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7. 가슴을 할퀴는 감각 (27/121)

027. 가슴을 할퀴는 감각2020.12.04.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근위대 소속의 블레이엄 헤논이 아르네 공작을 찾아와 씩씩거렸다.

“갑자기 회군이라니요.”

아르네 공작은 자리에 앉은 그대로, 턱짓을 했다.

“나가.”

“예?”

“블레이엄 헤논 자작. 실례, 헤논 부단장. 제대로 들어오시죠.”

아르네 공작은 두 번 말하지 않았다.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아르네 소공작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실수인 양 그의 작위를 붙여 부른 것은 까마득한 그들의 위치를 다시 새기게 해주기 위해서였으리라. 제아무리 길롯의 가호가 있다지만, 이곳은 반 전시상태의 부대였다. 심지어 교섭자와 통솔자는 명백히 ‘아르네 공작’이었으니, 그는 기사단 내에서의 위치로서도 작위로서도 감히 아르네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

블레이엄은 순식간에 목덜미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해선 막사를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물론 이번에는 막사 앞을 지키는 기사들에게 정확히 방문 목적을 이야기하고, 먼저 아르네 공작의 허락을 구한 정석 그대로였다.

“안녕하십니까. 아르네 공작각하. 블레이엄 헤논입니다.”

“내가 회군 이유를 귀경에게 설명해야 하는 이유는?”

찌익-. 정성스럽게 쓴 종이 위로 사인을 휘갈기는 공작의 손놀림을 따라 싸구려 종이가 펜촉을 물고 늘어지다 기어이 터지는 소리를 냈다.

“그건…….”

마주친 새파란 눈동자가 새벽 숲속에서 마주친 짐승의 안광같이 형형하다. 블레이엄은 차오르는 긴장감에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건…….”

사나운 기세에 눌려서만은 아니었다. 실상, 유일한 교섭권자이자 통솔자이며 아르네 공작이 일개 자작인 그에게 그 어떤 설명이나 양해를 구해야 할 이유는 없다. 명분이 없다. 블레이엄은 그제야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이곳은 황실이 아니었고, 자신은 황제가 아니다. 길롯 백작도 황제 없이는 아르네를 어쩌지 못하지 않았나! 등 뒤로 차게 식은 땀방울이 주르륵 흐른다. 공작은 단순한 질문 하나를 던진 후 고요히 그를 응시하고만 있다. 검을 뽑지도, 힘을 자랑하지도 그 어떤 위협도 하지 않은 채 새파란 눈동자를 그에게 꼽아두고만 있다. 단지 그뿐인데 입안이 바짝 마르고, 목이 졸리는 것처럼 숨이 허덕인다. 이것이 바로 아르네의 기세라는 건가. 블레이엄은 얼음물을 뒤집어 쓴 듯 온몸이 차게 식어 덜덜 떨었다. 마치 목덜미를 물린 사슴처럼 숨만 헐떡거리며 처분을 기다리던 그때였다.

“말 손질할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상냥한 음색이 그의 숨통을 틔웠다. 전신을 옭아매던 차가운 시선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며 블레이엄은 비로소 풀려났다. 오늘 아침, 민란군과 극적으로 협상이 타결되었다며 회군 명령이 떨어졌다. 그가 알기로 그 어떤 접촉도 없었다. 겨우 전령이 한번 다녀갔을 뿐이었다. 뭔가 알아보기도 전 이미 ‘협약서’는 새벽녘에 파발로 먼저 황성으로 떠났다는 소리를 듣고 눈이 뒤집혀 헐레벌떡 달려온 길이었다. 협약서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인지. 민란군과 언제 어떤 내용으로 협상이 된 건지 캐묻기는커녕 블레이엄은 입도 달싹하지 못했다. 아르네 소공작의 말에 정신없이 고개만 끄덕이다 뛰쳐나왔을 뿐이었다.

“제기랄.”

정신을 차린 블레이엄은 자신이 제대로 서기도 벅찰 만큼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릎이 금방이라도 꺾일 듯 휘청거린다. 하지만 이렇게 아르네 공작의 기세에 눌려 회군했다가는 무릎이 꺾이는 게 아니라 목이 꺾이고 말리라.

