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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 아름다운 비극 (30/121)

030. 아름다운 비극2020.12.15.

“전하 지금 미쳤……읍!”

기겁해서 내지른 비명이 커다란 손에 막혀 사라졌다.

“읍읍!”

클로이는 순식간에 제 입을 단단히 틀어막은 레이얼의 손을 떼보려 애썼으나 애초에 힘으로는 그를 이길 수가 없었다.

“읍!”

그의 손목을 양손으로 붙들고 열심히 눈을 굴려보지만, 돌아오는 건 서늘한 질문이었다.

“누구지?”

“읍!”

“그래, 지금처럼 눈짓으로 지목하면 된다.”

“으으으읍!”

“대답하면 풀어주마.”

한 손으로는 목덜미를, 다른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은 그의 자세는 몹시 안정적이었다. 게다가 그는 일어서 있었다. 의자에 앉은 클로이는 여러모로 불리했다.

“으읍!”

“가급적 평화롭게 막아볼 테니, 염려 말고 알려다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평화롭게’라고 속삭이던 순간, 나른한 미소를 짓는 레이얼은 무척이나 매혹적이었다. 길게 뻗은 눈매가 내리깔리며, 촘촘하게 뻗은 속눈썹 사이로 비치는 시린 벽안이 갈고리처럼 시선을 긁어간다. 미인계냐……! 음흉한 속셈이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속절없이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서.”

조금 더 고개를 숙여 다가온 그와 코끝이 부딪힐 만큼 가까워졌다.

“죽이진 않으마.”

“……으읍?”

“당연하지. 죽이면 일처리가 번거로워져.”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던지, 레이얼의 손아귀가 조금 느슨해진다.

“주목받거든.”

뭐? 생각지도 못한 무시무시한 이유에 클로이는 경악했다. 설마, 일전에 살인이 안 된다고 말했던 게 그런 이유였나? 맙소사. 절로 턱이 툭 떨궈지며 입술이 벌어졌다. 그 결에 입술로 그의 손바닥을 긁은 건 말하자면 ‘사고’ 같은 거였건만, 레이얼은 아니었나보다.

“너! 너!”

손을 움켜쥔 그는 마치 희롱이라도 당한 것처럼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짓을!”

“전하?”

기겁하며 물러나는 레이얼을 잡으러 몸을 일으키던 클로이는 순간 진한 자괴감이 몰아쳤다. 왜 매번 이런 식이지……? 따지고 보면 레이디의 얼굴에 함부로 손을 댄 망할 자식은 시오도르인데! 어째서 제가 희롱당한 듯 저 난리인 거야?

“허어…….”

클로이는 낮게 탄식을 흘리는 것과 동시에 몸을 날려 레이얼의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큰 남자였기에 그를 틀어쥐기 위해 도움닫기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 손으로 목덜미를 감아 끌어 내리고, 다른 손으로 입술을 덮는 것까지 모두가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났다.

“…….”

아까와 완전히 역전된 자세였다. 다른 게 있다면, 그는 완력으로 풀 수 있으나 두고 보고 있다는 점일까.

“대체, 매번 왜 그러는 거야?”

“…….”

“레이디 얼굴에 함부로 손을 댄 게 누구야? 그래놓고 입술이 좀 스쳤기로서니 사람을 변태 취급을 해?”

“…….”

“어? 지금 내 손에 닿은 거 전하 입술이야? 그런 거야? 이번엔 내가 소리 지르면 되겠어?”

달아올랐던 얼굴이 클로이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빠르게 식었다.

“눈짓으로 말해 볼래?”

흠.

“대답하면 풀어줄게.”

느슨하게 손을 풀며 하는 말 역시, 그가 조금 전 했던 그대로다. 레이얼은 긴 한숨을 터트리더니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로이.”

그의 말은 손바닥으로 따끈하게 스며들었다.

“마음이 조급해서 예민하게 굴었어.”

“왜.”

“네가 잡힐까 봐.”

“날 좀 믿으라니까.”

“이건 믿음이 아니야. 걱정이지.”

“못 믿으니까 걱정스러운 거지 전하.”

“넌, 네 가족을 못 믿어서 걱정하나?”

레이얼의 한마디에 그만 입이 꾹 다물리고 말았다. 도무지 반박의 여지가 없는 소리였다. 진짜 짜증나게 영리한 남자라니까. 클로이는 티 없이 입을 삐죽이며 그의 입을 막았던 손을 내렸다.

“놔줘.”

