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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 그가 왔다 (38/121)

038. 그가 왔다2021.01.12.

로지가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클로이가 가리킨 것은 코르셋으로 허리가 부러지도록 졸라매야 입을 수 있는 ‘수도식’ 드레스였다. 일전에 사람을 졸라 죽이는 용도가 분명하다며 클로이가 내팽개쳤던 것이기도 했다.

“아가씨. 저건 코르셋을 입어야 하는데요?”

“입었어.”

“예?”

“숨 막히신다면서요?”

“수도에선 요즘 이런 게 유행이라며?”

“사람이 입는 게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지금은 그때와 다르지. 뭐든 조롱거리가 될 텐데. 콧대도 권세가 있어야 세우는 법.”

아르네가 휘청이고 있는데 수도 유행과 동떨어진 엠파이어 식의 드레스를 입었다간 공녀의 취향이 아니라, 북부의 촌스러움으로 치부되고 만다. 로지는 클로이의 말에 분한 표정을 짓던 것도 잠시, 이내 늘어둔 보석이며 부채들을 싹 걷어치웠다. 다시 내온 것은 클로이가 가리킨 옷과 한 쌍으로 맞춘 듯 어울리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코르셋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그건 혼자선 못 입는 건데?”

“잘.”

“……어디 봐요. 제가 다시 한번 봐 드릴게요.”

다가서는 로지를 두고 클로이는 그대로 입고 있던 홈드레스를 훌렁 벗어버렸다. 아주 단단히 둘린 코르셋과 깔끔하게 차려입은 속 드레스는 이미 완벽했다.

“향수나 줘. 지금부터 뿌리는 거잖아.”

향수는 속드레스부터 차곡차곡히 쌓아 올린다. 가장 안쪽에 뿌리는 것은 짙고 오래가는 것.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손목과 귀 뒤에 뿌리는 것은 금방 날아가는 것으로 겹겹이 쌓아 향을 섞는 것 역시 요즘 유행이었다.

“참 공들인단 말이야.”

허리를 살짝 숙이는 클로이의 모습은 말 그대로 ‘공녀’다웠다. 우아하고, 지극히 고고하다. 손끝으로만 치맛단을 들어 움직임을 절제하는 것은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몹시 자연스럽다. 역시, 혈통이란 따로 있는 걸까. 로지는 클로이를 바라보며 짧게 웃었다. 상처 때문에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하는 클로이의 사정을 모르는 로지의 착각이었다.

“나처럼 게으른 사람은 북부가 맞지. 무슨 향수를 예닐곱 번이나 뿌린담. 북부선 아무도 향수를 뿌리지 않는다고.”

뒷말을 붙이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채신머리없이 투덜거리는 공녀님의 모습에 로지의 표정은 빠르게 식었다.

“게으른…….”

“그렇지 않아 로지? 향수 같은 걸 뿌렸다간 괴수에게 ‘맛난 먹이가 여기 있습니다!’ 하게 될 거라고.”

“예예, 오늘 저녁거리가 바로 여깄지요! 하게 될 거예요.”

한숨을 푹 쉬며 로지가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 공녀로 태어나 북부인으로 살았던 시간이 더 긴 분이다. 아르네를 위해 ‘공녀’다워 보이게 행동하는 것이 고맙다고 해야 할 판이다. 로지는 긍적적이고 태세 전환이 빨랐다. 부디 연회에서 클로이가 입을 떼질 않길. 그 누구보다 고고하고, 아르네답게 빛나길 빌며 드레스 밑단에 향수를 뿌렸다. 칙, 소리와 함께 정제된 향이 허공을 달콤하게 물들였다. 치장은 이제 시작이었다.

‘쉬쉬하며 감춰서 괜찮았어?’

‘오히려 싸고돌면 덜 하지 않을까?’

레이얼은 머릿속을 헤집는 낭랑한 목소리에 길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릿속이 시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건 이쪽으로 가져와!”

아니다, 시끄러운 건 그의 머릿속만이 아니었다. 지금 온 황실이 어수선했다. 무려 ‘아르네’를 위한 연회를 고작 며칠 만에 열려고 하니 황실이 들썩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중 겉으로 보기에 한가한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십 년간 이어진 기나긴 추모에 사람들은 그를 자연스레 사교계에서 제외했다. 그의 보좌관 키릭슨 조차도 그에게 연회에 가실 준비를 해달라 조르지 않았다.

“…….”

창밖으로 종종걸음치는 시종들과 연신 짐을 나르는 일꾼을 바라보던 레이얼이 문득 입을 열었다.

“키릭슨 오늘 연회가 있다지?”

“예예.”

“무슨 연회지?”

