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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5. 지금 나한테 집착하는 거야? (25/121)

025. 지금 나한테 집착하는 거야?2020.11.27.

기분 좋은 기다림은 설렘이 되어 가슴을 빼곡히 채웠다. 가슴을 터트릴 것 같은 설렘은 클로이를 자꾸만 웃게 했다.

“오늘은 출발하셨으려나.”

복면을 뒤집어 쓰면서도 클로이는 웃었다.

“황실 기사도 함께 움직이니까 사흘은 걸리겠지”

담을 넘으면서도 중얼거리며 웃었다.

“하…… 설레네.”

“왜?”

레이얼의 침실에 들어서면서도 중얼거린 건 실수였다.

“……오랜만에 도둑질할 생각에?”

“거짓말이 어설프다고 백번쯤 이야기 해주면, 좀 믿을 건가?”

“소질 없는 거 알면 대충 넘겨.”

휘적거리는 걸음으로 들어선 클로이는 익숙하게 제 지정 자리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또 뭘 봐야 하…… 이건 뭐야?”

탁자 위에 늘어진 서류를 별 생각 없이 집어 들던 클로이는 눈이 동그래졌다.

“세크레스 광산?”

“아, 치운다는 게…….”

“이거, 어어…… 오늘 받았네?”

“콰이펄른을 빼앗기고 받은 대가랄까.”

“전하까지 득을 볼 줄 몰랐는데. 굉장하네. 나.”

“그러게.”

그러나 광산을 받은 남자의 표정치고는 어딘지 떨떠름하다. 클로이는 본래 말을 가리는 편이 아니었다. 로이로 지낼 때는 더더욱.

“왜, 무슨 일인데? 생각보다 일도 술술 잘 풀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광산까지 얻었는데 표정이 영 별로야.”

“로이. 세크레스 광산을 모르나?”

이거, 수도에서 유명한 거야? 가뜩이나 ‘수도 출신’이 아닌 게 들킬까 봐 불안하던 클로이는 잽싸게 서류를 넘겨 읽어보았다. 동부에 위치한 황실 직속령이며 핑크 다이아몬드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 지도상 위치는 북부에 가까워 토질이 극악해 채굴할 때 적잖이 애를 먹이기야 할테다. 하지만 그런 게 다 무슨 상관이람, 핑크 다이아몬드 광산인데! 특이점이 없는 서류에 결국 클로이는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그녀가 가진 공녀의 기억으로도 핑크 다이아몬드 광산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있었다.

“이거 너무 치우친 것 같은데? 겨우 자작나무 숲에 핑크 다이아몬드 광산이라니?”

황제가 이런 걸 그냥 내주었다고? 그렇게 좋은 거면 황후에게 주지 않았을까? 합리적인 의문과 함께 클로이가 입을 쩍 벌렸다.

“매장량이 다됐구나!”

“그럴 리가 있나. 이제 겨우 두 점을 캤는데.”

‘두 점’에 몹시 힘을 줘 발음하는 레이얼을 보아하니 문제가 있어도 단단히 있는 광산인 모양이었다.

“암반층에 막혔어?”

“암반층은 무슨. 갱도를 제대로 파보지도 못하고 광산 어귀서 캐낸 것이 두 점인 것을.”

빙빙 돌리는 말에 얄팍한 인내심이 뚝 끊어질 뻔했으나, 클로이는 오늘 기분이 몹시 좋았기에 비교적 점잖은 목소리로 다시 물어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걸 왜 줬을까?”

“광산을 북부의 괴수가 차지하고 있어서지.”

“응?”

“괴수들이 제 굴처럼 쓰고 있어. 아무도 들어갈 수 없으니, 광산을 발견하고 초장기에 캐낸 두 점이 전부인 광산이야.”

“괴수가 거길?”

“그렇다. 덕분에 앞으로도 영영 더는 캐내지 못할-.”

“북부에 의뢰를 넣어! 괴수를 쓸어내면 되잖아.”

너무 당연하다는 듯 해결법을 읊는 모습에 레이얼이 쓰게 웃었다.

“이미 북부에서도 손을 놓았다.”

“북부에서?”

클로이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아르네에서 손을 놓았다면 그녀가 모를 리가 없다. 특히나 클로이는 북부의 영지에서 줄곧 지냈기에 북부와 관련된 일이라면 모르는 게 없는데, 이런 이야기는 처음이다.

“언제?”

