는 그런 기사를 향해 빙긋 웃어 주었다.

“신분 확인.”

그제야 그가 인상을 구기고 마지 못해 입을 뗐다.

“어느 가문의 누구이십니까?”

“클로이 아르네. 아르네 공녀다.”

“아르네 공녀시라…… 아, 아, 아르네?”

클로이는 제 이름에 얼떨떨해하는 기사를 향해 빙긋 웃더니 그의 뒤를 바라보며 웃었다.

“정신 차리시게.”

“아, 아르네 공녀님이시라고요?”

“진정하래두.”

허공을 향해 클로이가 손을 곧게 뻗자, 기사의 뒤에서 나온 탄탄한 팔이 부드럽게 손끝을 감아쥔다.

“제가 기다리게 한 건 아닙니까?”

“그럴 리가요. 마침 딱, 맞춰 오셨습니다.”

귀를 울리는 미성이 어쩐지 낯설지 않다. 기사는 펄쩍 뛸 듯 놀라 뒤를 돌아보더니 그만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 외쳤다.

“레, 레, 레이얼 황태자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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