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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 안달나게 하는 레이디 (26/121)

026. 안달나게 하는 레이디2020.12.01.

  아득한 겨울 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새파랗게 타오른다.

“아…….”

“넌 어쩜 번번이 이러는 거야?”

“진정해 전하.”

집착이라니. 이분이 진짜 광산 때문에 속이 상해 돌아버렸나 봐.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게 분명해. 제정신이 들면 수치스러워서 죽고 싶어지겠지. 내가, 널 살려주마. 클로이는 자못 비장하게 입을 뗐다.

“전하. 전하. 전하. 나 좀 봐.”

“로이.”

“전하. 나 봐.”

클로이는 열이 잔뜩 올라 바르르 떠는 레이얼의 두 뺨을 손으로 쥐고는 시선을 맞댔다.

“전하. 뺏긴 건 콰이펄른이지 내가 아니야.”

“뭐?”

레이얼의 눈이 크게 부릅뜨였다.

“나 여기 있어.”

클로이는 잘게 떨리는 레이얼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를 내주었다. 알고 시작했지만 빼앗기는 것이 너무 쉽고 당연했다. 자신도 모르게 불안했을 테다. 그의 유일한 부하이자, 너무도 유용한 패. 레이얼은 콰이펄른을 보며 문득, 겁이 났을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게.

“전하, 나는 ‘시오도르’와 ‘이미’의 의미를 아는 유능한 부하라는 걸 잊었어?”

잡히지 않을게. 회유당하지 않을게. 잘할게. 걱정하지 마. 백 마디의 다짐보다 확실한 한마디였다. 내내 잘게 흔들리던 레이얼의 옅은 눈동자가 맑은 빛을 내며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말 끝에 클로이는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희고 가는 손가락이 향한 곳은 레이얼의 가슴팍. 더듬는 이유야 뻔했기에, 레이얼은 얼굴을 붉히는 대신 품으로 파고드는 보드라운 손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줘.”

“로이.”

“전하도 나를 좀 신뢰하는 법을 배우지 그래?”

그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로이의 말에 레이얼이 입술을 질근 씹었다. 그가 아는 로이는 영리하고 솜씨도 좋지만, 제 목숨 귀한 것도 안다. 그 말은 세크레스에서 무모하게 굴 리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걱정이 되는 건, 그녀의 말대로 콰이펄른처럼 빼앗길까 봐 겁먹어서인가?

“걱정이 아니라, 신뢰가 부족한 거라고?”

그의 질문에 로이는 생긋 웃었다. 이내 그의 손아귀에 잡혀 있던 가는 손이 스르륵 빠져나간다. 레이얼은 이번엔 뻔히 제 품을 파고드는 손을 어쩌지 못했다. 바스락 소리와 함께, 클로이는 레이얼의 품에서 광산증서를 빼 들었다. 검지와 중지로만 끌어낸 종이가 손끝에서 팔락였다.

“전하, 예고한 물건을 반드시 가져가는 레이디가 나야. 걱정 마. 알잖아. 내가 또 얼마나 몸을 사리는지.”

“괴수들에게도 곧 예고장이 가겠군?”

조금 전과 달리 단단히 경직되어있던 레이얼의 입매는 느슨하게 풀려있었다. 걱정이 가신 건 아니지만, 그는 자신을 다독이는 중이었다.

“해야 한다면.”

클로이는 레이얼이 보는 앞에서 광산 증서를 곱게 접어 제 품에 찔러 넣었다.

“특별히, 광산에서 캐낸 첫 다이아몬드는 전하에게 줄게.”

“핑크색 다이아몬드를?”

하하. 사랑스러운 빛을 뿜어낼 보석이 상상되었던지, 레이얼이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누가 전하 쓰래. 피앙세에게 줘.”

“저런? 네가 내 피앙세까지 신경 쓸 정도로 다정한 사람일 줄 몰랐다만.”

“나는 원래 내 것을 남에게 주는 사람이 아니야.”

“그래그래. 너의 큰 호의 기억하고 있으마. 그러니, 조심하렴.”

의미심장한 말인데,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레이얼의 모습에 클로이는 작게 웃었다.

“아니면, 일이 끝나고 같이 가는 건?”

“제국의 태양을 사사로이 부릴 순 없지. 태양께선 제국을 위해 헌신하시지요.”

“저런…… 매정하구나.”

“일 열심히 하고 있으면, 내가 다이아몬드 들고 올게.”

“기다리면 온다고?”

“그래. 걱정 말고 있어. 무사히 갔다 올 테니까.”

