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홀로 보내는 길고 긴 밤2021.01.05.
바퀴를 갈아 끼우고 다시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할 무렵 누군가가 빠르게 따라 붙었다. 똑똑. 똑. 일정한 규칙으로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클로이가 마차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벌써 왔어?”
문을 두드린 건 로지였다.
“뭐, 몇 놈이나 된다고요.”
별것 아니라는 투였으나, 로지의 옷은 핏물에 흠뻑 절어 있었다.
“다쳤어?”
“그게 가능할 것 같아 보이세요?”
상당히 자존심 상해하는 말에 클로이가 작게 웃었다.
“걱정하는 거였어. 몇 명이나 되었어?”
“아홉이요. 그중 다섯은 이미 에반 님이 반쯤 손봐놓으셨더라고요.”
“에반이 고생이 많았겠어.”
“좀 해도 돼요. 월급 많이 받잖아요.”
“……그거, 신뢰인 거지?”
“좋을 대로 해석하세요.”
흥분이 가시지 않은 탓에 로지의 말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후, 중간중간 뜨끈한 숨을 몰아쉬며 진정하려 애쓰는 것이 보였으나, 결국 로지는 공작저 대문에 들어서기 전 폭발하고 말았다.
“내 이것들을 진짜!”
“로지!”
달려나가는 로지를 본 클로이가 호송 마차 안에서 자지러지는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잔뜩 흥분해 뛰쳐나간 로지를 에반이 잡아 왔다.
“로지 양, 정말 기운 넘쳐 보이네요.”
“기운만 아니라 실력도 넘쳐요.”
“정말 잘됐어요. 그럼 오늘 밤엔 로지 양의 도움을 좀 받아 볼까요?”
에반에게 붙들려 끌려오면서도 로지는 연신 눈을 희번덕였다.
“밤까지 갈 것도 없이 잠깐만 좀 놔주시면…….”
“넘치는 기운 아껴두었다가 밤에 아낌없이 쓰도록 해요. 내일 연회라면서요?”
“……그런데요?”
“손님들께서 공녀님께 좀 더 진득하고 깊은 위로를 하고 싶어 할 테니, 오늘 밤 아마 볼만할 거예요.”
굳이 풀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이미 공작은 위중한데, 그보다 더 진득하고 깊은 위로를 하려면 공작의 부고 말고 다른 게 뭐가 있겠나.
“그럼 오늘 밤에 또?”
“발악할 겁니다.”
에반의 상냥하고도 비정한 설명에 사방에서 침음이 터졌다.
“엘리오 소 공작을 부탁드려요. 우리 아가씨는…….”
말끝에 에반이 클로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언제나처럼 옅게 웃고 있었으나 그의 눈엔 온기라곤 없었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건 로지만이 아니었다. 클로이는 사납기 짝이 없는 에반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태연했다.
“내 걱정은 마. 제1 사냥꾼을 뽑기로 따낸 건 아니니까.”
“그럼, 믿어볼까요?”
“수고해 에반. 그리고 로지.”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쾌활한 클로이의 인사와 함께 쿵, 그들의 뒤로 묵직한 진동이 울렸다. 공작저의 문이 닫혔다.
황제는 아침부터 기분이 별로였다.
“다이아몬드를 죄다 털리고 남은 게 이따위 하품이라고?”
길롯이 내미는 다이아몬드를 살피던 황제가 그대로 상자를 집어 던져 버렸다.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벨벳을 두른 고급스러운 보석함이 단번에 깨지고 사방으로 다이아몬드가 구르며 찬란하게 빛을 뿌렸다.
“근위대도 내어주었잖느냐!”
황제의 일갈에 길롯 백작은 얼굴을 굳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후작이 잃어버린 다이아몬드의 절반은 길롯의 몫이었다. 그런 것을 죄다 도둑맞은 참이니, 속이 뒤집히다 못해 눈에서 불이 나올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할 말이 뭐가 있겠나. 간밤, 레이디는 정말 아슬아슬하게 그들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후작의 기사들 역시 제법이었으나, 그중 발군은 역시 황실 근위대였다. 아르네 기사단에 대적하기 위해 황실에서 심혈을 기울여 길러낸 기사단인 만큼 솜씨가 제법 이었다. 하지만 딱 그뿐이었다. 기사들의 검은 매번 아슬아슬하게 레이디를 스쳤다. 그 와중에 레이디는 예고한 것뿐만 아니라 놀리듯 감정실에 놓아둔 다이아몬드도 한 줌 집어 가지 않았던가. 정말로 한주먹이었다. 살찐 닭을 잡아채는 매처럼 그야말로 번개 같고도 확실한 손놀림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열불이 터져 숨통이 콱 막히는 것 같다.