“아……. 음. 황후 폐하께서 주관하시는 연회랍니다.”

서류를 넘겨 가며 숫자를 대조하는 키릭슨은 반쯤 건성이었다. 재경부에 내야 하는 서류 마감이 세 시간 앞으로 다가왔다.

“망할 자식들.”

레이얼은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 고군분투하는 키릭슨을 바라보았다.

“무슨 연횐지 넌 모르겠군?”

“예예.”

“참석은?”

“안 합니다.”

말끝에 키릭슨이 살짝 웃었다. 내내 그를 괴롭히던 숫자를 기어이 찾아내고 말았다.

“하…… 진짜 눈 빠지는 줄 알았네.”

재경부 녀석들은 다른 곳에는 그러지도 못하면서 꼭, 황태자 궁 서류에만 눈에 불을 켜고 덤볐다. 소문에 황태자 궁 전담 인원만 열이 있다는 말이 돌 정도로 재경부에서는 황태자를 못 잡아 먹어 안달이었다. 그도 그럴 게, 재경부 관리직에 있는 이들의 반수 이상이 길롯가의 직계 방계 인사들이었다. 내쉬 황자를 지지하는 인사들이니 그 처지를 이해하지만, 매번 이런 식으로 꼬투리가 잡힐 때면 적잖이 열 받는 건 별개다.

“금화 하나도 안 되는 금액이 맞지 않는다고 서류를 반려하다니. 이 벼락 맞을 것들.”

펜촉에 잉크를 듬뿍 먹여 숫자를 수정하는 키릭슨은 툴툴거리는 것과는 별개로 두 눈에서 광이 번쩍번쩍 났다. 지금 이 순간 희열이 가득한 젊은 부관의 머릿속엔 ‘재경부’, ‘망할 놈’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데 레이얼은 내년 예산 전부를 걸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좀 전에 제 상관이 무얼 물었는지도 기억 못 할 터였다.

“자네는 왜 참석하지 않지?”

“왜냐뇨. 전하께서도 참석하지 않으시는 곳에 제가 뭐하러 갑니까?”

“본의 아니게 내가 자네의 사교활동을 막은 꼴이 되었군.”

“그런 사교 안 해도 인기 만발이랍니다! 특히 재경부가 어찌나 집착하는지.”

탁, 소리 나게 펜을 내려놓는 키릭슨의 눈 밑은 피로에 절어 새카맸다.

“글쎄, 어떻게든 한마디라도 더 해보려고 글자를 조각조각 깨뜨려서 읽는다니까요?”

“저런……. 그런 영양가 없는 것들 말고는 없는 건가?”

“영양가는 없을지도 몰라도 돈은 꽤 됩니다.”

“키릭슨 고어. 혹시 약혼했나?”

“그럴 리가요. 그랬다간 재경부 녀석들이 눈이 뒤집혀서 침실까지 쫓아올걸요.”

제깐엔 농담이라고 한 모양이겠으나, 레이얼의 표정은 점점 더 딱딱하게 굳었다.

“연회 초대장은 왔나?”

“그럼요. 또 이런 걸로 트집잡힐까 봐 초대장만은 칼같이 옵니다.”

제가 또 보관을 기가 막히게 해 놨죠. 키릭슨은 잉크가 묻은 손을 손수건으로 세심하게 닦아내고 나서야 황금빛 봉랍이 붙은 편지를 들어 보였다.

“잉크 자국 나면 말 나올까 봐서요.”

놀랍도록 방어적인 모습엔 더는 의례적인 웃음도 나지 않는다.

“그래서, 뭐라고 쓰여 있지?”

힐끔. 레이얼의 시선이 다시 한번 분주한 창밖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정오의 햇살은 꽤 강렬했기에, 와글와글하게 모인 이들의 번잡함이 너무도 선명하게 망막에 맺힌다.

“읽어드려요, 아니면 요약해요?”

“마음대로.”

“전하의 칩거를 존중하니 연회는 염려 마시고 편하게 결정하시랍니다.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기에 전하께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데요?”

“오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뭐, 보내긴 하겠지만 너도 올 생각도 없을 것이고, 나도 네가 오지 않길 기대한다는 뉘앙스네요.”

“짧게.”

“얼씬도 마.”

감히 황태자 앞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친 언사에 레이얼은 문득 짧게 웃었다.

“아르네를 위한 연회를 열면서, 피앙세인 나더러 얼씬도 말라니…….”

“……뭐 한두 번도 아닌걸요.”

“심지어 얼굴 한번 못 뵌 내 피앙세께서 오신다는데 말이야.”

“전하?”

재경부에 달려가 의기양양하게 서류를 집어 던질 생각에 들떠 있던 키릭슨은 문득 대화가 몹시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왜 이런 걸 물어보세요? 꼭 참석이라도 할 것처럼?”

