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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 아빠, 다녀오셨어요? (35/121)

035. 아빠, 다녀오셨어요?2021.01.01.

“내쉬, 시간이 늦었구나.”

“……얼마 전 레이디를 보았습니다.”

“이곳은 스무 겹의 호위가 있지.”

“레이디는 단신으로 귀족가를 헤집지요.”

“이곳은 황실인 것을.”

날 선 대치에 클로이는 절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두근두근하는 소리가 굉음처럼 머릿속을 꽝꽝 울렸다.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죄다 들을 줄이야. 클로이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듣지도 못한 발걸음 소리를 들은 레이얼을 생각했다면, 조심했어야 했는데. 그만 깜빡하고 말았다. 내쉬 역시 황제의 혈통인 것을. 입을 틀어막긴 했으나, 이러다가는 쿵쿵거리는 심박 소리에 들키고 말 것 같았다. 어떻게 하지?

‘잡히면 우리는 모르는 사이야.’

이렇게 있다가 잡히면 모르는 사이라고 잡아떼도, 반드시 엮여버린다. 길롯이 황태자를 쳐낼 귀중한 기회를 놓칠 리 있나. 지금이라도 레이얼에게 단검을 날리는 시늉을 하고 도망을 칠까. 숱한 방법들이 떠올랐다 사그라든다.

“아니면, 날이 밝으면 다시 오겠느냐? 피곤해서 더는 상대해주기 무리구나.”

“……돌아가겠습니다.”

“기사를 붙여주마.”

“괜찮습니다.”

“아니다. 너야말로 걱정이 되는구나. 레이디도 직접 보지 않았느냐?”

레이얼은 근처에서 경계를 서던 기사를 불러 내쉬를 호위하라 일렀다.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더는 버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내쉬는 결국 기사와 함께 자리를 떴고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쿵쿵쿵. 하지만 클로이의 심박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로이.”

천이 접히는 소리와 함께, 어둠을 가르는 시린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고서야 막힌 숨이 탄식같이 터져 나왔다.

“하아…….”

“바보 같으니. 어째서 겁먹은 표정이지? 내가 내쉬의 수작을 잠자코 보고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핀잔하는 것 같으나 레이얼은 몹시 상냥한 표정을 해선 손을 내밀었다.

“나와.”

“전하, 설마 눈치채고 온 걸까? 혹시 나 아직 그 향 나?”

“뭐?”

“향. 내쉬가 맡았다는 향. 나 요새 물만 마시는데.”

말 끝에 손을 들어 코에 대고 킁킁거리는 로이를 바라보던 레이얼은 깊게 손을 뻗어 그대로 클로이를 끌어냈다. 아무리 말랐다고는 하나, 성인 여자였다. 심지어 클로이는 북부인답게 평균 여성 신장보다 한참 우월하지 않나. 그런데도 레이얼은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 시종일관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코앞에서 시선이 마주치자, 레이얼은 클로이를 붙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제 코끝을 툭툭 두드렸다.

“말했잖아. 향에 예민하다고. 내쉬 말에 휘둘리지 말아라. ”

여유로운 태도와 자신만만한 말투에 클로이는 가슴을 무섭게 때리던 심박이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우습게도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심된다. 의지하면 안 되는데도.

“그럼, 오늘 찾아온 이유가 뭘까? 나, 매일 다른 방향에서 오거든. 절대, 꼬리 잡힐 일은 하지 않는데.”

“매일 다른 방향?”

“응. 습관을 만들면 반드시 빈틈이 생기니까.”

“습관을 만들면 빈틈이 생긴다고?”

“당연하지. 우리 가, 아니 우리 집은 그래서 규칙이나 습관을 생기지 않도록 경계하는 편이야. 버릇에 길드는 건 나뿐만이 아니거든.”

“길든다라…….”

레이얼은 손을 들어 가만히 턱을 쓸었다. 길든다. 그는 최근 내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여태 있는 듯 없는 듯 굴던 그가 갑자기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이유가 뭘까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길들이기 위함이었다면……? 내쉬 시오도르는 안심해도 된다는 편견을 심기 위해서였다면……? 방심보다 더 무서운 것이 어디있나. 레이얼은 탄식했다.