“근위대 열을 내주어도 못 잡아 왔다라…….”
“……면목 없습니다.”
“생각보다 레이디가 대단한 것인가, 아니면 근위대 실력이 미흡했나? 그도 아니면 자만하였던가?”
“폐하…….”
“대답하라, 길롯 백작.”
황제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자작나무 숲을 끼고 있는 호수가에 별장을 지어준다는 말에 웃어 주던 것도 잠시, 황후는 다시 파리하게 말라붙어 갔다. 그러나 아직 레이디가 활개를 치는 마당에 황후를 품에서 놓을 수도 없는 일이라 황제는 알면서도 황후를 가둘 수밖에 없었다. 그 가엽고 어여쁜 것을 위로해볼까 해서 은밀히 준비하려던 것인데.
“또, 예고했다지? 이번에 근위대 스물을 내어주면 레이디를 잡아 올 수 있겠느냐?”
“…….”
“서른?”
“…….”
길롯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자신 없었다. 제아무리 난다긴다하는 근위대라 하지만, 레이디의 움직임은 그들을 상회했다. 실제로 본 레이디는 몸이 날래고 가벼웠으며, 접근전에서도 밀리지 않는 근력도 가지고 있었다. 레이디는 단 한 번도 물러서지 않고 기사와 전력으로 검을 맞댔다. 쨍! 검이 맞부딪히는 순간마다 귀가 터질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그런 레이디를 겨우 황궁 근위대로? 차라리 아르네 기사를 내준다면 또 모른다. 하지만, 근위대는 오십이 아니라 백을 내어준대도 자신이 없었다. 길어지는 침묵에 차근히 압박감이 차오른다.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으나 길롯은 입을 열지 않았다. 황제는 유한 듯 강퍅했고 치밀한 듯 허술했다. 그중 그가 가장 못 견디는 것이 제 지위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아르네라던가 황태자라던가. 제게 맞설만하다 싶은 이들은 모조리 눈 밖에 나는 것이다. 그것이 충신이건 아들이건 아무 상관없었다. 기이하리만치 비틀린 황제의 집착 덕에 그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긴 하지만 길롯 백작은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가 이해가 되진 않았다.
“길롯!!!”
몹시 노한 황제의 고함에 길롯 백작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조아렸다.
“신중해지려던 것이 그만…….”
“그래, 신중하고 싶은 길롯 백작. 그대의 생각을 듣고 싶네만.”
이제 한계다. 이번에도 답을 미루었다간, 분명히 사달이 나고 말리라. 길롯은 제 누이의 부재를 아쉬워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겨우 좀도둑에 황실 근위대가 전면에 나서는 건 좀 과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한 게 아니라 부족한 것이었다. 이미, 말끔하게 털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길롯은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해선 말을 이었다.
“하니, 이번엔 폐하의 기사가 아니라, 다른 기사를 내보내면 어떻겠습니까?”
“누구?”
“폐하의 피를 이은 분의 기사라면, 황실의 체면도 세우고 또한 과하지도 않을 성싶습니다.”
“……레이얼의 기사 말이냐?”
길롯은 황제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도 어쩐지 입안이 썼다. 황제는 이런 일에 단 한 번도 내쉬 황자를 떠올려주지 않는다. 언제나 레이얼만을 꼽는다. 오직 레이얼 시오도르만이 그의 황좌의 경쟁자로 인정한다는 듯. 그러니, 반드시 레이얼을 끌어내려야 한다. 우월한 정도만으로는 절대 눈에 띄지 않을 테니, 황제에게 후계자를 하나만 남겨주는 수밖에 없었다. 길롯은 마음을 다잡으며 입을 열었다.
“레이얼 전하께선 황태자의 직무를 기껍게 여기신다니, 이번 일도 맡겨주신다면 잘 해내 보니 실 거라 믿습니다.”
