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9. 낯설지 않은 그대 (39/121)

039. 낯설지 않은 그대2021.01.15.

“황태자라고?”

레이얼이 왔다는 소리에 클로이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르네 공녀로 그를 만난다는 건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일이라, 지금 클로이는 서 있는 게 용할 만큼 잔뜩 당황해버린 상태였다. 침착하게 굴고 싶었지만, 감각도 없는 손끝이 차게 식는 게 느껴지는 착각이 든다. 만나면 들키고 말 거야.

“왜, 왜 왔대?”

로지는 얼굴이 하얗게 떠서 안절부절못하는 클로이의 모습에, 황태자의 별명을 떠올렸다.

‘저주받은 황태자’

지금 아르네에는 상태가 위중한 이가 둘이나 있다. 물론 흉수가 누구인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그것과 불안은 별개의 문제였다. 겁에 질린 듯 잔뜩 곤란해하는 클로이의 모습에 로지는 오히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아가씨. 진정하세요.”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로지는 빽, 소리를 지르는 클로이를 보며 가까스로 상식적인 대답을 꺼냈다.

“진정 못 할 이유는 뭐예요? 피앙세를 만나러 오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요?”

“그러니까 왜 갑자기!”

“에스코트하러요.”

“여태 칩거하셨잖아.”

“잘된 거 아니에요? 왜 이렇게 화를 내세요?”

“누, 누가 화를 내. 십 년 동안 칩거하시던 분이 갑자기 에스코트하러 오셨다니 당황스러워서 그러지.”

“일이 잘되려니 이렇게도 풀리는 거예요.”

그럴 리가. 클로이는 제게 내민 로지의 손을 맞잡고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모르는 로지는 웃는 얼굴이었다.

“공작님도 소공작님도 누워 계시는 통에 우리 아가씨가 홀로 입장하셔야 해서 마음이 얼마나 안 좋았는데요.”

“정 안되면 에반에게 부탁해도 되는걸.”

이것 봐. 이런 속 편한 생각을 한다니까.

“에반 님이 아무리 작위가 있어도 일단은 아르네의 ‘집사’인 것을요. 사람들 눈에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죠.”

로지는 자리에서 클로이를 일으켜 세워 드레스 밑단을 두드려가며 부풀렸다. 여기서 더 펄쩍거리면 의심을 사고 말리라. 클로이는 제 목소리가 여상하게 울리길 빌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황태자께선?”

“귀빈 응접실에 모셨지요.”

말이 끝나는 것과 무섭게 로지의 손이 드레스에서 떨어졌다.

“다 됐어요. 이제 그럼 가실까요?”

로지의 손은 활짝 열린 문밖을 가리키고 있었다. 또각. 발을 내딛는 클로이의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뜻밖의 귀한 손님이 오셨다는 소리에 공작의 침실을 지키던 에반이 불려 나왔다. 아가씨의 단장이 아직이라며 로지가 애걸복걸했기 때문이었다. 황태자 정도면, 부집사에게 맡겨서 될 일이 아니다. 에반은 의자에 앉은 황태자의 모습에 감탄하고 말았다. 아르네 공작이며, 소공작을 오랫동안 봐와 어지간한 얼굴엔 그다지 감흥이 일지 않았는데 레이얼 시오도르는 어지간한 정도가 아니었다. 시오도르의 역작인가……? 길롯가와 척을 져 상당히 수세에 몰려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 응접실에 앉아있는 그림 같은 남자에게선 궁지에 몰린 자 특유의 초조함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찻잔을 집어 든 손끝은 단정하고, 찻물을 머금는 얼굴은 고요하기만 하다. 살짝, 내리깐 눈이며 향을 음미하는 별것 아닌 태도에서도 품위가 느껴질 정도로 고아한 인사다. 곁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던 에반은 문득, 공작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를 넘은 황제의 횡포와 길롯의 패악을 아르네가 받아줄 의무는 없다. 그런데도 공작은 번번이 참았다. 어째서냐고 다들 분통을 터트렸으나, 그때마다 공작은 아르네는 제국을 지킬 뿐이라는 다소 원론적인 답을 해 주었기에 에반 역시 진짜 이유가 궁금하던 차였다. 그런데 그 이유를 지금 알 것도 같았다. 레이얼 시오도르. 길롯이 부리는 하이에나에게 엉망으로 뜯기면서도 ‘제국’을 위해 소신을 굽히지 않는 황태자. 기꺼이 제 혈육인 황제와 척을 지는 다음 대의 ‘시오도르’. 궁지에서 몰려서도 오연하고 빛을 뿜는, 저 남자는 희망을 품기에 충분했기에 조금 더 참아볼 만 했다.

