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 난 ‘수도의 미인’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길 원해2020.12.29.
“뭐 하는 녀석이지?”
내리꽂히는 시선엔 불안과 서운함, 그리고 배신감이 가득하다.
“집착하지 말라니까.”
“이건 집착이 아니야.”
집착이 아니긴. 지금 당신 얼굴 어떤지 알고나 하는 말이야? 클로이는 소유욕이 넘실거리는 레이얼의 표정을 보며, 헛숨을 삼켰다. 놀랍도록 흉흉한 기세지만, 놀라진 않았다. 이미 한 번 겪어보지 않았던가. 콰이펄른의 일을 겪으며 레이얼은 혹시라도 자신의 유용한 장기 말을 빼앗기기라도 할까 봐 안달을 냈었다. 바로 지금처럼.
“전하, 난 끝까지 전하와 함께할 거야.”
“결혼 할거라며.”
“일이 끝나면. 전하도 결혼할 거잖아.”
정확히 사실을 짚은 말에, 레이얼의 설핏 굳었다.
“약혼자는 어떤 녀석이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으나, 그의 목소리가 버석하다. 불안해하는 것을 알아 조금 더 다독여 주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달이 졌다. 클로이는 이제 희붐하게 밝아오는 창밖을 보며 손을 내저었다.
“밤이 끝났어.”
“…….”
“내일, 올게?”
레이얼은 끝까지 인사를 해주지 않았다. 클로이는 시무룩한 듯 화난 것 같이 구는 레이얼의 모습에 몹시 섭섭했다.
“아니 자기는 결혼해도 되고 난 하면 안 돼? 자기는 대놓고 피앙세가 걱정된다는 둥 별소리 다 해놓고선!”
그러나 아무리 중얼거려도 오늘은 차마 빌어먹을 시오도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가 걱정하는 것도, 그가 원하는 것도 모두 자신임을 알아서. 뻔히 알면서도 애태우는 남자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어서. 조금, 아주 조금 미안하고, 어쩐지 살짝 설렜다. 이상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조금 설렜다. 두근.
“일어나세요!”
“로지, 로지, 로지!”
“네, 네, 네!”
“나 오늘 늦게 들어 온 거 알면서 이래!”
“그래도 안 돼요.”
“……무슨 일인데?”
“황실에서 전령이 왔어요.”
“……왜?”
“황실에서 아르네를 위해 연회를 연다고 하세요. 공녀님이 가서 초대장을 직접 받으셔야 해요.”
쯧. 행동력 하나 끝내주네. 간밤 듣고 왔는데, 아침부터 들이닥쳐? 다 죽어가는 꼴이 사라지기 전 어떻게든 전시해보겠다 이거지? 클로이는 다소 냉소적인 짐작을 하며,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치장은 최대한 구질구질하게.”
“예?”
“시름에 잠긴 공녀님을 연출해달라는 뜻이었어.”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응접실로 나가 황실 전령을 마주하는 데는 채 삼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간소한 드레스를 걸치고 머리를 늘어뜨리는 정도로 충분했기에, 실제로 클로이가 한 건 세수가 전부였다. 북부인 특유의 시린 빛이 도는 하얀 피부에, 밤을 새운 여파로 내려앉은 푸른 눈 그림자가 더해지자 클로이는 한참이나 앓은 사람처럼 보였다. 전령으로 온 기사조차 클로이를 보았을 때, 희미하게 침음했을 정도였다. 훅, 불면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호리호리한 미녀. 북부인답게 평균 신장보다 큰 키에도 불구하고, 공녀는 보호 본능을 일으킬 만큼 가녀려 보였다.
“폐하의 세심함에 감사드린다고 전해주게.”
“그럼, 참석하신다고 전하겠습니다.”
“고맙소. 차를……?”
“아닙니다.”
공작과 소공작은 위중하고, 공녀는 쓰러졌다 일어난 것이 아닌가. 그런 아르네에서 차 대접을 받다니 염치없는 소리였다. 기사는 재빠르게 돌아갔다. 연회는 이틀 뒤. 정확히는 민란군을 진압한 아르네의 공적을 살피기 위함이라 했으나, 공작은 아직 수도에 입성도 하지 못했다. 아픈 이를 두고 승전연회를 열 수는 없는 노릇이니, 공녀만을 불러 위로 겸 치하를 하기 위함이라는데…….
“진짜, 고마운 걸까……?”