“그럴까 그럼.”

그의 내리깐 시선이 부드럽게 일렁인다. 처음 보는 다정한 시선에 클로이는 문득 기분이 이상했다. 알 수 없는 뭔가가 울컥 차오르기도 했고 명치가 간지럽기도 했다. ‘왜 이러지?’라고 생각하던 것도 잠시였다. 클로이는 어렵지 않게 이유를 찾아냈다. 저 눈빛이 익숙했다. 그녀에겐 꼭 저런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들이 있었다. 사랑과 온건한 염려가 가득 담긴 푸른 눈동자는 저런 식으로 자신을 주시했다. 달고, 하염없이 보드라운 시선. 아빠와 오빠를 떠올려서였을까. 불현듯 가슴이 버겁도록 두근거린다. 클로이는 툭, 레이얼의 어깨를 밀치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제 그만 일어납시다. 이만큼 우러러봤으면 충분했어.”

“넌 정말…….”

인상을 구기면서도 레이얼은 순순히 몸을 일으키며 손을 내밀었다. 잡고 일어나라는 소리였다. 역시, 매너는 최고라니까. 클로이는 그의 손을 꽉 맞잡았다. 잡자마자 커다란 손이 그녀를 어렵잖게 단번에 훅 들어 올린다. 기다란 팔을 접어 단번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모습이 마치, 낚싯바늘에 꿰인 물고기를 낚아채는 것 같다.

‘어…….’

순간 클로이의 고개가 갸웃했다. 자세 때문이었을까? 어쩐지 잡혔다는 기분이 들어 등골이 오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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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좋아 죽겠다는 말을 언제 쓰나 했더니, 바로 이럴 때 쓰는 건가 보다. 핑크 다이아몬드 광산을 거저 얻어서인지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덕분에 클로이는 공작저로 돌아가는 길에 네 번이나 멈춰서서 숨을 골라야 했다. 두근두근두근.

“촌스럽게 굴지 마!”

쉬지 않고, 레이얼의 품에서 증서를 빼내 오던 순간이 머릿속에서 반복된다.

“소도 아니고 뭘 이렇게 곱씹어.”

그러나 버럭대본들, 두근거림이 가실리 없다.

“마음대로 해라. 나도 이렇게 속물적인 줄 오늘에서야 깨달았지.”

자포자기하듯 중얼거리자, 두근거림이 손끝이 저릿해질 정도로 일었다.

“전하 때문에 심장 터지겠어.”

날 것 같은 기분을 어쩌지 못하고 클로이는 뒷문이 아닌 공작저 담장으로 풀쩍 뛰어올랐다.

“크흡. 완전 좋…….”

히죽거리던 클로이가 돌연 몸을 바짝 낮추곤 입을 꽉 다물었다. 공작저 후원, 달빛이 드리운 옅은 그림자 사이로 움직이는 녀석들이 보인다. 두무리로 나뉘어 하나는 공작저 본채 정문 쪽으로 하나는 후문 쪽으로 움직인다. 이것 봐라? 지금 아르네 공작저에 감히, 암살자 따위가 잠입한다고? 단 한 번도 생각도 못 해본 광경에 클로이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

저 눈치 없는 것들은 누가 보냈지? 늙은 시오도르가 보냈나. 아니면, 예쁜 시오도르가……? 어차피 그게 그거일 테지만. 입을 씰룩거리던 클로이는 담장에서 뛰어내리는 대신, 적당한 나무 그늘로 몸을 숨긴 후 은신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예사롭지 않은 소리가 서너 번 울리더니, 사방이 고요해졌다. 이윽고 공작저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잔뜩 짜증이 난 로지였다.

“진짜 귀찮아 죽겠네!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한 거야!”

한 손에 하나씩. 늘어진 남자 둘을 어린애를 들듯 가뿐하게 끌고 나와 정문 계단에서 후원으로 훅, 던져버렸다.

‘맙소사.’

클로이는 로지의 괴력에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짚었다.

“아, 로지 양?”

“에반?”

“오늘은 로지 양이 빨랐네요.”

문이 채 닫히기 전 에반이 축 늘어진 남자 셋을 끌고 나왔다.

“전 둘이잖아요. 어쩐지, 오늘따라 좀 적다 싶었는데 그쪽으로 셋이 갔어요? 바쁘셨겠어요.”

“마침, 차를 한잔 마실까 하고 나오던 길에 봐버렸지 뭡니까.”

대충 괜찮았다는 소리를 하며 에반이 빙긋 웃는 게 보인다.

