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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 약혼했다고? (33/121)

033. 약혼했다고?2020.12.25.

“어떻게든 무마해보려 했지만, 무리였다.”

“미인이 연회를 열겠다는데, 전하가 그걸 어떻게 막아?”

볼 때마다 다쳐 온다고 그녀를 타박하던 남자는 요새 만날 때마다 풀 죽어 있다. 이유를 물으니, 제 피앙세가 조만간 ‘초대’라는 이름으로 끌려와 ‘위로연회’라는 명분 아래 초라한 꼴을 박제 당하게 생겼단다. 뜻밖의 소식에 얼떨떨하던 것도 잠시, 클로이는 입매를 비틀어 삐뚜름하게 웃었다. 초라하게 박제 당한다고? 이 클로이 님을 누가 감히. 귀띔까지 받았는데 더없이 화려하게 등장해주지. 흥.

“가면 되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클로이는 팔짱을 척, 하니 끼고선 턱을 치켜들었다.

“전하 요새 계절 타는 거야? 우울감에 모든 게 비관적으로 보여?”

“로이, 농담할 기분이 아니야.”

“나도 농담 아닌데. 대체 전하는 아르네 공녀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초라하게 박제될 거라고? 전하의 피앙세는 아르네야, 아르네. 여태 전하의 피앙세랑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

“아르네 공녀가 발을 헛디뎌서 계단을 구를 수 있을까? 아르네 공녀가 호수에 빠지는 건? 기사서임을 받은 공녀가 멀쩡한 언덕에서 굴러 목이 부러질 수 있을까?”

그녀가 읊는 건, 레이얼의 피앙세들이 겪었던 전부 불운한 사고들이었다.

“아르네 공녀는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연회에서 자신을 초라하게 박제 당하도록 놓아둘 리 있겠어?”

“…….”

“아르네라고. 아르네.”

클로이는 아르네에 한껏 힘을 실어 발음했다. 이 무겁고도 찬란한 이름을 어떻게 지켜오고 있는데, 누가 감히 아르네를 초라하게 보도록 놔둘까 보냐. 클로이는 투지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응?”

빤히 바라만 보는 레이얼을 향해 채근하듯 되묻자, 문득 레이얼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녀는 아르네지.”

“다른 사람은 안 믿어도 전하는 믿어야지. 한편인데 섭섭하잖아.”

“저런……? 누가 들으면 네가 아르네 공녀인 줄 알겠구나. 진정하렴.”

레이얼은 별 뜻 없이 한 소리였겠으나 클로이는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흥, 아르네 공녀가 아니면 시오도르의 비열한 짓에 화도 못 낸단 말이야?”

“그런 뜻이 아니란 걸 알면서.”

발끈한 기색으로 역정 내자, 레이얼이 달래듯 좋은 목소리를 내주었다.

“그게 그거지. 아니긴.”

“아니야.”

“전하도 거짓말에 영 서툰데?”

“글쎄 아니래도. 좋아서 그랬어.”

“어……어어?”

이번엔 두 볼이 화끈했다.

“좋아서 그랬다고. 이렇게 내 편에 서서 후련하게 말해주는 건 오랜만에 들어봐서.”

그래 그런 뜻인 걸 아는데,

“우린 한편이니까 당, 연한 거지. 흠!”

뜨끈하게 달아오른 볼이 도통 식지 않는다.

“그래. 내 편.”

이 시오도르가!! 아까부터 말을 계속 이상하게 하네. 굳이 내 편이라고 말하며 웃는 남자를 보며 클로이는 불만스럽게 입을 씰룩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쩐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자, 그럼 기운을 차렸으니 일이나 해볼까, 로이?”

클로이는 레이얼이 던져주는 메모지를 맵시 나게 잡아챘다. 저택 도면도와 목표물이 표시된 종이였다.

“아, 벌써 오늘이었나? 나 요새 정신없이 바빠서 깜빡했어.”

“바르벨 후작이다. 화전민이 발견한 광산을 무력으로 빼앗고 무자비하게 도륙했지.”

“그리고 광산에서 뽑아낸 돈을 길롯에 갖다 바치고?”

“유능한 부하씨. 가서 탈탈 털어오렴.”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클로이는 레이얼의 말에 장단 맞추듯 무릎을 꿇어 기사의 예를 취해 보이며 웃었다.

“탈탈 털어오라니. 왜 또. 이번엔 기사들 검이라도 맞추게?”

