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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 그 남자의 진심 (29/121)

029. 그 남자의 진심2020.12.11.

아는 사람만 아는 지옥 같은 밤이 끝나고 아침이 되었다.

“후.”

에반은 밭은 숨을 몰아쉬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사나운 순간을 지켜본 들판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몇 시간을 내내 쉬지 않고 달려온 탓에 말은 잔뜩 지쳐 허덕이고 있었으나 에반은 애마를 살피는 대신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하나는 남아서 말을 관리하고 나머지는 흩어져서 수색한다!”

“네!”

기사들의 명령에 한목소리로 대답하며 빠르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철퍽. 누구의 발끝에서 울린 건지 모르겠으나 질척하고 비린 소음이 터지는 것으로 시작으로 피 마르는 수색이 시작되었다. * * *

“아버지. 그러고 보니까 클로이 선물을 준비하는 걸 잊었네요.”

“…….”

“아버지! 클로이 선물요!”

“아아…… 클로이.”

가물거리던 아르네 공작이 엘리오의 외침에 눈을 부릅떴다.

“우리 귀염둥이가…… 빈손으로 가면, 서운, 해할 텐데.”

“가는 길에 아쉬운 대로 기성품이라도 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엘리오는 점점 식어가는 아르네 공작이 정신을 잃지 않게 쉬지 않고 말을 붙였다. 깊게 베인 옆구리를 타고 흐르는 피는 거의 멎었다.

“우리 아기에게 그런, 걸…….”

푸르게 질린 입술을 달싹이는 공작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엉망이었다. 사실, 피가 멎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 죄다 흘려 더는 흘릴 게 없는 건 아닐까. 엘리오는 순간순간 치미는 불안감에 자꾸 목이 멨다. 빨리 와라. 자꾸만 덤불 밖으로 애타는 시선이 흩어진다. 가지고 있던 전서구중 가장 힘이 좋은 녀석을 날렸으니 지금쯤 누가 와도 와야 했는데, 이상하게 늦어지는 것이 영 심상치 않다.

“저도 우리 귀염둥이에게 그런 걸 주고 싶진 않지만, 빈손보다야 낫지 않겠어요?”

“하긴…….”

불안한 속내와 달리 공작에게 건네는 엘리오의 말투는 가벼웠고, 태평하기만 했다. 손에 묶어둔 검을 확인하는 순간에도.

“뭘 사야 덜 서운해할까요?”

“…….”

“아버지?”

“…….”

“아버지!”

눈을 감은 공작을 애타게 부르던 엘리오는 별안간 벌떡 일어서며 검을 매섭게 휘둘렀다. 챙! 검날이 맞부딪히며 섬광 같은 빛무리가 번쩍이는 것과 동시에 엘리오는 신음했다.

“소공작님.”

그의 검을 받아낸 건 애타게 기다리던 얼굴이었다.

“에반.”

“좋은 아침입니다.”

“마차를 만들어서 오는 줄 알았잖나.”

“공작님을, 허름한 곳에 모실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능청스러운 대답과 달리, 에반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조금 더 서두를 것을 그랬습니다. 주인을 이런 누추한 곳에서 기다리게 하다니.”

“그러게, 기다리다 진이 빠졌지 뭐야.”

한 무릎을 꿇어 곧장 공작을 확인하는 사이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오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공작보다 덜하다 뿐 엘리오 역시 넝마가 되어 있었다. 가물가물한 그의 입안으로 불쑥 알약 세 알이 들어왔다.

“삼키세요. 아가씨께서 보낸 ‘명약’이니.”

“우리 귀염둥이가?”

입을 달싹이는 사이 약은 스르르 녹아 사라졌다. 그리고 한 호흡이 끝나기도 전 엘리오가 경악에 질린 소리를 냈다.

“대체 이게 무슨 약이지?”

“그러게요.”

빙긋 웃은 에반은 이내 공작에게 약을 물렸다. 이번엔 두 알이었다. 그리고 에반은 의식 없는 공작의 뺨을 힘껏 때렸다. 짝!!! 살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단번에 공작을 깨우는 데 성공한 에반이 상냥하게 속삭였다.

“모시러 왔습니다. 주인님.”

  그날 밤, 클로이는 온종일 기다리던 전서구를 품에 안았다.

“…….”