“향이 좋군.”

“감사합니다.”

에반은 상념에 빠져있던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매끄럽게 대꾸했다.

“한잔 더 드릴까요?”

“블랙잉그리드인가?”

“예.”

“꽤 까다로운 차인데. 공작께서 차를 즐기시나 보군?”

“아닙니다. 공녀님께서 즐기시는 차랍니다.”

“그래?”

그린 것같이 매끄러운 남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물렸다.

“마음에 드시면, 한잔 더 드릴까요?”

“사양하지 않겠네.”

에반이 막, 레이얼의 찻잔을 채우던 순간이었다. 똑똑. 의례적인 노크 소리와 함께 또각, 가느다란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귀한 분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귀빈응접실에 들어선 건, 클로이 아르네. 바로 얼굴 한 번 못 본 그의 일곱 번째 피앙세이자, 아르네 공녀였다. 아르네 공작을 보고 짐작하긴 했으나 공녀 역시 서늘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그래서인지 채도 높은 새파란 눈동자가 괜히 낯익다.

“불쑥 찾아와 폐가 된 건 아니겠지요?”

레이얼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넸다.

“그럴 리가요.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디 아르네는 그가 허리를 펴는 것과 동시에 발걸음을 뗐다. 춤을 추듯 우아하고 가벼운 걸음걸이가 꽤 인상적이었다. 아르네의 혈통이라는 걸 알아서일까. 곧게 뻗은 하얀 목덜미와 가는 허리가 드러나 있는데도 시선이 길쭉하게 빠진 팔뚝이며 어지간한 남자만한 키를 가늠하며 그녀의 무위를 궁금해하게 된다.

“공녀님. 차를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고마워 에반.”

즐긴다는 말처럼, 공녀는 집사가 건네는 차를 보고 얼굴이 환해졌다. 조금 전까지 서늘하던 인상에 미소가 더해지자 믿을 수 없이 사랑스러워진다. 부드럽게 접히는 눈꼬리며 빛을 머금은 벽안이 꼭 로…….

“연회까지는 시간이 좀 있는데, 티푸드를 내오라 할까요?”

레이얼의 상념은 공녀의 상냥한 질문에 뚝, 끊어졌다. 뭔가 떠오르려던 참이라 아쉽기 그지없었으나 레이얼은 제게 질문을 건넨 공녀에게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혹시 꺼리는 것이 있으실까요?”

“그런 건 없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공녀의 뒤를 지키던 집사가 소리 없이 자리를 비웠다. 문을 여닫을 때도, 구둣발로 대리석 바닥을 디딜 때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스물대여섯쯤 되어 보이는데, 수십 년을 수련한 기사를 상회하는 기량이다. 레이얼은 감탄했다. 일개 집사가 인기척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지우다니. 역시 아르네 답다고 해야 하나. 레이얼은 웃음을 삼키며 시선을 공녀에게 돌렸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것은 공녀 쪽도 마찬가지였다. 찻잔을 들고 마시고 다시 내려놓는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 매끄럽고 우아했다. 심지어 차를 마신 후 두 손을 모아 무릎 위에 두는 자세도……. 레이얼은 가지런한 공녀의 손끝을 보고 고개를 슬핏 기울였다. 공작에게 눈이 익어서일까. 공녀의 모든 것이 익숙하다. 길게 뻗은 속눈썹도 명징한 벽안도 고상한 몸짓도. 그리고 두 눈 밑에 드리워진 희미한 피로감마저도. 익숙하다고 자꾸 생각해서일까, 공녀에게서 로이가 겹쳐 보인다. 물론 그녀가 로이가 아니라는 건 안다. 닮은 듯 하나, 공녀와 로이는 분명히 달랐다. 그중 하나가 말투였다. 끝을 가볍게 날리는 수도의 억양과 달리 공녀는 표준 제국어를 쓰긴 하나, 말끝이 한 번씩 눌리며 북부의 억양이 묻어난다. 그래서인지 목소리도 공녀쪽이 조금 더 나직한 것도 같다.

