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발밑에 고이는 붉은 웅덩이2021.01.08.
근위대는 그래도 할만하다 생각했었는데, 레이얼의 기사는 아예 그 결이 달랐다.
“이크!”
클로이는 옆구리로 들어오는 검을 피해 허리를 한껏 젖혔다. 낭창하게 꺾이는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검이 스쳐 지나간다. 전신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었다. 가까스로 목표물은 손에 넣었으나, 클로이는 지금 궁지에 몰렸다. 복도 끝. 퇴로는 없고 등 뒤는 벽이다. 그녀의 앞에 있는 것은 서른 명의 기사들이었다. 백작의 기사들은 초반에 전부 나가떨어졌기에 남은 이들이 진짜 전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까운 계단 쪽은 이미 기사들이 겹겹이 싸고 있다.
“후아……. 귀경들은 좋은 주인을 모시고 있는가 보군.”
“레이디.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빠르게 검을 회수해 그녀를 겨눈 기사가 정중하게 되물었다. 레이얼의 기사들은 칼끝에 자비를 두지 않았으나 말투만은 시종일관 점잖았다.
“날 이렇게 고전하게 할 정도의 수준이라니, 주인이 돈을 아끼지 않고 훈련을 시켰다는 뜻이지.”
“칭찬 감사히 듣겠습니다. 레이디, 오늘 그대를 압송해 주군께 그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귀경의 포부는 잘 들었소.”
“이쯤에서 투항할 생각은 없으십니까?”
퇴로 없이 앞뒤로 완벽히 막힌 상황. 정면 돌파만이 답인데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결국 그녀는 잡힐 것이다. 살아서건 죽어서건. 기사는 이왕이면 ‘살아갈 것’을 권하고 있었다.
“귀경의 이름은?”
“지그프리트입니다. 레이디.”
“좋소, 지크. 점잖은 기사에게 감사함을 담아 충고 하나 하고자 하오. 엎드려!!!”
벼락같은 고함과 함께 클로이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집어 던졌다. 기사들은 날아온 물건을 피해 반사적으로 전부 엎드렸으나, ‘지크프리트’라고 소개한 기사만은 속지 않았다. 하지만 도주는 찰나의 틈이면 충분했다. 클로이는 엎드린 기사를 디딤대 삼아 높이 도약해 그대로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옆구리로 쇄도해오는 칼날을 느꼈으나 방어를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스걱.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와중에 등 뒤에서 익숙한 고함이 울렸다.
“레이디가 도망간다! 잡아라!”
“허억……. 헉.”
상냥한 말투에 그렇지 못한 검술이란 이런 거였나. 클로이는 홀켄 백작저에서 도주하자마자 붕대로 배를 단단히 감았다. 검상 입은 곳을 졸라맬 땐 그대로 기절하고 싶을 만큼 아팠으나, 핏자국을 남기면 반드시 잡히고 만다. 클로이는 황궁 반대편에서 상처를 수습하고 충분히 시간을 끈 후에야 다시 움직였다. 달릴 때마다 하늘이 노랗게 보일 만큼 아팠으나, 클로이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대체 어떻게 레이얼의 침실까지 왔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을 만큼 정신이 없었다.
“로이!”
밭은 숨을 참는다고 참았는데, 들어서자마자 레이얼의 얼굴이 무섭게 굳는다.
“다쳤나?”
“내, 가……?”
하도 악물었더니 겨우 두 음절을 발음하는데도 턱이 얼얼하다. 클로이는 제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 있지 않길 빌며 웃었다.
“자, 일단 들어갈까?”
“어딜 다쳤지?”
“전하.”
“로이, 마지막으로 말해 주지. 넌 거짓말을 정말 못 하고, 내가 한 말은 늘 흘려들어.”
레이얼은 미간에 주름을 선명하게 잡고는 고개를 바짝 숙여왔다. 날숨이 목덜미에 닿을 만큼 바짝 다가선 레이얼은 속삭였다.
“피냄새가 진동한다고. 이대로라면 어디서 나는지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그의 두 손이 도망갈 수도 없이 어깨를 콱 붙들었다. 지척에서 마주치는 시선이 고집스럽게 빛났다.
“찾으면…….”
“전하.”
“어딜 다쳤지?”
“……검에 조금 베였어.”
“어딜?”
“옆구리.”