레이얼은 로이가 가져다주는 것들을 정리해 세력을 늘이는 한편, 기사단에도 꽤 많은 부분을 쏟고 있었다. 자고로 세력이란 권력과 무력을 일컫는 것이었으니 당연했다. 아르네 공작이 황제 앞에서 소신 발언을 할 수 있었던 건 제 신념을 지킬 힘이 있어서였다. 제국 유일의 공작이라는 권력과 제국 제일의 기사단을 보유한 무력. 힘없는 자의 이야기는 묵살당하기 십상이나, 힘이 있는 자의 이야기는 의견이 된다. 레이얼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기에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죄다 ‘힘’을 기르는 데 쏟아부었다.

“검은 저번에 맞추었다.”

“그런데도 다이아몬드를 이렇게나 많이 가져오라고?”

클로이는 종이에 적힌 목표물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필요한 게 설마 검뿐이려고.”

“하긴 스콰이어도 들여야 할 것이고, 준마도 구해야 할 테니 돈은 많으면 좋지 뭐.”

기사를 제대로 두려면 갖춰줘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기사단을 봐왔기에 클로이는 순식간에 기사에게 필요한 것을 수십 가지는 떠올리며 이번 목표물을 이해했다.

“시간이 좀 넉넉하면, 한 줌이라도 더 집어올게.”

도면도가 찢어지지 않게 허리띠에 찔러 넣느라 정신이 팔린 클로이는, 스콰이어를 입에 담을 때 번뜩인 레이얼의 안광을 보지 못했다.

“……많이 가져오렴.”

“그래그래. 연무장도 있어야 하고 기사단 숙소도 있어야 하고 그렇지?”

“또 뭐가 더 필요하려나…….”

“뭐긴 뭐야. 무기고지. 그거 또 채워야 할 거고. 검 한 자루만 쥐여준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필요한 게 너무 많아 걱정이긴 하지만 꼭, 한 줌 더 집어와 줄 거라 믿어보마.”

“악랄하긴.”

“조심히 다녀오렴.”

악착같이 저를 부리려는 레이얼을 흘기던 클로이는 그에게 기어이 떠밀리고 나서야 움직였다. 발코니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어둠으로 녹아드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스콰이어를 알아……?”

레이얼은 로이가 보통이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영리하지만 허술하고, 고상하지만 호쾌하다. 로이는 지독히 모순적이었다. 가질 수 없는 두 평가를 꼭 한 번에 두른다. 예법을 어깨너머로 배웠다지만 그 누구보다 우아하게 움직이는 법을 알고 있었고. 몸을 세밀하게 다루는 것이 일인 기사들보다 더 세심하게 근육을 다룰 줄 안다. 심지어 배웠다고 했지. 저건 단순히 가족을 기사로 두었다고 이해할 법한 게 아니었다. 기사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것들도 태연히 내뱉지 않았던가. 레이얼은 아르네 공녀 일도 잊고, 로이가 말한 것들을 짜 맞추느라 여념이 없었다. 예법을 어깨너머로 배울 수 있고, 기사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글도 읽을 수 있는 신분이 뭐가 있을까. 문득 레이얼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설마 로이 저 녀석, 스콰이어인가?”

스콰이어, 다른 말로는 하급기사 혹은 수련기사. 서임을 받은 기사를 수행하며 말과 무구를 손질하는 것을 기본으로 온갖 수발을 드는 게 그의 일이다. 기사의 잡일을 떠맡으며 틈틈이 검을 사사받아 서임 기회를 노리는 게 일반적이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스콰이어라고 가정하니 모든 것이 아귀가 맞아 들어간다. 기사와 귀족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귀족가의 예법을 어깨너머로 배웠다거나, 글을 능숙하게 읽고 쓴다던가. 귀족식 어투에 익숙하다던가 혹은 기사단의 사정을 훤히 들여다보듯 한다던가.

“맙소사…….”

레이얼은 손을 들어 눈두덩을 덮어버렸다.

‘본업 쪽이 힘들어서.’

스콰이어라면 늘 다치고, 지쳐 보이는 것도 모조리 설명된다. 여자치고 키가 꽤 큰 편이니, 옷만 잘 갖춰 입는다면 체격이 좀 왜소한 남자처럼도 보일 것이다.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대책 없는 녀석이군.”

레이얼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이아몬드는 역시 다이아몬드였다. 난이도가 극악했다는 뜻이었다.

“흥, 그래봤자 레이디 손안의 다이아몬드지!”