휘갈겨 쓴 에반의 글씨는 끔찍했지만, 더 끔찍한 건 내용이었다. 편지를 덮을 때쯤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른 눈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대요?”

“뭐겠어. 뻔한 개수작이지. 민란군과 이야기가 잘되자 회군 중 근위대가 뒤를 쳤대.”

“그래서요?”

“전원 몰살이지.”

“아쉬워라. 남은 놈이 있었으면, 제가 찾아가 보려고 했더니. 그래서 공작님은 언제쯤 오시나요?”

클로이는 로지의 말에 짧게 웃었다.

“괜찮냐고는 절대 묻지 않는 거야?”

“에반님이 갔으니 당연히 괜찮으실 텐데, 뭐 하러요?”

“……일주일은 걸리겠대. 아버지랑 오빠 상태가 여간 심각한 게 아닌가 봐.”

“소공작께서도요?”

“아빠가 그 지경이 되었는데 오빠라고 괜찮았겠어?”

“제가 멍청한 소리를 했네요.”

“연회 준비는?”

“모두 끝났어요.”

능숙하게 복면을 뒤집어쓰는 클로이를 바라보던 로지가 주저하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꼭, 연회를 열어야 해요?”

“왜?”

“공작님과 소공작께서 위중하신 와중에 축하 연회를 열려니 영, 마음이 안 좋아요.”

“로지, 로지, 로지.”

찌이익, 매듭이 사정없이 졸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리는 가운데 클로이가 생긋 웃었다.

“막 병상에서 일어난 공녀가 가솔들이 열어주는 축하 연회장에서 ‘비극’을 전해 듣는다면 어떨까?”

“…….”

“동정 여론이 들끓을 거야. 출정 명령을 내린 황제가 맨입으로 넘길 수 없게 되는 거라고.”

“그런……!”

“난 아르네이기 전 북부인이야. 북부인은-.”

“계산이 철저하죠.”

마음이 좋지 않다던 로지가 눈을 번뜩이며 뒷말을 받았다.

“오늘은 늦게 들어오세요.”

“왜?”

“아가씬 지나치게 혈색이 좋으시니까, 밤새 고생을 좀 하시면 건강한 맛이 덜해지겠죠. 그럼 내일 더 가련해 보이실 거예요.”

맙소사. 세상 사람들 우리 로지 좀 보세요. 클로이는 손을 들어 박수를 쳤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배운다고. 우리 로지가 이렇게 독해. 황실 금고를 쥐어짜는 법을 너무 잘 알아.”

“사과는 못들을 테니, 약값이라도 받아내야겠어요.”

“좋은 자세야. 그럼 나도 다녀올게.”

“아가씨, 전 많이 안 바라요. 이튼 광산 하나만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황금 광산이 뉘 집 개 이름이야?”

“제국에 하나밖에 없는 핑크 다이아몬드 광산도 받아오셔놓고 엄살은.”

짝!

“하나만요. 예?”

등짝을 후련하게 내리친 로지는 어서 가보라는 듯 손수 창문까지 열어주었다.

“자자, 제가 이쪽 나무는 가지치기도 못 하게 해두었지요.”

공녀에게 창밖으로 뛰어내리라고 권하는 전속 시녀라……. 클로이는 밀어두었던 자괴감이 몰려들었다.

“넌,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 * *

“뭐라고 생각하냐고? 잘생겼다고 생각해.”

레이얼은 너무 당당한 로이의 말에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로이.”

들고 있던 서류가 툭 떨어졌다.

“돈도 많다고 봐.”

“로이.”

“그러니 크게 문제가 아닐 것 같은데. 설마 없어?”

“로이,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잖나.”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슬슬 문지르는 레이얼의 표정은 진지했다.

“광산을 달라니. 세크레스 때가 특별했다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나?”

“광산도 없는데 설마 내가 눈치 없이 전하를 곤란하게 한 거야?”

“그럴 리가 있나. 황족에게는 품위 유지비 외에 지급된 광산과 영지가 있다.”

“말하자면 자급할 구석이 있다는 뜻이구나.”

클로이는 그의 말에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보통은 하나. 나머지 황실 소유의 광산은 전부 황제의 몫이다.”

“……그럼 황후 폐하도 광산을 가지고 있나?”

“당연하지.”

레이얼은 황후 이야기를 꺼낸 로이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빠진 것을 눈치챘다.