레이얼은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쯤 안긴듯한 자세가 몹시 부담스러웠지만, 클로이는 버텼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했다. 옆구리를 타고 흐르는 뜨끈하고 습한 느낌이 선명하다. 상처를 꿰맨 게 아니니 붕대로 동여맨 건 한계가 있었다. 돌아가야 할 때였다. 품에서 목표물을 꺼내 탁자에 올려 둔 클로이는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전하. 나 오늘은 이만…….”
“잠깐 기다려. 약을 줄 테니 먹고 가.”
“아…… 응.”
확실히 이럴 때 일루미넴이라면 도움이 된다. 클로이는 레이얼이 가져다주는 약을 기다리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손끝이 차고 저린 것을 보아하니 빨리 돌아가 상처를 살펴야 할 모양이었다.
“누가 그랬지?”
약을 건네며 여상히 묻는 말에, 클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이름을 댈 뻔했다.
“지그, 지금 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
“…….”
지그프리트 씨 고마워하세요. 당신이 내 옆구리 뚫어둔 거 비밀로 했어요. 당신 주인, 정말 누군지 알면 갈아 마실 것 같은 표정이었다고요. 긴장이 한풀 꺾여 혼자 시시덕거리는 클로이의 앞으로 알약 다섯 알이 들이 밀어졌다.
“약이 좀 많은 거 같은데? 왜 다섯 알이야?”
“지혈제 두 알 더했다.”
“아하. 고마워 전하.”
한 번씩 되게 눈치 없는 것 같다가도 이럴 때보면 꽤 세심하단 말이지. 물과 함께 약을 삼킨 클로이는 약 기운이 퍼지기를 기다리며 발을 까딱였다. 그러길 잠깐 클로이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어…….”
시야가 왜 흔들리는 거지? 갑자기 레이얼이 두 개로 쪼개져 보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클로이의 생각은 뚝 끊어졌다. 레이얼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스르륵 무너지는 로이를 가볍게 받아냈다. 오늘 그가 건넨 건 마취제와 지혈제였다. 로이는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조금 전부터 그녀가 딛고 선 바닥엔 붉은 웅덩이가 괴기 시작했다. 저런 몸을 해선 어딜 간다고? 레이얼은 로이를 침대에 누이곤, 그대로 비밀통로로 빠져나갔다. 잠시후 돌아온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흉터가 남지 않게 부탁하지.”
등 뒤를 따르는 의사에게 클로이를 가리킨 그는 이내 등을 돌리고 섰다. 이내 방 안에서는 의사가 내는 희미한 소음 말고는 아무것도 나지 않았다. 삼십 분 후, 의사가 비밀통로로 몸을 감추는 것과 동시에 클로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정신이 드나?”
“전하……?”
“눈 떴으면 이만 일어나.”
“으응?”
“빨리 나가라.”
분위기를 보아하니 쓰러진 것 같은데, 눈뜨자마자 나가라고 들볶는 레이얼이 야속하던 것도 잠시였다.
“정신 차려라, 곧 기사가 온다.”
“어…… 뭐?”
클로이는 기사가 온다는 말에 벌떡 일어났다.
“윽!”
“약 먹고.”
“전하 이상해, 약 먹었는데도 아파.”
“이상한 게 아니라 다른 약이니까.”
“뭐?”
“마취제였어. 피를 줄줄 흘리며 가게 둘 순 없어서 잠깐 재워서 꿰맸다.”
“아, 어쩐지……뭐?”
너무 태연하게 이야기해서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이던 클로이는 경악했다. 꿰맸다고? 옷을 벗기고?
“빨리 가라. 시간이 없어. 핏자국도 치워야 해.”
하지만 속 편하게 따지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여긴 공작저가 아니었고, 곧 그녀를 찌른 기사가 온단다. 클로이는 다음번을 기약하며 몸을 일으켰다.
“……전하, 혹시 직접…….”
“미안하지만, 비위가 약해서.”
빌어먹을 시오도르! 어떤 의미로 한 말인 줄 뻔히 알면서! 그러나 레이얼의 얼굴이 해쓱하게 질려 있었기에 클로이는 씩씩거릴 수도 없었다.
“힘들겠지만, 어서 가거라.”
“나 며칠 쉬어도 돼?”
“……당연하지.”
당연하지라고 발음할 때, 레이얼은 무척 무서운 표정이었다.
“그럼 일주일?”
“로이.”
“그럼, 한 사흘? 하긴 이 정도는 뭐 자고 일어나면 낫는…….”
“열흘 있다 오렴. 이번엔 아무리 심심해도 절대 오면 안 된다.”
