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 가슴에 새길 소리2020.12.08.
“윽!”
클로이는 단번에 로지의 멱살을 틀어쥐고 벽으로 몰아붙였다.
“항상 정보는 신중히 다루어야 한다고 로지, 네가 가르치지 않았나?”
“아가씨.”
“아르네의 분열을 바라는 곳이 얼마나 많은지 잊었나? 속임수일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고 이렇게 휘둘리-.”
“가문 전서구가 물어왔습니다.”
“……!”
가문 전서구를 부리는 건 ‘아르네’만이 가능하다.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라는 뜻이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어째, 사방이 깜깜해 클로이는 머리를 세게 털어냈다.
“……언제?”
“두 시간 전에 왔고 곧장 나와 아가씨를 찾아 수도를 뒤지는 중이었습니다.”
로지는 잡혔던 멱살이 풀리자 작게 기침하면서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
“소 공작께서도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엘리오 오빠까지?”
클로이는 어쩐지 멍한 기분이었다.
“민란군과 이야기가 잘됐다고 했잖아.”
“아가씨…….”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통제를 벗어나 벌벌 떨린다. 로지의 멱살을 풀어준 게 아니다. 갑자기 힘이 빠져 손이 풀린 거였다.
“아가씨, 일단 귀택하신 후 에반과 함께-.”
“먼저 가.”
“아가씨!”
유사시다. 공작과 후계자가 나란히 부상을 당했다. 남은 건 클로이뿐. 좋든 싫든 그녀는 이제 가문의 예비 후계자로 보호를 받아야 했다. 대체 밤마다 뭘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날까지 고집을 부리는 클로이가 로지는 이해되지 않았다.
“정 이러시면 저도 힘을 쓸 수밖엔 없습니다.”
로지의 눈빛이 단박에 변했다. 한발 물러서며 공격 범위를 넓히는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북부인은 계산이 철저하지.”
전신에 가볍게 경계를 두른 로지의 자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을 텐데도 클로이는 두 손을 늘어뜨린 그대로였다.
“밑지지도, 빚지지도 않기 위해 들러야 할 곳이 생각났어.”
“아가씨.”
“더 받아내야 할 것이 늘었다니 더더욱 그냥 갈 순 없지.”
“…….”
“기다리지 말고, 뒷문 열어둬. 그리고 조만간 문을 닫아걸 준비를 해.”
단호하고도 차분한 명령은 지극히 ‘아르네’의 후계자다웠다.
“문을 닫으시렵니까?”
“닫는다. 그러니 돌아가 준비해.”
로지는 자신의 작은 주인이 지극히 냉정한 판단을 내렸음을 깨달았다. 귀족가에서 문을 닫아건다는 이야기는 ‘작위 계승’이 완벽히 끝나기 전까지 외부와 단절하고 내부 정리에 들어간다는 의미였다. 그때만큼은 모든 방문을 거절해도 흠이 되지 않는다. 황제일지라도!
“에반에게 기사단을 내주고 아버지를 모셔오게 해.”
“그럼 타운 하우스의 호위는…….”
“내가 지금 ‘침입자’를 살려야 할 이유가 있나?”
그동안 자비를 베풀어 죽이지 못했을 뿐 개미 떼처럼 달라붙는 암살자들을 처리해도 된다면 일은 쉽다.
“다녀오세요.”
로지는 돌아가자는 소리 대신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똑똑. 기다리고 있던 소리에 레이얼은 문을 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로이, 오늘 갔던 일은-.”
“살인하고 싶어지면, 더한 방법을 찾아준다고 했지?”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얼굴이었다. 서늘한 표정이 꼭 얼음을 깎아 만든 듯 냉엄하기 짝이 없다.
“로이?”
“전하. 어떻게 해줄 거야?”
성큼 내딛는 큰 걸음에 그들의 사이가 훌쩍 좁아지며 냉기가 훅 끼쳤다. 밤바람을 내내 맞고 와서임을 안다. 하지만, 레이얼은 순간 그것이 마치 차게 식은 로이의 마음인양해서 가슴이 철렁했다.
“무슨 일이지?”
“전하가 모르는 척해준다면, 오늘 밤 당장 황제로 만들어 줄 수 있어.”
“로이 진정해라.”
그는 갑자기 로이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데이반 남작이 혹시 뭐라고 했나?”