“황족에게 주어지는 광산은 전부 금. 그 이하의 것은 없다.”

“채굴 가능한 것들로 말이지.”

말 끝에 고개를 기울인, 로이가 물었다.

“황후가 황금을 씹어 먹고 사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지?”

“미녀가 돈을 좋아한다고 말해준 건 네가 아니었나?”

셔츠에 달린 단추가 다이아몬드였던가. 번쩍거리는 길롯백작의 차림새가 떠오른 레이얼은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구겼다. 그 천박한 꼴이라니. 그런 식으로 쓰면 당연히 늘 돈이 부족할 것이다.

“계산이 맞지 않는데?”

“……로이, 본래 귀족가의 레이디들은 돈이 많이 필요한 법이란다. 반지 목걸이 같은 것뿐만이 아니라…… 하다못해 드레스에도 보석을 달기도 하거든.”

연회장에서 본 황후는 언제나 아름다웠으나, 미련하게 화려한 차림은 아니었다.

“그런가…….”

논쟁을 이어가는 대신 클로이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차피 ‘로이’의 신분으로 나누는 이야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공녀’의 신분으로도 황후를 그리 잘 아는 편이 아니다. 레이얼이 그렇다고 하니 자신은 모르는 사치가 있는 모양이었다. 클로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제 채 다 못 읽은 서류를 집어 들었다. 역시 기가 질릴 만큼 대단한 인원이다. 이 사람들에게 그 돈을 받고도 더 바란다고? 황금이 아니라 다이아몬드를 갈아먹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서류를 두 장째 넘겼을 때였다. 일에 골몰하는 듯하던 레이얼이 입을 열었다.

“혹시, 돈이 필요한 거라면…….”

“응?”

“돈이 필요하다면 내가 주마.”

“돈을 준다고?”

“가족의 치료비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닌가?”

무슨 망상이 매번 저렇게 빈곤하담. 클로이는 이를 꾹 깨물었다. 당연히 아르네 공작을 상하게 한 대가를 받아낼 작정이긴 하나 아무렴 고립된 시오도르에게 손을 벌릴쏘냐.

“그런 거 아니야.”

“그럼.”

“광산을 턱턱 내주길래, 하나 더 줄 수 있으려나 싶어서 물어본 거야.”

“그러고 보니, 나도 첫날부터 네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지.”

어, 들으면 안 될 것 같아.

“전하, 난 괜찮-.”

“넌, 정말 거짓말을 못 해. 정직의 미덕을 새기렴. 어설프게 속이다가 일을 그르치지 말고.”

“어설프다니?”

기분 나쁘다는 듯 팔짱을 끼고 흥, 소리를 내보았지만 레이얼은 미동도 없었다.

“로이 잘 들어라. 넌 사람을 잘 속여. 그런데 거짓말은 잘 못 해.”

“무슨 소리야?”

“대범하고 영리하지만, 의외로 작은 부분에서 서툴지. 조심해라. 분명 별것 아닌 데서 꼬리가 밟혀 곤란해지는 순간이 올 테니까.”

“……귀공의 충고는 감사히 마음에 새기겠소.”

“네게 그 귀족의 말투를 알려준 이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레이디가 아닐 땐 절대 쓰지 말아라.”

“왜, 또. 안 어울려?”

부어터진 목소리로 툴툴거리는 로이에게 레이얼은 서류 하나를 건넸다.

“예법 선생을 조사한다고?”

“정례 회의에서 나온 안건이다. 수도 내의 예법 선생들을 황가의 이름으로 불러들일 예정이다.”

“저런?”

“말해주어야지 생각했는데, 그간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다. 로이 이중 너를 가르친 자가 있다면, 반드시 입을 막아야 한다.”

“걱정 마.”

“이들은 ‘귀족’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다. ‘평민’이 문제를 일으켰다면 나서서 정보를 풀어놓을 것이다. 반드시 막아야 해.”

“내가 말했지, 잡히면 우리는 모르는 사이라고.”

“말해라. 누구지?”

클로이는 정색한 레이얼의 모습에 서서히 표정을 지웠다.

“분위기가 살벌한데. 설마, 내가 지목하면 말을 ‘못’하게 만들 작정이라던가……?”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서 풀어볼 요량으로 던진 농담이었다.

“해야 한다면.”

그런데 레이얼은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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