“굉장히 훌륭한 가풍이군.”

“말해 뭐 해.”

“……혹시 뻔뻔함도 버릇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아니, 우쭐거릴 수 있을 때 즐기자는 주의야. 왜 겸손해야 해? 칭찬 들으면 기쁘지 않아?”

“기쁘긴 하지만 그걸…….”

“굳이 가릴 필요는 없지. 왜 그게 고상한 건지 난 도통 모르겠더라고. 우린 당당하게 축하받고, 칭찬을 즐기는 편이야.”

“그렇군. 좋은데?”

턱을 괴고 속삭이는 레이얼은 웃는 얼굴이었다.

“그렇지? 난 아무래도 ‘이쪽’이랑은 잘 안 맞는 듯 싶어.”

“귀족의 삶이란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지.”

이번에는 클로이가 웃었다. 바보 같으니, 그건 ‘수도’ 녀석들이 그러겠지. 북부의 귀족들은 그러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이 기쁨을 이듬해에도 살아서 누릴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 못 하거든. 금화를 굴리는데 골몰하는 수도 녀석들이, 괴수를 맞대면해야 하는 북부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아무튼, 오늘 이만 가볼게. 이렇게 어두워서야 명부를 외우기도 힘들겠어. 그리고 내일은 예고를 한 날이니, 좀 늦게 올 예정이야.”

“그래. 잘하겠지만 조심하렴.”

“걱정 마. 어디 한두 번 해봐. 곧 열 번째야.”

“혹시 자만이 빈틈을 만든다는 말은 어때?”

“……전하도 진짜 나를 신뢰하는 법을 깨우치는 게 어때?”

한마디도 물러서지 않는 말다툼의 끝에 목소리를 누그러뜨린 것은 레이얼이었다.

“걱정이라니까.”

“……알았어.”

약았어. 저런 식으로 받아치다니. 클로이는 툴툴거리며 발코니로 향했다. 따라나서는 레이얼은 손짓으로 물렸다.

“오지마. 혹시라도 밖에 그림자가 두 개가 비치면 내쉬가 찾아왔을 때 정말 변명의 여지가 없어. 나 간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스르륵, 그대로 어둠에 스며 사라졌다.

  레이얼은 내쉬 황자의 말에 휘둘리지 말라 했으나, 사람의 마음이란 게 그렇지가 않다. 은근히 계속 마음에 남는 것이다. 뭔가 봤다는 내쉬의 말이 기억나 한결 신경을 써서 빠져나오느라 클로이는 평소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그리고 살짝 더 피곤했다.

“에고고.”

침대에 기어들어 가는 순간은 늘 피곤했지만, 그날 밤은 유독 지독했다. 괜히 심란해서인지 온몸이 축 처지고 내내 뒤척였다. ‘불안’은 이래서 참 위험한 거였다. 한번 마음에 박히면, 무섭게 번지기 일쑤라 뽑아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망할 놈. 누가 시오도르 아니랄까 봐 개코에 귀도 밝아선 사람을 심란하게 해.”

푸석해진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나는 클로이는 이를 벅벅 갈아댔다. 당장 내일, 황후가 여는 연회에 가야 하는데 잠을 못 잤더니 얼굴이 말이 아니다. 게다가 오늘은 예고장을 보냈으니 밤잠도 글렀다.

“로지한테 엄청나게 구박받겠네.”

가벼운 한숨과 함께, 아침 준비를 마친 클로이가 침실을 나섰다. 보통 클로이를 깨우러 로지가 오는데 오늘은 시간이 이른 탓이었다. 살짝 배가 출출해 주방에서 간단하게 뭐라도 내오라고 할 생각으로 계단을 내려가던 클로이는 문득 공작저가 기묘하리만치 고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이른 시간이라고는 하나, 사용인들의 아침은 빠르다. 동이 트기 전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이렇게 조용하다니, 무슨 일이 생겼나……? 클로이는 얼른 벽면에 장식된 검을 하나 챙겨 들고는 소리 없이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의심은 곧, 확신이 되었다. 공작저가 비어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사람이 하나둘도 아니고 이 너른 공작저의 사용인이 모두, 자리를 비웠다고? 이건 공작이 토벌을 나갔다가 귀환할 때나 보던 모습을……. 클로이는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타운 하우스의 정원을 가로질러 뛰길 한참. 공작저의 활짝 대문 앞으로 사용인들이 몰려나가는 게 보인다. 쿵쿵쿵.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뛰고, 머릿속에서 욍욍거리는 소리가 울린다.