“그 머저리는 연막탄에 놀라 반지를 가져가는 것도 모르다가 나중에 소리나 좀 질러댔어.”
허리띠에서 반지를 싼 손수건을 꺼낸 로이가 레이얼의 손에 꽉 쥐여주었다. 그의 손바닥에 올려서 손가락까지 친히 접어주는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었으나, 그 시선이 사뭇 달랐다. 로이의 시선은 단 한 번도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못 박아 둔 듯 그의 얼굴에 단단히 매여 사납게 빛났다.
“가져 가.”
“무슨 일이냐니까.”
“내 가족이 다 죽게 생겼어.”
“뭐?”
레이얼은 로이의 말에 침통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황실은 잠잠했다지만 길롯에 연을 대고 있는 자가 한둘이 아니니, 어디서 누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까진 모른다. 제 사람을 아낀다고 해놓고선, 보호는커녕 이렇게 넝마가 되도록 몰랐다는 사실에 익숙한 자괴감이 들었다. 레이얼은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찌를 듯 쏘아보는 곧은 시선이 마치 칼날 같다.
“로이, 황의를 보내줄 테니-.”
“황의는 죽은 사람을 살려? 그런 게 아니면 됐어. 의사는 나도 부를 수 있어.”
성큼. 또 한 걸음 다가서자 가깝다 못해 몸이 살짝 맞닿기까지 했다.
“전하 다시 물어볼게. 오늘 밤, 황제가 되는 건 어때?”
“황족 시해는 사형이지. 더더군다나 황제라면 삼대를 멸족한다.”
“걱정하는 거야 경고하는 거야?”
지척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타고 흐르는 날숨이 기억과 다르게 달콤하다.
“피해자가 반역자라는 오욕을 뒤집어써도 괜찮은지, 흉수를 단칼에 죽여도 후회 없을지 묻는 거다.”
“누가, 누가 단칼에 죽인댔어.”
여전히 사나운 말투지만 찰나에 파르르, 눈동자가 떤다. 레이얼은 로이가 쥐여준 손수건을 성의 없이 툭, 던져 버리곤 팔을 벌렸다. 이미 맞닿아 있지만, 그것과 이건 다르다.
“이리 와. 로이.”
“…….”
“착하기도 하지.”
떨림은 속눈썹에서 눈동자로, 그리고 입술로 차근히 번졌다. 얼마나 짓씹어 놨는지 붉게 달아올라 너덜거리는 입술이 바르르 떠는 것을 보며 레이얼이 속삭였다.
“나를 믿었구나.”
순간 로이의 눈이 크게 부릅뜨였다.
“내가 한 약속을 믿어준 거지?”
‘네가 살인을 결심할 만한 상황이 닥친다면, 반드시 그보다 훌륭한 복수를 약속하마.’
그제야 로이는 어째서 자신이 이곳에 왔는지를 똑똑히 깨달았다. 자신은 제대로 된 단죄를 바라고 있었다. ‘가해자’에게 제대로 된 ‘죗값’을 치르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황제와 황후를 찾아가는 대신, 레이얼에게 온 것이었다. 단순히 그것들의 멱을 따버리는 것으로는 부족해서. 이 분노와 억울함을 어쩌질 못해서. 그것을 깨닫자 내내 눌러둔 것이 울컥울컥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삼켜도 목구멍이 아프고, 뜨겁다.
“이리 와. 아무도 네가 우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해주마.”
개수작 부리지마! 그러나, 정작 잇새로 터진 건 핀잔이 아니라 울음이었다. 복면이 순식간에 푹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클로이는 무섭도록 솟아나는 눈물에 그만 고개를 떨구었다. 그저 턱을 조금 끌어당기는 것만으로 그의 가슴에 이마가 닿고, 잇새로 터지는 울음이 그의 셔츠 사이로 스민다.
“으으으윽…….”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예쁘지 않은 울음소리가 자꾸만 새어 나갔다.
“반드시, 복수해주마. 속이 후련해지도록. 오늘 몫까지 톡톡히.”
어깨 위로 무거운 온기가 둘리고 귓가로 다정하고도 상냥한 속삭임이 울렸다. 레이얼은 바짝 힘을 줘 그녀를 안아주었다.
“약속해.”
“약속하마.”
“더없이 무참한 끝을 약속해!”
“네가 만족할만한 마지막을 약속하마.”