발목 삔 것도 아니고 나도 이번엔 무리지. 클로이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짓는 레이얼을 보며 중얼거렸다. 열흘이면 상처가 낫기엔 빠듯한 시간이다. 마음 같아선 조금 더 쉬고 싶으나, 레이디는 이제 황실의 주목을 받는 괴도. 황실기사와 맞붙고 나서 오랜 시간 쉬면 자칫 몸 사리는 느낌이 날 테다. 이 클로이 님이 몸을 사리다니 말도 안 되지!
“알았어. 일이 있으면 새를 보낼게.”
“말들어. 절대 오면 안 된다.”
“너무 단호한데…… 혹시 무슨 일 있어?”
“황실에서 아르네를 위해 연회를 성대히 연단다. 지금보다 훨씬 경계가 삼엄해진다.”
“아아, 난 또. 알았어. 얼씬도 하지 않을게.”
그러고 보니 나도 좀 바쁠 예정이네. 살짝 곤란한 기분이 들었다. 상처에 무리가 가긴 하겠지만, 일루미넴을 복용하고 연회에 참석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역시, 시오도르. 정말 죽어라 사람을 쥐어짠단 말이야. 클로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 아가씨 일어나 계시네요?”
“간밤, 대단하긴 했나 봐? 로지가 늦는 건 처음 봐.”
“말도 마세요.”
로지는 어깨에 손을 얹더니 크게 돌리며, 몸을 풀었다.
“살다살다 이렇게 집요한 살의는 처음 느껴봐요. 진짜 곰보다 더해요.”
“뭐 어땠기에?”
“기사단이 밖에서 1차로 걸렀는데도 공작저 내부로 잠입한 인원만 서른이었어요.”
“허?”
“그중 침실문고리에 손을 올린 게 일곱. 침실 안에 들어선 건 셋.”
“……혹시 살려 보냈어?”
“어떤 의미이냐에 따라 다르죠.”
“아! 북부로 보냈구나? 정말 알뜰하다니까.”
로지는 대답하는 대신 살짝 웃었다. 아르네의 영지는 제국 최북단에 있었다. 제국의 그 누구보다 광활한 영토를 가졌으나 그중 쓸 수 있는 땅은 거의 없었다. 절반이 칼날 같은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맥이고, 절반의 절반이 만년설로 뒤덮인 설원이며 나머지 절반의 절반은 괴수들의 둥지였다. 그중, 길을 닦아 사람이 들어가 살 만한 곳은 다시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그런 곳이었기에 나고 자란 이가 아니면 그 누구도 북부를 버티지 못했다.
“이주민은 처음이지?”
“다들 격하게 반긴다고 하네요.”
“저런.”
클로이는 로지의 능청에 짧게 웃었다.
“아버진?”
“여독을 풀기엔 충분하지 않죠.”
“오빠는 은근히 잠꾸러기니까 물어볼 필요도 없겠고. 그렇지?”
“두 분 다 바쁘셨으니 한 번쯤 푹 쉬는 것도 좋지요.”
“그래그래.”
무거운 이야기를 가볍게 나누면서 로지는 착실히 연회준비를 했다. 드레스를 꺼내오고, 드레스와 한 쌍인 구두와 장신구를 챙기는 것이 간밤 암살자와 맞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능숙했다. 일루미넴 덕에 감각은 없지만, 피로감은 확연했다. 클로이는 자꾸만 축 처지는 몸을 추스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단 그럼, 목욕부터 하실까요?”
“새벽에 했어.”
클로이는 로지의 말에 다소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목욕을요? 혼자서?”
“나도 어제 좀 굉장했거든.”
이럴 때면 로지가 반만 안다는 사실이 퍽 기껍다.
“향유 마사지해드리려고 다 준비해왔는걸요.”
“아니야, 나 지금도 피곤해서 온욕에 마사지까지 받았다가는 못 일어날지도 몰라.”
“그건 곤란하죠.”
로지는 두 번 권하지 않았다. 다만 향유 병을 밀어놓고 향수를 가져왔을 뿐이었다.
“그럼, 드레스에 맞춰 향은 이걸로 하실까요? 아무래도 푸른색 계열이라서 향을 산뜻…….”
“드레스 이거 말고.”
클로이는 로지가 골라온 드레스를 손끝으로 쓱 밀어 치웠다. 가슴 밑에서 부드럽게 퍼지는 엠파이어 형의 드레스는 몸을 구속하지 않아 평소 클로이가 즐겨 입는 것이긴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저게 좋겠어.”
로지는 클로이가 가리킨 드레스를 보곤 턱을 툭 떨궜다.
“진심이세요?”
마치 한낮에 강도라도 당한 것 같은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