“아가씨?”

누군가가 산발을 한 클로이를 본 모양인지, 황급히 다가와 뭐라고 했으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저 멀리, 아물거리며 보이는 아르네의 호송마차에 시선을 찔러둔 클로이가 멍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버지가, 오시는 건가?”

“아가씨. 이런 차림으로 나오시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요.”

“난 전서구도 받지 못했는데.”

“새들이 지쳐 시기를 맞추지 못했습니다.”

말에서 훌쩍 내린 에반이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리며, 사용인의 말을 대신 받았다. 그의 손에 들린 건 늘어진 새 두 마리와 편지를 문 새 한 마리였다. 편지를 물고 있는 것도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쉬지 않고 날렸으니 새도 지칠 만했다. 하지만 클로이는 지금 그런 사정을 헤아리고 싶지 않았다.

“난, 아버지가 오시는 것도 몰랐잖아.”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버지가 오시는 줄 알았으면, 마중을 갔을 거라고.”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클로이는 뾰로통한 목소리를 해선 짜증을 부렸다.

“아직, 호송 마차는 진입로에 있습니다. 함께 가시죠.”

“옷차림이 엉망인데.”

“공작님은 주무시고 계시니까, 모르실 거예요.”

에반은 끝까지 상냥했다. 그는 절대 공작이 깨어나지 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혹시 중간에 깨어나실지도 모르니까, 그럼 제 뒤에 계시겠어요?”

그는 언젠가부터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공녀를 가리듯, 앞을 막아섰다.

“이대로 가면, 공작님께서 깨어나시더라도 모르실 거예요.”

“에, 엘리오 오빠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멀고도 긴 여행이니 고단하실 테지요.”

“오빠가 이 꼴을 보면…….”

“그럼, 제 로브를 둘러드리겠습니다.”

고이지도 못하고 후두둑 눈물을 떨구는 클로이의 머리 위로 땀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로브가 내려앉았다. 그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체취에 클로이는 잠깐 숨을 멈췄다.

“로지는?”

“저희를 뒤따르던 손님을 대신 대접하러 자리를 비웠습니다.”

“손님이 따라붙었다고?”

“절호의 기회 아니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불행한 일이 일어난다면, 빌미 삼아 남부의 민란군을 군대로 밀어버리고 증세할 수도 있을 테고요.”

“…….”

“맞수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니 저들도 발악하는 것이지요.”

“아르네를 너무 호락호락하게 보는 거 아닌가?”

“그러게 말입니다.”

“가자. 일단 아버지를 뵙고 싶어. 주무시고 계시니 깨우지는 못하겠지만.”

“많이 고단하셔서 한동안 주무실 것 같습니다.”

“오래?”

앞서거니 뒷서거니, 그들을 부지런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요.”

“조금 오래?”

“예.”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상냥한 목소리로 사실만을 전해주었을 뿐, 에반은 굳이 희망을 강요하지 않았다.

“고생했어. 에반.”

“고생은요. 아무것도 한 게 없는걸요.”

“없긴. 여행길에 손님 대접만큼 성가신 게 어디 있다고.”

“그거야 집사의 본분이니 그리 어려운 건 아니랍니다.”

어느새 그들은 호송 마차에 다다라 있었다. 어째서 마차가 꿈쩍도 하지 않은 건가 했는데, 멀쩡한 바퀴가 하나뿐일 정도로 마차가 엉망이었다. 로지가 다급하게 뛰어나가고, 에반이 사용인을 불러 모았을 법한 끔찍한 모습이었다. 문을 열자, 그곳엔 마차보다 더 끔찍한 몰골을 한 아르네 공작이 눈을 감고 있었다. 싯푸르게 질린 입술. 굳게 감긴 눈,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탁한 공기.

“아빠.”

그를 부르자 멎었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다녀오셨어요?”

공작의 거친 손에 뺨을 가져다 대며 웃는 클로이의 눈에서 쉬지 않고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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