이거 또, 어디서 사기당한 거 아니야? 타당한 의심에 클로이는 눈을 가늘게 늘이며 캐물었다.

“광산 발견이 이십 년 되었으니, 아마 그맘때겠지. 발견과 거의 동시에 괴수가 들어앉았다고 들었다.”

레이얼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클로이의 입술이 조그맣게 벌어졌다.

“이십 년 전.”

까마득히 먼 오래전 그때, 기억에도 없는 그 먼 옛날의 일이지만 이십 년 전이라면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그때의 북부는 엉망이었으니까. 제국의 검인 아르네가 휘청였던 시기였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 아르네가 공작부인을 잃은 게 그때쯤이었던가?”

레이얼의 나직한 혼잣말에 클로이는 가슴 한켠이 욱신거리고 선뜩해졌다. 이십 년 전, 그날은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떠올리기 힘들었다. 하지만 갑자기 얼굴을 굳히거나 아련한 표정을 지으면 수상해 보일 것이다. 클로이는 곧 귀택할 아르네 공작을 떠올리며 차오르는 감정을 필사적으로 눌러 삼켰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기뻐하라고 전하!”

“희롱을?”

“이게 무슨 희롱이야.”

“그럼 조롱인가?”

“희롱이든 조롱이든 난 누가 이런 거 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좋으면 네게 주랴?”

“고마워 전하!”

즉답이었다. 클로이는 재빨리 두 손을 내밀었다. 몹시 공손하고도 열의에 찬 표정이었다. 설마, 이럴 줄 몰랐던 걸까? 레이얼의 표정이 얼간이 같이 일그러져 있었다.

“줘.”

“로이.”

“빨리.”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클로이는 웃어 보였다. 재촉과 조름을 한 방에 해결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너무 간절해서 역효과가 난 걸까.

“로이, 핑크 다이아몬드가 아무리 귀하다 한들 목숨보다 소중하진 않다.”

갑자기 레이얼이 광산증서를 돌돌 말아 제품에 쏙 넣어버리는 게 아닌가.

“뭐, 뭐, 뭐 하는 짓이야 그거?”

이십년 전이야 아르네가 정신을 놓았으니 그런거고, 지금이야 그깟 괴수 무리야 로지와 에반만 데리고 가도 충분하다. 귀하디귀한 핑크 다이아몬드를 광산째 거머쥘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건만 지금 놀려? 클로이는 뿌득 이가 갈리며, 오기가 솟았다. 반드시 가져간다. 광산!

“로이, 아무래도 세크레스를 주는 건 없던-.”

“아니, 사람이 왜 그래!”

“너라면 이 위험한 것을 줄 수 있겠느냐!”

“한번 준다면 줘! 왜 한 입으로 두말을 해!”

“아무리 그래도, 목숨만큼 귀중한 건 없어. 로이.”

“누가 죽으러 간대? 내놔!”

“안 돼! 위험한 곳이라고!”

빌어먹을 시오도르! 씩씩거리던 클로이가 별안간 몸을 내던지듯 그에게 달려들었다. 놀란 레이얼이 뒤로 한걸음 물렀으나, 작정한 클로이를 피하긴 무리였다. 방어하듯 팔을 뻗었지만 클로이는 몸을 비틀어 가볍게 그의 저지를 피하곤 품으로 파고들었다. 탁. 한 팔로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아 도망가지 못하게 붙들고, 스윽. 다른 팔은 그의 품속을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로이!”

가슴팍을 더듬는 손길에 레이얼이 정말로 ‘희롱’이라도 당한 듯 얼굴이 해쓱하게 질려 그녀를 부르짖었다. 황급히 클로이의 손을 거머쥔 건 좋았으나, 몸싸움하다 그만 중심을 잃어버렸다.

“어!”

누구 입에서 터졌는지 모를 외마디 소리와 함께 쿵,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전하?”

클로이는 눈을 꾹 감은 레이얼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눈을 감은 레이얼은 미동도 없었다.

“전하?”

톡톡. 살그머니 뺨도 두드렸지만, 여전히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오…… 나 좀 큰일 난 것 같은데. 클로이는 살짝 진땀이 났다. 서로 부둥켜안고 쓰러지던 순간 레이얼이 몸을 크게 비틀어 클로이를 받쳐주었다. 그 덕에 클로이는 레이얼의 위로 넘어져 다친 곳이 없었다. 그를 깔고 올라탄 모습이 살짝 민망하긴 했지만 정말 괜찮았다. 그런데, 바닥에 쓰러진 레이얼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전하?”