‘귀경의 활약을 기대해보겠어요.’

향이 그윽한 편지지에 적혀있던 우아한 필체. 발송인도 수신인도 없는 간단한 메모였으나 건네는 길롯백작도, 받는 그 자신도 지극히 공손했다. 마치, 황명처럼.

“어떻게 하지…….”

초조함에 얼굴이 해쓱하게 질린 블레이엄이 불안한 표정으로 사방을 훑었다. 사방이 어수선하고, 더러 들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어어 하다가 정말 회군하게 될 것이다.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그야말로 너무도 아르네에 어울리는 완벽한 회군이 아닌가? 어떻게 하지. 초조함과 극심한 스트레스에 핏발이 서 벌겋게 달아오른 눈을 해선 블레이엄은 사방을 훑었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 어떻게든. 그러나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한 달 넘게 빗질을 받아 윤이 자르르 흐르는 말들만 보일 뿐이었다.

“아아…….”

블레이엄의 잇새로 터지는 탁한 한숨을 가르고 새가 하늘을 날았다.

“출발하신대”

전서구를 받아든 클로이는 작게 부르짖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점잖게 굴어야 하는 걸 알지만, 좋아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 숨넘어가시겠네. 적당히 하고 빨리 서류나 확인하세요.”

그런 클로이를 보며 로지가 한숨을 쉬긴했으나, 그녀 역시 웃는 얼굴이었다.

“모레 아버지가 오실 텐데?”

“그래요. 사흘을 내리 말을 타고 달리신 분께 서류를 산처럼 쌓아 드리면 집에 돌아온 게 실감 나서 정말 기쁘실 것 같아요.”

“……사람을 악당으로 만들지 말아 줄래?”

“저는 그냥 그냥 사실을 말씀드렸는걸요.”

“어휴 정말. 로지는 가차없다니까.”

툴툴거리긴 해도 클로이 역시, 예전보다 굉장한 속도로 무리해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서류가 쌓여있으면 당장에 돌아온 날부터 두 부자는 집무실에 틀이 박힐지도 모른다.

‘한 장이라도 더!’

안건을 읽어내리는 클로이의 표정이 전에 없이 비장했다.

“차 한잔 드릴까요?”

“물 줘.”

“물요?”

“블랙잉그리드는 당분간 금지야.”

“왜요? 누가 향이 난다고 하던가요?”

연신 바쁘게 움직이던 클로이의 손이 딱 멎었다. 하지만 그건 잉크를 찍기 위해서라는 듯, 이내 태연히 펜촉이 잉크병에 담겼다.

“물 줘.”

클로이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고집스럽게 말했다. 간밤 티타임 이후 로지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다. 게다가 저건 질문이라기 보다는 확신에 가까운 말투였다. 아무 말도 해선 안 된다. 스윽. 내년도 경작 재배 목록을 보던 클로이는 여름 채소를 싹 지웠다.

“로지. 난 목이 말라.”

“네. 물 가져다드릴게요.”

옅은 한숨과 함께 고집스럽게 버티던 로지가 한걸음 물러섰다. 그대로 물러서나 했는데, 로지가 잔에 물을 따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차피 공작님 오시면 전부 끝인 건 알고 계시죠?”

“……어?”

로지의 말에 클로이는 그만 한껏 당황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안 돼요. 절대. 허락 해주실 리도 없고요. 비밀로 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고요.”

로지는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클로이는 새파랗게 타는 눈을 해선 제게 집착한다고 고백하던 한 남자가 떠올랐다. 파랑이 일던 색이 옅은 푸른 눈동자까지 완벽히 떠올리자 그 순간 쿵, 하고 가슴속에서 뭔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울렸다. 우뚝 멈춘 펜 끝을 타고 새카만 얼룩이 크게 번졌다. * * * 데이번 남작 지붕 끝에 매달린 클로이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빠가 돌아오는 건 좋은데, 밤 나들이를 하지 못하게 되는 건 큰 문제였다. 간밤, 자신을 믿으라며 큰소리를 탕탕 쳤지 않았나? 그런데 하루 만에 앞으론 못 올 것 같다는 게 말이 되나?