내리려고 했다. 레이얼이 붙잡지만 않았으면. 클로이는 레이얼이 붙든 제 손을 까딱이며 다시 말했다.

“놔 줘. 전하.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되는 건 레이디의 입술뿐만이 아니야. 손도-.”

“누가 널 가르쳤지?”

“…….”

“배우지 않았다는 거짓말은 하지 말렴. 귀족가의 예법은 굉장히 까다로워서 ‘배워’야만 하는 것이니까. 너도 잘 알지 않나?”

“어깨너머로 배웠어.”

“앞으로 거짓말을 하면, 계약 종료 시점을 일 년씩 미뤄버릴까.”

“와…….”

“넌 매일 한가지씩은 거짓말을 하니, 곧 내게 평생 충성하게 되겠군.”

“악독한 시오도르!”

“그러니 말해.”

손을 붙든 레이얼의 손이 빙글 도는 것 같더니, 손가락 사이로 그가 파고들었다. 단단히 손깍지를 껴 뿌리치고 도망치는 것도 무리다. 저벅. 묵직한 소리와 함께 레이얼이 한 걸음 다가서자 얽히는 건 손가락뿐만이 아니었다. 너울처럼 늘어진 머리칼이, 코끝을 스치는 날숨이 모조리 뒤엉켰다.

“말해. 누구에게서 배웠지?”

그가 조금 더 고개를 비틀면 입술이 닿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민망함에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응?”

하지만 이건 기 싸움이었다. 절대 질 수 없다. 클로이는 로지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에요.’

그렇다면 나도! 다소 비장한 마음으로 힘껏 고개를 쳐들었건만, ‘뻑!’ 하는 심상찮은 소리와 함께 이마가 얼얼하다. 오, 맙소사. 피가 흐르는 코를 틀어막는 레이얼을 보며 클로이는 벌게진 제 이마를 움켜쥐었다. 아무래도 조준이 잘못된 모양이었다.

“어우, 전하 목덜미가 왜 이 모양이야?”

지은 죄가 있던 로이는 온갖 아양을 부리며 그를 주물럭거렸다. 원래는 코피를 멎게 하려고 시작한 것이었건만, 어느 순간 안마가 되어버렸다. 그만하라고 말해야 했는데, 로이가 필요 이상으로 능숙했다.

“시원하지 전하? 내가 진짜 안마 하나는 끝내주거든?”

“그……”

입을 떼려 할 때면 어김없이 어딘가를 찌릿하게 눌러버린다. 덕분에 레이얼은 수시로 정신이 혼미해졌다.

“전하는 늘 긴장하는 모양이지? 원래 이쪽은 긴장하면 뭉치게 되어 있거든. 여기가 뭉치면, 봐봐 여기도 딱딱하게 굳어 있지? 이러면 두통도 생긴다고.”

종알종알하면서 쉴새 없이 움직이는 손이 목덜미를 타고 오른손이 불쑥, 머리칼 속으로 들어온다. 두피를 꾹꾹 누를 때마다 머리끝까지 화끈하고 시원해지는 느낌에 레이얼은 신음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때. 좀 풀리는 것 같지 않아?”

“이것도 어깨너머로 배웠어?”

“아니지. 이런 건 어깨너머로 못 배우지. 예법은 눈으로 보면 딱 보이는데, 이건 근육을 따라 짚는 거라 진짜로 배워야 하는거 거든.”

“아아…….”

거짓말이 아니라고?

“전하 걱정은 고마운데 좀 믿어봐.”

클로이는 레이얼이 조금 전보다 확연히 늘어진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내가 예법 같은 걸 배워서 뭐 하겠어.”

“내 부하 노릇.”

“……전하는 눈치만 없는 게 아니라, 염치도 없구나.”

“수치를 모르는 너만 하려고.”

“말을 말자.”

“그래서 예법 선생은 골라낼 자가 없다?”

“없어. 없어. 절대 없어. 나를 믿어.”

자신만만한 어조에 레이얼이 나직이 한숨을 터트렸다. 팔랑팔랑 나부끼는 목소리엔 근심이라곤 찾아보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걱정에 가슴이 다는 건 레이얼, 오직 그 하나뿐인 모양이었다.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항의할 수가 없었다. 레이얼은 이 관계에서 완벽히 추가 기울었음을 알고 있었다. 집착하는 건 레이얼 시오도르, 오직 그 하나였다. 로이라는 가명을 쓰는 그의 유능한 부하씨는 그완 달리 이 관계에 아무런 미련도 애착도 없었다. 있다면 오직 ‘복수심’뿐. 날아갈 것 같이 가볍기만 한 로이가 진심이 되는 건 ‘복수’를 이야기할 때뿐이었다. 그 외의 것은 언제 놓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얕고 가볍다. 문득 레이얼은 로이의 가족이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다. 그에겐 허락되지 않는 ‘진짜’ 녀석을 마주할 가족이 부러웠던 건지도 모른다.