탁탁탁. 조금 전보다 확실히 힘을 올려 두드려도 레이얼은 반응이 없다.

“아아…… 이거 어쩌지.”

클로이는 재빨리 고개를 내려 레이얼의 가슴에 귀를 붙였다. 쿵쿵쿵. 다행히 심박이 규칙적이고 힘차다. 고개를 들어 그의 코 끝에 귀를 기울이자 조용한 날숨이 잡힌다. 당장 죽진 않겠다 싶어지자 살짝 안심이 되며 조금 차분해졌다. 클로이는 넘어지던 당시 쿵, 하고 울리던 소리를 떠올렸다. 머리를 심하게 부딪쳤나? 황급히 그의 머리칼 속으로 손을 넣어 샅샅이 쓸어 확인했지만 찢어진 곳도 유난하게 부은 곳도 없다. 그런데 어째서 눈을 못 뜨는…….

“전하?”

어째 기분이 이상하다 해서 황급히 고개를 떨군 클로이는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레이얼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좀 괜찮-.”

클로이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너!”

경악하는 레이얼의 모습에 클로이는 그제야 자신의 자세가 어떤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쓰러진 남자 위에 올라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이런 모습은 그 어떤 말을 해도 희롱이다!

“나, 더듬던 거 아니야! 절대 아니야.”

“뭐?”

“아니, 어, 저기, 머리를 좀 더듬었, 아니아니 머리가 아니라 두피두피! 이상하게 듣지 마, 눈을 안 떠서. 아니 근데 왜 눈을…….”

잔뜩 당황해 횡설수설하는 클로이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아, 알지? 난 그냥 광산증서에만 관심 있어. 알지?”

“……알겠으니까 이만 내려와 주렴.”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라도 하듯 고개를 모로 꺾어 속삭이는 레이얼의 모습은 잔뜩 희롱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 절대, 이해한 모습이 아니었다.

“잠깐만 전하,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내가 머리를 더듬은 건 말이야…….”

이렇게 마무리되면 안 된다. 클로이는 필사적이었다. 이거 자칫하면 정신없는 남자를 더듬은 호색한으로 길이길이 남을 판이었다. 물론, 레이얼같이 굉장한 미인의 모습에 가끔 혹하기도 했고, 종종 두근거리기도 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결코 그를 허락도 없이 마구 더듬거나 할만큼은 아니었다.

“로이.”

“전하, 나 믿어? 나 믿지?”

“제발…….”

제발이라니! 클로이는 레이얼의 애원에 펄쩍 뛸 만큼 당황했다.

“내가 전하를 어? 그럴 리가 없잖아! 뭐하러.”

어차피 결혼할 사이인데 이렇게 엉큼하게 굴 이유가 없다고. 그때였다. 내내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돌리고 있던 레이얼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 클로이를 마주했다.

“뭐하러?”

나직이 되묻는 레이얼의 말을 조금 주의 깊게 생각했으면 어땠을까. 그러나 클로이는 잔뜩 당황한 상태였고, 내내 답이 없던 그가 대답해주는 게 기뻐 그만 저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 내가 뭐하러.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니까.”

자신의 말이 로이를 안달 내는 레이얼에게 어떻게 들릴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안심해 전하. 난 결백해.”

“오직 광산증서만 관심 있었다?”

“그렇…… 엇!”

말 끝에 시야가 크게 도는가 싶더니 자세가 반전되었다.

“어어…….”

이번엔 클로이가 바닥에 깔리고 레이얼이 올라탔다. 기시감이 들다 못해 익숙한 자세였다.

“저기, 왜 갑자기 그래?”

전하 눈이 맛이 간 거 같은데?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꿀떡 삼킨 클로이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으나 돌아오는 건 비틀린 미소였다.

“로이, 한 번씩 굉장히 사람을 자극하는 건 알고 있어?”

“글쎄 오해라니까. 나는…….”

“써먹지도 못하는 쓰레기 같은 광산증서가, 지금 나보다 중요하다고 한 거야? 이 엘피디오의 황태자인 나보다?”

곧, 이 제국의 주인이 될 나보다 말이야?

“진정해 전하, 꼭 나한테 집착하는 거 같이 보이잖아.”

“맞아!”

레이얼의 말에 클로이가 턱을 툭 떨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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