‘왜지?’

‘아버지가 좀 엄하셔.’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클로이는 제가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었는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면서도 맥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진짠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후우.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던 그때였다.

“남작님. 제발 넣어두십시오.”

초조해하는 기사의 목소리가 상념에 빠진 클로이를 일깨웠다.

“자꾸 그렇게 더듬고 두드려서 확인하면 레이디가 반지를 어디에 뒀는지 알아차릴 겁니다.”

“내가, 이렇게 딱! 품에 넣고 있고 자네들도 있는데 어떻게 가져간단 말이야.”

“제발, 남작님. 그러지 마십시오.”

쯧쯧쯧.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라.

“반지가 어디 있는지 진짜 몰라줄 수가 없구나…….”

클로이는 혀를 차며 품 안에서 작은 병을 꺼내 흔들더니, 힘껏 던졌다. 쨍그랑하는 파열음과 함께 유리창에 부딪힌 병이 깨지며 자욱한 연기가 터져 나왔다.

“크악! 이게 뭐야!”

“독일지도 모른다! 다들 밖으로 대피하라!”

“남작님 이쪽으로!”

사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가셔야 합니다. 위험합니다.”

“그래. 그래. 날 지켜!”

“떨어지지 말고 따라오십시오!”

“그래그래!”

짙은 연기에 밭은기침을 하며 남작이 단장을 뒤따라 허둥지둥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데이번 남작. 일전엔 실례가 많았소.”

우아한 듯 맑은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렸다.

“레, 레, 레이디?”

기겁한 남작의 외마디에 지붕 위에 선 늘씬한 인영이 팔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손에서 새파랗게 빛을 뿌리는 반지를 본 순간 남작은 반사적으로 제 품을 뒤졌다. 그러나 벌벌 떨리는 손에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 있던 반지가 어딜 간 거지?

“내, 내, 내 반지!!!”

가슴이 철렁하는 선뜩한 불안감에 남작이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지붕 끝에 선 레이디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넸다.

“귀공의 선물을 고맙게 받아가오.”

“안돼애!!!”

일곱 번째의 방문 역시, 기가 질릴 만큼 깔끔하게 성공적이었다. * * * 반지를 챙긴 클로이는 황궁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더는 그를 ‘로이’로 볼 수 없다는 건 분명했다. 로지의 말을 전부 옳았다. 아버지가 그녀의 밤 나들이를 허락해줄 리가 없다. 아버지를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레이얼을 이해시키자고 엄한 아버지인 ‘아르네 공작’을 소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날 팔 하나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계약을 해선 안 됐는데. 너무도 늦은 후회가 짙게 몰아친다.

“하…… 진짜 뭐라고 하지.”

코앞에 황궁이 보이자, 발걸음이 절로 느려진다. 이대로 도망가고 싶다는 충동이 무섭게 일었다. 그가 화를 내고 비난하는 게 두려운 게 아니었다. 또다시 제 편을 ‘빼앗겨야 하는’ 황태자가 지을 표정을 볼 자신이 없다. 아까부터 속이 타는 것처럼 울렁거리고 쓰리다. 클로이는 불안을 닮은 이 기묘한 감각을 그렇게 이해했다. 그런데 이건 대체……?

“로지?”

황궁을 코앞에 둔 어두운 골목길 안에서 튀어나온 로지도 이해가 안 되는데…….

“왜 울어.”

“아가씨.”

“너 왜 울어.”

어떻게 찾아왔냐는 바보 같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로지가 찾자고 치면, 클로이를 못 찾아낼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클로이는 눈물 범벅이 된 로지를 추궁했다.

“왜 우냐고!”

“공작님께서, 기습을 당해 중태에 빠지셨다고 합니다.”

“뭐?”

그 순간 누군가 가슴을 갈퀴로 쓸어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밤 내내 그녀를 괴롭히던 바로 그 감각이었다.

16566374501046.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