“혹시 몇 명이라던가요?”

“이 친절한 분이 다섯이라고 말씀해주시더군요.”

에반은 죽은 듯 늘어진 남자를 턱짓으로 가리키는 것과 동시에 들고 있던 사람들을 하나씩 집어 던졌다. 쿵, 쿵, 쿵. 암살자들이 짐짝처럼 한곳에 다소곳이 쌓아둔 에반이 모노클을 고쳐 쓰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전부 예전처럼 처리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말레사가 국경지 경비 초소에 인원이 부족하다던데. 잘됐어요.”

“일단 명부와 인상착의를 기록하러 가보겠습니다. 인수인계는 확실해야 하니까요.”

“고생하세요.”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이상한 기분에, 클로이는 에반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벌떡 일어나 달려 로지를 따라잡았다.

“로지.”

“아가씨?”

“방금 그거 다 뭔데?”

“저도 밤에 하는 일이 좀 있어서요.”

“말 안 해주고 싶다고?”

“꼭 들으셔야겠다고요?”

꺼리는 게 분명한 로지의 태도에 눈을 가늘게 늘이던 것도 잠시, 클로이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흔들었다.

“그게 뭔데요?”

“우리 맞교환하자.”

클로이는 상도덕을 아는 사람이었다. 바스락. 차가운 밤바람에 종이가 흩날리며 듣기 좋은 소리를 만들어 냈다.

“광산증서……?”

로지의 시선이 눈에 띄게 떨렸다. 달빛에 희미하게 투과되어 보이는 글자를 굳이 가리지 않은 건 미끼였다.

“어쩔래?”

“에반 님은요?”

“일단 제외해. 한밤중 나들이를 알게 되면 신경증으로 쓰러질지도 몰라. 섬세한 남자잖아.”

“섬세……라는 말이 제가 알던 거랑 뜻이 좀 달라졌나 보죠?”

“대충 흘려들어.”

“……먼저가 계세요. 쟤들 마차에 좀 실어두고 금방 갈게요.”

“그래.”

. . . 달도 지고 지독히 어두운 새벽. 클로이와 로지는 난데없는 티타임을 가졌다. 로지의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아르네 공녀를 해치우려면 아프다는 지금이 적기가 아니겠냐는 말에 클로이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아하. 며칠 안 됐구나.”

잠깐이었지만, 자신을 안심시키려 로지가 거짓말한 건 아닌지 의심했던게 미안해졌다. 그래서 클로이 역시 최선을 다해 정직해지기로 결심했다.

“그나저나 무슨 광산이에요?”

“세크레스. 핑크 다이아몬드가 나온대.”

“아, 세크레스!”

“로지는 알아?”

“그럼요. 황제가 길롯을 들이지만 않았어도, 공작님께서 재출정하셨을 거예요.”

“출정씩이나?”

“세크레스는 흔한 광산이 아니에요. 입구는 일반 광산 같은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고 거미줄처럼 길이 나 있거든요. 그 안에 짐승들이 꾸역꾸역 들어와 갈림길마다 터를 잡았어요.”

“아아…… 역시.”

아무리 아버지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고작 괴수 무리에게 지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그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클로이는 설핏 미간을 구겼다. 혼자 가서 정리해볼까 했더니, 아무래도 누군가를 데리고 가야 할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걸 받아오셨어요?”

“누가 부동산 사기를 당했다며 가질거냐 묻기에 달라고 했지.”

“광산을?”

“뭐 어때? 보수 대신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걸.”

“잠깐만요, 지금 그 말은 여태 무보수였다는 건가요?”

“응? 으응.”

클로이의 대답을 들은 로지의 눈에 대번에 불이 올랐다.

“아니! 이 수도 것들은 왜 이렇게 악랄하죠? 안 되겠어요. 공작님이 오시거든, 곧장 세크레스 쪽에 보낼 기사를 꾸릴게요.”

북부는 계산이 확실하다. 금쪽같은 공녀님을 감히 무보수로 부렸다니 로지가 본전 생각에 눈에 불을 피울 만했다. 클로이는 이를 아득바득 갈아대는 로지를 다독였다.

“지금 말고.”

“왜요!”

“세크레스를 지금 열면, 반드시 황제에게 빼앗겨. 기다리라고.”

“안쪽만 정리하고 입구는 대충 놔두면 되는……!”

“그럴 필요 없어. 머지않아 황제가 바뀔 테니 조금만 기다려.”

이를 박박 갈아대던 로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아가씨. 대체,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 거예요?”

설핏, 그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던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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