“기껍다고……?”
황제는 말끝에 설핏 웃었다. 나이가 들었다고는 하나, 그 역시도 시오도르. 겨우 미소 한 번에 분위기가 고혹적으로 변한다. 그러나 길롯 백작은 저 미소가 얼마나 잔혹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황제가 되고 싶어 몸이 달았다는 건가…….”
나직한 말엔 살의가 짙게 배어있다. 길롯 백작은 대답 대신 허리를 깊게 숙여 시선을 떨구었다. 그저 황제가 알아서 생각할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쉬도 레이얼을 추천하지 않았나. 길롯 백작까지 나서니 더 고민할 필요가 없겠어. 레이얼을 불러오게.”
“네, 폐하.”
길롯백작은 그대로 몸을 돌려 빠르게 빠져나갔다. 돌아서서 나가는 그의 목덜미엔 소름이 잔뜩 돋아있었다. * * * 불운은 몰려오는 법이었다. 황제가 레이얼에게 ‘레이디’를 잡아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말에 클로이는 턱, 소리 나게 이마를 짚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유독 몸놀림이 남다른 녀석이 몇 있었는데. 그게 황실 근위대였구나.”
“그건 미처 몰랐었다. 주의했어야 했는데 미안하구나.”
“이건 전하가 주의하고 말 문제가 아니지. 근위대가 있다고 해서 내가 몸을 사리면, 안 되는 거잖아.”
알았건 몰랐건, 달라지는 건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골치는 아프다. 클로이는 어깨가 늘어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전하의 기사들에게 날 잡는 데 참전하라 했다는 거지?”
“……미안하다.”
“거절할 수도 거절해서도 안 되는 명령인데 뭐.”
산뜻한 정리에 레이얼의 고개가 조금 떨구어졌다.
“그리고 난 전하의 기사를 다치게 해서도, 잡혀서도 안 되는 거지?”
“그건……!”
“우린 한편이니까. 물론, 나만 알긴 하지만 말이야.”
레이얼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 클로이가 말을 툭 자르고 완성해버렸다. 빼앗기는 것이 일상이며, 늘 사방에서 공격받는 남자의 곁을 지키는 기사를 클로이는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로이, 무리할 것 없다.”
“걱정 마. 말을 이렇게 해도 난 내가 제일 소중한 사람이라서. 여차하면 전하의 기사들도 안 봐줄 거야.”
장난스럽게 덧붙여보았으나 레이얼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클로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가볍게 넘어가긴 그른 모양이었다. 클로이는 고집스럽게 싱글거리던 표정을 대번에 지웠다. 그리고 더없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도면도 줘 전하. 그리고 오늘 배치된 기사가 몇인지도 알려줘.”
누군가를 배려하며 움직이는 건 그만큼 제약이 따르는 일이었다. 바르벨 후작 때도 근위대 녀석들에게 제법 몰리지 않았나. 이번엔 거기에 자신을 잡으려고 덤비는 레이얼의 기사를 다치지 않게 배려까지 해야 하다니. 오늘은 밤이 길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나선 길. 클로이는 목표한 저택을 살피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대충 세봐도 오십은 족히 넘는 기사라니……! 제아무리 북부 제1의 사냥꾼이라는 자부심이 있다지만, 기가 질리는 숫자였다. 그중 열 명은 낯이 살짝 익다. 황실 근위대라는 뜻이다. 지붕 끝까지 가서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클로이가 신경을 집중해 바라보았다. 습격에 대비하느라 전부 어두운 옷을 입고는 있으나, 분명 자신들끼리 구분하는 표식이 있을 터였다. 그렇게 보길 한참. 클로이는 한쪽에 도열한 기사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백작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근위대와도 거리를 벌리는 기사라면, 전하쪽 사람이네.”
다행히 어두운 경장 위로 보이는 목깃이 푸른색으로 특징이 있다. 됐다. 클로이는 눈을 반짝이며 목청을 돋웠다.
“홀켄 백작! 약속을 지키러 왔소!”
핑-.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와 발 끝에 박혔다. 여태완 다른 정확하고 깔끔한 궁술에 클로이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디!”
화살을 든 건, 푸른 깃의 기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