“가족은 좀 어때?”

그의 질문에 어깨를 누르던 팔꿈치가 크게 흔들렸다. 겨우 한마디에 말이다.

“곧 좋아질 거야.”

“많이 심각한가?”

“심각하긴 무슨. 한 며칠이면 털고 일어날 수준인걸.”

이건 거짓말. 참, 거짓말을 못 한다. 레이얼은 파르르 떨리는 로이의 목소리에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세웠다. 하지만 이내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야.”

“응. 다행이지.”

신뢰는 강요할 수 없다. 로이의 가족을 짓뭉갠 건 또 ‘시오도르’였다고 하니, 그는 뻔한 로이의 거짓말에도 이렇게 순순히 넘어가야 했다. 그 역시, 시오도르였으니 죄의 이름을 가진 그는 감내해야 했다.

“나도 조금 더 노력하겠다.”

“응?”

로이가 되물었으나 레이얼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소리 내 설명하기엔 섭섭하고 비참했다. * * * 두 시간을 내리 안마에 집중했더니, 레이얼은 화사하게 살아난 한편 클로이는 핼쑥해져 귀택했다.

“오, 아가씨. 정말 아파 보이세요.”

그녀를 맞이한 로지는 굉장히 기뻐했다.

“내일 눈물이라도 좀 흘리면, 아주 처연해 보이겠는걸요?”

“칭찬인 거지? 고마워.”

“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주무시지 마시고 서류 작업을 좀 하시면 어때요?”

“뭐?”

“이대로 잠들면 분명히 아가씬 다시 혈기 왕성한 얼굴이 될 거예요. 우리 아가씬 회복력이 남다르니까.”

그렇게 말하고 손에 펜을 쥐여주면, 잘 수가 있나……. 클로이는 정말로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을 새웠다. 덕분에 그날 저녁, 연회가 시작되었을 때 클로이는 피곤에 절어 상태가 아주 볼만해졌다. 얼굴은 해쓱했고 눈그늘은 푸르렀으며 피곤에 절어 걸음이 휘청이기까지 했다.

“어머나, 공녀님께서 정말 크게 앓으셨나 봐요. 완쾌 기념 연회라는데 아직도 아파 보이시는 걸요.”

“그러게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서 보기 조마조마하네요.”

파닥거리는 부채 뒤로 쉬지 않고 귀부인들의 이야기가 오갔다. 그들의 시선은 파리하게 질려 인사를 다니는 ‘아르네’ 공녀에게서 떠나질 못했다.

“뭐. 완쾌가 가능하겠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앓았던 것도, 공작 각하와 소 공작께서…… 흠흠. 그런 거 아니겠어요?”

“하긴, 흠흠. 걱정을 하지 않으려야 안 할 수가 없겠죠.”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면서요?”

“잘은 모르는데 만 명은 훌쩍 넘었대요.”

“어머, 무서워라.”

파닥파닥파닥. 부인들의 이야기는 공녀에서 아르네 공작을 거쳐 민란지로 옮겨갔다. 혹시라도 황실에 이야기가 새어 들어갈까 봐 헛기침으로 말을 뭉갰으나 이야기는 불붙은 것처럼 마구 타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공녀님!!!”

기사 하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아르네 공녀를 찾았다. 연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화급하고, 커다란 목소리에 사람들의 이목이 전부 쏠렸다.

“무슨 일이지?”

“큰일 났습니다! 공작님께서 회군 중 기습을 받아 위중하시답니다!!”

연회 분위기를 망가뜨리는 기사에게 쉿쉿-거리며 눈치를 주던 그대로 공녀가 굳었다.

“뭐?”

음악도 뚝 끊긴 가운데, 젊은 기사가 애통해하는 얼굴로 외쳤다.

“황실에서 공작님과 소 공작님께서 위중하시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마, 말도 안 돼!”

“아르네 공작께서?”

사방에서 소리 없는 경악이 번지던 가운데, 굳은 듯하던 공녀가 그대로 허물어졌다. 하얗게 질린 공녀가 눈물을 흩뿌리며 쓰러지는 모습은 무척 가련했고 또한 무척 아름다워 사람들의 이목이 모두 쏠렸다. 정말로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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