제가 하고서도 참 이상한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아까부터 뒷머리가 당기는 느낌에 왠지 확인받고 싶었다.

“키릭슨.”

“전하, 그런 눈빛은 싫어요.”

레이얼이 아직 뭐라 한 것도 아닌데 키릭슨은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키릭슨 고어.”

“안 돼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지금 표정이 딱 그거라고요. 키릭슨 전서구 한 마리 구해와. 할 때 그 표정이요.”

“오……?”

“안 돼요. 안 돼. 저 그때 전서구 구해오느라 수명이 반백 년쯤 날아갔어요. 뭔진 몰라도 하지 마세요.”

“걱정 말렴. 그런 것 아니니까. 그저 넌 마차나 준비하면 돼.”

“안…… 마차요?”

생각보다 점잖은 주문에 방정맞게 나풀거리던 키릭슨의 손이 딱 멎었다.

“마차면 돼요?”

“그래.”

거의 동시라고 할 만큼 떨어지는 즉답에 키릭슨은 활짝 펴진 얼굴로 서류를 집어 들었다.

“재경부에 들르게?”

“예예.”

“잘됐네. 공녀께 지급되어야 할 품위 유지비는 대체 언제 승인해줄 건지도 확인해와.”

“아…… 네네.”

“답을 들어와. 가는 길에 말씀드리게.”

“가는 길? 어디 가시는데요?”

뒤늦게 위험을 감지한 키릭슨의 눈이 동그래졌다. 레이얼은 시시각각 희게 질리는 제 부관을 향해 최대한 상냥하게 속삭였다.

“어디겠어. 아르네 공작저지. 연회가 있는데 에스코트는 당연하지 않나?”

“에, 에, 에스코트요? 설마, 연회 참석하시는 건 아니죠?”

“왜 아니야?”

그의 산뜻한 대답에 가엽게도 키릭슨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 크게 치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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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고 문지르고 또 바른다. 빗고, 조이고 꽂고 또 꽂는다. 클로이는 몇 시간째 이어지는 치장에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지루해진 게 아니라 체력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감각은 없으나 몸은 쉬기를 원한다는 신호를 쉬지 않고 보내고 있었다.

“하암……. 아직 멀었어?”

하다하다 이젠 손톱 끝에 깨알만 한 보석을 붙이는 로지에게 클로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연회라는 이름의 선전포고를 받았다. 클로이도 가서 지고 올 생각은 없고 로지의 의욕도 이해하지만, 이건 과했다. 이건 그러니까, 출정 전 기사가 갑옷 무게에 압사당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나?

“이것만요.”

이미 수백 번째 들은 같은 대답을 로지가 또 한 번 중얼거렸다.

“이제 끝내. 지쳐. 나 어제 굉장했다니까.”

“그러니까 이 정도라고요.”

“너무 과하면 북부 촌뜨기라고 흉볼 거야. 모자라는 건 내 미모로 메꿀게. 그만해.”

핀셋으로 사파이어를 집어 들던 로지가 코웃음을 쳤다.

“……언제나 넘치는 건 미모가 아니라 우리 아가씨의 자기애죠.”

“우리 로지가 아빠랑 오빠만 보더니 눈이 너무 높아졌어. 수도에서 나 정도면 얼마나 준수한지 모른다?”

두 주종의 말다툼이 슬슬 유치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쪽저쪽 할 것 없이 모두 진심이었기에 보나마나 장기전이 될 터였다.

“그 준수한 분 대체 어디 계시는-.”

입꼬리를 비틀어 못된 표정을 지은 로지가 한마디 더 하려던 순간이었다. 똑똑. 얌전한 노크 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공녀님.”

“응?”

“로지님을 잠깐 뵙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그럼.”

대답을 하면서 클로이는 로지에게 턱짓을 했다. 클로이의 치장만으로 준비가 끝나는 게 아니라, 이미 몇 번째인지 모를 만큼 사람들이 로지를 찾았다. 그래서 대답하는 클로이도 문을 열고 나서는 로지도 태연했다. 마차랑 말 색도 정했고 말을 몰 사람도 아까 알려줬는데……? 아직도 남은 게 있단 말이야?

“하아암…….”

피로에 전 머리로 졸지 않으려 생각을 쥐어 짜내고 있을 때였다. 쾅, 하는 소리와 문을 힘껏 열어젖힌 로지가 사색이 되어 뛰어 들어왔다.

“큰일 났어요!”

“뭐? 왜!”

희게 질린 로지의 얼굴에, 반사적으로 클로이도 눈이 동그래져 잔뜩 놀란 표정이 되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어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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