클로이는 날아드는 검을 피해 허리를 한껏 젖힌 그대로 다이아몬드를 한 줌 더 쥐어 품에 넣었다.

“이, 양심 없는 놈아!”

극상품만 골라 모아놓은 주머니를 강탈한 거로 부족해 감정실에 따로 빼둔 상급 다이아몬드도 한 움큼 쥐어가는 모습에 바르벨 후작은 거품을 물었다. 다이아몬드 광산째 탈취한 놈에게 양심 없다는 소리를 들으려니, 헛웃음만 나온다. 클로이는 창밖으로 몸을 날리며 생긋 웃는 그대로 외쳤다.

“후작.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지! 선물은 고맙게 받아가오!”

“저, 날강도 같은 놈을 잡아라!”

나뭇가지를 박찰 때마다 바르벨 후작의 목소리가 확연히 멀어진다. 클로이는 후작저를 벗어나자마자 전력으로 달렸다. 경계가 어찌나 삼엄하던지 오늘은 꽤 늦어져 달이 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설상가상 황궁 경비조의 교대 시간과 맞물리기까지 했다. 나무 그늘에 숨어 틈을 노리는 클로이는 초조함에 가슴이 다 타버리는 기분이었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레이얼의 침실이었건만, 문을 열어주는 레이얼의 눈초리가 곱지 않다.

“……왜?”

어째 심상치 않아 물었으나 대답 대신 그는 한숨을 쉬었다.

“왜 그러는데 전하?”

클로이는 전리품을 빠르게 탁자 위에 꺼냈다. 작은 것 한 주머니와 품에 급하게 담아온 다이아몬드 한 주먹. 혹시라도 빼먹은 게 있을까 봐 품을 아주 샅샅이 뒤졌다. 그 결에 상의가 헐거워지며 슬쩍 벌어졌다.

“로이!”

그 모습에 레이얼이 몹시 기겁하는 목소리를 냈다.

“왜?”

“그러지 말아라!”

“전하를 더듬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기겁해.”

“뭐어?”

“어휴……. 잔소리쟁-.”

툴툴거리며 손끝을 옆구리 안쪽으로 깊숙이 넣어 쑤욱, 훑어낼 때였다. 한걸음에 바짝 다가선 레이얼이 갑자기 양팔을 강하게 붙들었다. 옷섶을 쥐고 있던 손과 옷 안에 들어있는 팔뚝을 교차하듯 움켜쥐자 단단히 결박이라도 당한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어?”

“위험하다고 로이. 허술해지잖아.”

그는 겨우 한 손을 썼을 뿐이다. 클로이는 그의 손아귀에 붙들린 제 모습을 보며 실소했다. 한 번씩 이렇게 완벽한 체술을 보여줄 때마다 감탄이 터진다. 레이얼이 구사하는 것은 북부의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북부의 체술은 사람과 괴수간의 것이라 보통 타격 위주다. 그런데 레이얼이 구사하는 것은 접근전이 대부분이었다. 주로 관절을 제압해 무력화시키는데 기술이 절묘하다.

“굉장한데 전하.”

북부에선 그다지 쓸모가 없겠지만, 수도에서는 유용하리라. 클로이의 질문은 그래서였는데, 어째서인지 레이얼이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쉰다.

“위기감이 느껴지진 않나? 제압당했잖아.”

“알아. 꼼짝도 못 하겠어. 이거 어디 가면 배울 수 있어? 파훼법이랑 제대로 좀 배워야겠어.”

“배워서 뭐 하게? 수도에서는 여기사를 뽑지 않아.”

“잠깐만! 이거 기사들은 다 안다는 뜻이야?”

난 왜 이런 걸 배운 기억이 없지? 작게 중얼거리는 로이의 말에 레이얼의 표정이 한없이 착잡했다.

“역시…….”

“응?”

“……로이, 다른 생각 말고 계속 내 부하로 있으렴.”

“뭐어? 평생 부하를 하라고? 싫어!”

“즉위하게 되면 정식으로 서임해주마. 어떠냐?”

“싫어. 일이 끝나면 나도 할 일이 있단 말이야.”

“물론 그때는 이렇게 밤에 부르지 않…….”

“안 돼, 결혼이 무슨 애들 장난이야? 내 피앙세가 싫어할 거야.”

“피앙세? 로이, 약혼했나?”

약혼을 말하는 레이얼의 얼굴은 분노로 무섭게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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