공작저의 정문을 빠져나가던 기사가 문득, 중얼거렸다. 따지고 보면, 아르네에 닥친 비극은 전부 황제가 명한 게 아니었나? 그런데 한쪽은 치하하고 한쪽은 감사를 표한다. 잠깐, 기사는 이 관계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 . .
“갔어?”
“예, 아가씨.”
“이틀 뒤래. 가서 향유와 크림. 그리고 고열량 지방식을 챙겨와.”
“굶는 게 아니고요? 지금보다 살짝 더 마르면 아주 처량해 보일 것 같은데요.”
“로지, 쓰러진 공녀를 득달같이 불러들이는 이유를 모르겠어?”
클로이는 로지를 향해 더없이 시린 표정으로 속삭였다.
“아르네도 박살 내버린 길롯의 힘을 과시하고 싶은 거야. 다 죽어가는 공작과 후계자. 그리고 시름시름 하는 공녀. 좋은 본보기가 될 테지.”
“아!”
“이참에 ‘저주받은 황태자’도 다시 한번 되새기고. 길롯이 아주 제대로 살판이 났지 뭐야. 하지만 원하는 대로 놀아날 순 없지.”
“판을 깨는 건 통쾌하지만, 괜히 밉보이는 건 아닐까요?”
“밉보인다고?”
“지금은 전면전을 벌일 때가 아니라 몸을 사려야 할 때가 아닐까 해서요. 공작님과 소공작님도 아직…….”
“바로 그걸 길롯이 바라는 거야. 로지 감히, 길롯 따위가 아르네의 무릎을 꿇릴 순 없어.”
더는 뒷말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클로이는 턱을 치켜들었다.
“가서 뭐든 가져와. 난 ‘수도의 미인’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길 원해.”
클로이는 상대의 강점과 자신의 장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캐서린 황후는 사랑스럽고 화려하게 생긴 미인이었다. 하지만 클로이는 이지적이고 고아한 미녀였다. 좋게 말하면 단정했고, 나쁘게 말하면 서늘해 보이는 인상은 다소 위압적이었다. 거울에 얼굴을 요모조모 비춰보던 클로이가 입꼬리를 늘여 빙긋 웃었다. 미소를 짓고 있으나, 절대 캐서린 황후처럼 달콤하진 않다. 오히려 사람을 긴장시킨다고 할까. 내리깐 눈꺼풀 아래 새파란 눈동자가 냉엄하게 빛을 뿌렸다.
“로지 이게 바로 사람들이 바라는 그, 아르네의 얼굴이겠지?”
푸릇하게 질린 얼굴로 속삭이는 클로이는 이 순간 그 누구보다 더없이 고고했다.
“가서, 북부의 아르네답게 보일만 한 것을 죄다 가져와.”
“네, 공녀님.”
로지는 더 이상 클로이를 말리지 않았다.
클로이는 손을 들어 턱끝을 슬슬 쓸었다. 로지가 반나절을 매만져준 클로이의 피부는 광이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렇게 보드라울 수가 있나. 로지는 정말 최고였다. 역시, 가죽 손질에 일가견 있는 제1사냥꾼 답다. 다른 사람이 들었더라면 기겁했을 생각을 하며 클로이는 다시 한번 제 턱 끝을 쓸었다.
“왜 그러지?”
서류를 넘기던 레이얼이 내내 턱을 만지작거리던 모습이 신경 쓰였던지 입을 열었다. 어제, 그러고 난 후 처음이었다. 나직하게 깔리는 목소리엔 아직도 서운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살짝 어이가 없었지만 클로이는 그를 이해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빼앗기는 것이 익숙한 남자에게 로이의 약혼자라는 것은 경계를 부르기에 딱 맞을 테니까. 그래서 클로이는 다소, 과하다 싶게 밝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 오늘 피부가 좀 좋아서.”
“뭐?”
“보들보들해 아주.”
“……그렇구나.”
“만져볼래?”
“로이, 넌 조금 더 경각심을 가지는 게 좋겠다.”
“전하니까 특별히 말해본 거였어. 누가 감히 내 턱을 만져볼 수 있겠어?”
‘특별히’에 부쩍 힘을 줘 발음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도 그러면 안 돼.”
레이얼은 어이없어하긴 했으나, 강직하던 입매가 흐무러지는 것이 선명했다.
“알았어. 알았어. 나도 안 그래.”
“로이, 장난할 게 아니야.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렴. 함부로 누가 널 만지게 두면 안 된다.”
“당연하지.”