“기필코 곱게 죽지 못하게 할 거야.”
“그렇게 될 거다.”
클로이는 그의 셔츠가 젖다 못해 비치도록 레이얼의 품 안에서 실컷 울었다. 그의 셔츠를 움켜쥔 작은 주먹엔 뼈마디가 하얗게 돋아 있었다.
“좋은 약 좀 줘봐.”
실컷 울고 난 로이가 한 첫마디란 이토록 당당했다.
“……무슨 약.”
레이얼은 축축하게 젖은 셔츠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몹시 애를 썼다. 품에 안고 있을 땐 별로 모르겠더니 로이가 떨어지고 나자 젖은 자리가 식어 차고 질척한 것이 맨살에 달라붙어서인지 계속 신경이 쓰였다.
“가족이 많이 다쳤어. 뭐 좀 좋은 약 없어?”
“내상인가?”
“외상이야.”
“……외상엔 솜씨 좋은 의사가 최고지. 황의를 내줄 테니 데려가렴.”
“솜씨 좋은 의사는 나도 있어.”
“믿어도 되는 사람이야.”
“나도.”
레이얼은 로이의 고집스러운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제 아무리 솜씨가 좋다고 해봐야 평민이 부를 수 있는 의사란 뻔했다.
“로이, 황의는 생각보다 대단하단다.”
“죽은 사람도 살려?”
“장난하지 말고.”
“나 진지해. 내가 부르는 의사도 죽은 사람이 아니면 대충 다 고쳐.”
흠, 하는 소리와 함께 레이얼이 관자놀을 꾹 눌렀다.
“일루미넴을 만든 이를 내주마.”
“글쎄, 이쪽도 만만찮게 솜씨가 좋아. 그러니 약을 주라고.”
“……정체를 들킬까 봐 걱정되는 거라면 눈을 가리고 보내주마.”
“내가 전하를 믿었듯, 전하도 나를 좀 더 믿어봐. 내 혈육의 일이야. 가장 좋은 방법으로 치료하는 건 당연하잖아.”
단호하고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거절이었다. 레이얼은 로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외상이면 일루미넴 말곤 줄 게 없어.”
“그거라도 줘.”
“최대 일주일까지는 괜찮지만, 그보다 장복할 경우 부작용에 관해선 아직 모른다.”
“일주일이면 충분하지.”
클로이는 레이얼이 내미는 주머니를 받아서 야무지게 챙겼다. 일주일까지는 필요 없었다. 거버가 꿰매고 뼈를 맞추는 동안, 의식이 멀쩡하면 굉장히 큰 도움이 될 거였다. 마취초는 신경을 잇거나, 뼈를 맞출 때 환자의 의식이 없어서 잘못되어도 바로 잡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아르네의 남자들은 죄다 검을 잡는다. 어긋난 신체는 큰 걸림돌이 된다.
“고마워. 전하.”
클로이는 레이얼에게 기꺼이 허리를 숙였다.
“그럼, 당분간 보기 힘들어지는 건가?”
“응?”
무슨 말인지 클로이는 아주 잠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병간호해야 하지 않나? 그리고 로이, 외상은 진찰 한 번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야. 의사가 꾸준히 와줘야 하지. 돈은 있는 건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묻는 말에 클로이는 입을 작게 떨구었다. 진짜, 시오도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너무 기가 차니 말이 나지 않았다. 비록 사냥복 차림이라고는 하나, 옷감이 꽤 고급이었다. 그리고 레이얼도 제 입으로도 그러지 않았나……? 마치 귀족 같다고.
“전하, 진짜 눈치 없단 말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다시 한번 진심을 담아 충고할게. 눈치를 키우든지 아니면 부인이 시키는 대로 갱생해.”
“정말 무슨 소린지…….”
“가슴에 새길 소리지. 아무튼 내일 봐.”
“내일 온다고?”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루라도 빨리 우리 전하께서 폐하가 되지 않겠어?”
“무리하지 말아라.”
그의 말에 나가려던 로이가 몸을 돌리더니, 활짝 웃었다.
“불철주야 뼈를 갈아 모실 작정이니 꾀부릴 생각은 하지도 마. 전하.”
분명, 오늘 다친 건 로이의 가족이랬는데 그도 어딘가 잘못된 걸까? 으름장 같은 소리를 들었건만 비식 웃음이 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