“……가요?”

“예?”

상념이 길어져, 공녀의 말을 놓치는 무례를 범하고 말았다. 레이얼은 자신의 답을 기다리는 공녀를 향해 곧장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아르네. 말을 놓쳤습니다.”

“아니에요. 그저 서류를 들고 오셨기에 혹시 바쁘신 건 아닌지 여쭈어본 것이랍니다. 중요치 않은 것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사석에서 나눌 때나 쓰는 가벼운 말투이나 공녀의 발성이 좋아서인지 거부감없이 귀에 쏙쏙 박힌다. 레이얼은 신기하리만치 그녀를 친근하게 느끼는 자신에게 실소했다. 오랜만에 자신을 적대하지 않는 이를 만나서 그저 다 좋아 보이는 건가? 딱하기도 하지. 고소와 다르게 그의 손은 착실히 봉투를 열어 안에 담긴 서류를 꺼내놓았다.

“레이디 아르네. 이것은 그대에게 드리려 가져온 것입니다.”

“제게요?”

“원래는 약혼식을 치르며 건네게 되어 있는데, 서류로. 흠. 치러진 터라 제때 전달되지 못했더군요. 그래서 챙겨 왔답니다.”

레이얼은 긴 설명 대신 가지고 온 서류를 공녀 앞으로 쭉 밀어주는 쪽을 택했다.

“확인해 보십시오.”

공녀는 두말없이 서류를 확인했다. 확확 넘기는 손길이 경쾌했다. 내리깐 눈꺼풀 아래 푸른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공녀가 서류 한 장을 읽는 덴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정말 엄청난 속도였다.

“품위유지비에 관련한 서류네요. 결혼식 전까진 현물로, 결혼식을 올린 후엔 광산으로 대체하게 되어 있군요.”

광산이라니. 작게 덧붙인 소리에 웃음기가 선명했다.

“재경부에서 매달, 매년 집행하려면 일이 번거로우니, 잔꾀를 낸 것이지요.”

“갖다 주는 게 귀찮으니 직접 채굴해서 쓰라는 거죠?”

이렇게 노골적으로 되물을지 몰랐던 레이얼이 순간 움찔했다.

“죄송합니다. 아직 수도식으로 말하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아, 아닙니다.”

공녀의 사과는 거침없는 말투처럼 담백하고 직접적이었다.

“북부식의 말투는 익숙하기도 하고, 이유도 잘 알고 있으니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유를 아신다고요?”

“아르네 공작께 들은 적 있습니다. 북부는 늘 준전시 상태라고요. 수도 귀족들처럼 에둘러 말했다간 괴수 배 속에서 인사를 나누게 될 거라고 하시던걸요.”

“……아버지께서.”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짓고 있던 공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레이얼은 아차 싶었다. 이렇게 무신경하다니. 초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르네 공작과 소공작의 이야기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태연히 그들을 입에 올리는 바보짓을 하다니.

“레이디 아르네, 죄-.”

“그 말은 안 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사과하실 일도 아니고, 아르네 공작의 일을 입에 올리지 못할 이유도 없으니까요.”

삽시간에 표정을 갈무리한 공녀는 조금 전과 달리 웃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얼의 눈에는 보였다. 저건 진짜로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과하지 않게 당겨진 입꼬리와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가 진심으로 웃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의 눈에는 공녀의 벽안에 새파랗게 날이 오른 게 보였다.

“일부러 시간 내어 이렇게 서류까지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재 품위 유지비가 미집행 되었으니, 집사를 통해 청구토록 하겠습니다.”

“네. 그러십시오.”

“그리고 늦어진 집행일만큼, 위자료를 청구하려고 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네?”

레이얼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질문에 공녀는 조금 전보다 짙게 웃으며 한자 한자 똑똑히 발음했다.

“늦어진 만큼, 연체료를 받겠다는 말입니다. ‘대금’은 재경부의 것이 아니라 제 것입니다. 무단으로 편취한 것은 아니라고는 하나, 누락한 것은 사실이니 그에 맞는 보상을 해야 맞습니다.”

“…….”

“하니, 제국법에 따라 일할율을 계산해서 함께 청구토록 할 생각인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빛을 머금은 벽안이 마치 보석같다. 레이얼은 야무진 공녀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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