“너와 어떤 관계이건 간에 쉽게 손대는 녀석은 제대로 된 남자가 아니야. 명심하렴.”
차마 모르는 척할 수 없을 만큼 노골적인 조언이었다. 레이얼은 진심으로 로이의 피앙세를 경계하고 있었다. 맙소사. 클로이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 이를 콱 물었다.
“전하도 그럼 좋은 남자는 아니겠네.”
“내가? 어째서지?”
“전하는 첫날부터 내 위에 올라탔잖아.”
“넌, 어째서 말이 항상 그 모양이지?”
“내 말이 어디가 어때서 얼굴이 새빨개?”
“말이 너무 음란하지 않나!”
“어머? 어느 부분이? 전하가 첫날 내 양 손목을 결박해서 위에 올라타지 않았어?”
“침입자를 제압했다.”
“손잡았잖아? 위에 올라탔고?”
“제압했다.”
레이얼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하지만, 클로이는 작정한 듯 능글맞게 굴었다.
“손을 잡기 전에 내게 허락을 구했어? 아님 올라탈 때는?”
“맙소사. 제발 그 말 좀.”
레이얼은 도저히 못 버티겠는지 서류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얼굴은 감췄을지 몰라도 서류 너머로 보이는 목덜미가 새빨갰다.
“난 지극히 사실만을 말하는데 왜 얼굴을 붉히는 거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능글능글. 부끄러워하는 레이얼을 놀려먹는 데 흥이 오른 클로이가 상체를 숙여 바짝 다가가 목소리를 은근하게 깔던 그때였다.
“전하, 나도 그…… 읍!”
“쉿.”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얼이 불을 꺼버리곤 클로이를 끌고 가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모든 건 순식간이었다. 침대보가 내려가고 완벽한 어둠이 드리우고 종이를 정리하는 소리와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침대가 슬쩍 내려앉았다. 침입자가 곧 온다. 레이얼이 아무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지만, 클로이는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오던 날도 레이얼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적어도 레이얼의 신체 능력은 클로이보다 월등하다.
‘굉장한데.’
클로이는 작게 웃었다. 손을 미끄러뜨려 허리띠에 넣어둔 단검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대체 누가 이 야심한 밤, 그를 찾는진 모르겠으나 적어도 좋은 의도는 아니리라. 클로이는 레이얼이 궁지에 몰리면 언제든 튀어 나가 그를 보호할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똑똑. 선명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침입자가 아니었나? 당당한 노크 소리가 여간 황당한 게 아니다. 대체 누구지? 클로이가 야밤의 손님을 가늠하던 때, 노크 소리만큼이나 명징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시간 되십니까?”
특유한 달콤한 목소리를 들어보아 하니, 저건…… 내쉬 황자? 클로이는 이번에야말로 잔뜩 당황해버렸다. 이 밤, 저 녀석이 여기에 무슨 일이지? 나,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닌가? 짧은 순간, 숱한 물음이 떠오른다.
“괜찮으니.”
마치 그녀의 혼란함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나직한 음성이 울렸다.
“기다리거라.”
손님에게 건네는 말인 듯했으나, 이것은 로이에게 전하는 말. 클로이는 레이얼의 말에 몸을 최대한 벽 쪽으로 붙여 작게 말았다. 어차피 보일 리는 없는데도 이상하게 불안했다. 달칵이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녹진한 미성이 한결 가깝게 울린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지?”
“산책하다 우연히 무언가를 본 것 같아서 와보았습니다.”
“어둠에 잘 못 보았겠지.”
“아무래도 방이 방이다 보니, 걱정이 되어서요.”
“염려 말렴. 직분에 따른 고귀한 책무 아니겠느냐. 폐하께서 해내셨든 나 역시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단다.”
“……조심하세요. 고귀한 것을 좋아하는 레이디가 혹시라도 탐을 낼까 봐 겁이 납니다. 혹시 압니까. 지금 이 방에 숨어들어 있을지도요.”
“저런, 내쉬. 깜빡했느냐. 이 방에 들어섰다 한들 황태자가 바뀌는 건 아닌 것을.”
청소하는 시녀들도, 차를 나르는 시종도 다니는 곳 아니겠느냐? 나직한 뒷말은 혼잣말인 듯 했으나, 분명 저건 ‘정적’에게 건네는 조롱이었다. 클로이는 웃으며 건네는 날 선 말들에 문득 목이 막혀 꼴깍, 마른 침을 삼켰다. 바로 그때였다.
“무슨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