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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 사랑스러운 부하씨 (24/121)

024. 사랑스러운 부하씨2020.11.24.

첫 햇살이 터지는 이른 새벽. 찬 공기를 가르고 아르네 공작저로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새는 이곳이 익숙한 듯 헤매는 법 없이 곧게 날아 열린 창 안으로 쑥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타운하우스 공녀의 침실에서 괴성이 울렸다.

“아버지가 내일 출발하신대!”

“그래요 엄청 좋으시겠어요. 저 그런데 아가씨?”

“응? 왜?”

“공작님이 곧 오신다니 드리는 말입니다만 연회 준비를 끝까지 숨길 순 없어요. 자재와 그릇과 장식은 있는 것을 사용하면 되는데 요리는 몰래 할 수가 없잖아요.”

“그렇지. 내가 갑자기 백 인분을 먹지 않는 이상은 말이야.”

클로이는 로지의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연회를 몰래 준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제 그럴싸한 명분이 필요할 때였다.

“그럼, 공녀님 완쾌연회를 열자.”

“……죽다 살아난 것도 아닌데…….”

“말이야 하기 나름이지. 아빠랑 오빠도 없이 홀로 병을 떨치고 일어난 공녀님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서 로지가 몰래 준비하는 거로 하면 어때?”

“본인 입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 혹시 부끄럽진 않으시고요?”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시군요.”

“공녀님을 모시고 막, 연회를 열려는 순간! 공작님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도착하는 거지.”

“굉장한 우연이네요. 황실에서 속아줄까요?”

“공녀님이 아팠던 걸 황실에서 모르고 있으리라고 생각해?”

로지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럴 리가. 클로이가 앓아누운 동안 정말 사방에서 지긋지긋하게 달려들었다. 열이 끓어 의사가 몇 번을 들락거리고 온 공작저가 난리였다.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있나. 식재료에 어찌나 집요하게 장난질을 치는지. 클로이가 앓는 동안 내다 버린 식자재가 통상 한 달 치 분량이었으니, 그들이 얼마나 부지런했는진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고열에 시달리던 가여운 공녀가 결국 죽었다는 건, 누가 봐도 그럴법한 이야기였다. 클로이는 ‘아르네’라 죽일 기회를 노리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일반 레이디와는 달리 검술과 체술에도 능하고 온갖 무기류에 익숙할뿐더러 체력과 반사신경도 훌륭했다. 그런 클로이가 황태자의 다른 피앙세처럼 계단에서 미끄러지거나, 테라스에서 추락하거나 혹은 호수에 빠져 죽는 일 같은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는 듯 그들은 필사적이었다. 식수와 식자재, 향신료를 거처 마지막엔 약까지 손을 댔었다. 덕분에 로지는 매번, 시약으로 검사를 해야 했기에 식자재를 건네받을 때마다 주방에 합류해야했다. 타운하우스 인력이 부족한 건 아주 훌륭한 변명거리가 되었다. 생각하니 참 성가시고도 악독한 놈인데 황궁에 쫓아갈 수 없으니 영 아쉽던 참이었다.

“응? 내가 아픈 걸 몰랐을까?”

“그럴 리가요. 누구보다 몹시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내가 완쾌했으니 누군가가 몹시 기분이 나쁘겠는데?”

“좋진 않겠죠.”

문득 로지의 눈빛이 번뜩였다.

“성심성의껏 준비하겠습니다.”

“왜 갑자기 의욕만발이지?”

“그간 보여준 성의에 화답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에 기쁩니다.”

“그래. 그럼 열의와 성의를 다해 준비해줘.”

“아주 입이 떡 벌어지게 해볼게요. 혹시 올해 예비비를 탕진해도 괜찮을까요?”

“마음껏 써.”

클로이는 로지가 내미는 예산안에 경쾌한 손놀림으로 사인을 해주었다. 사삭-. 잉크를 흠뻑 먹은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아주 호쾌했다.

  왁자해진 아르네 공작가의 타운하우스와는 달리, 황후궁은 무섭도록 적막했다.

“콰이펄른?”

“예, 폐하. 호수를 둘러싼 자작나무 숲이 여간 근사한 게 아니랍니다.”

“그런데 레이얼이 거기를 매입하려 한다고?”

황제가 고민에 빠진 듯 턱을 슬슬 쓸자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시종장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토지 용도에 별장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폐하. 레이얼 전하께서 별장에 머무실 만큼 한가로운 분이 아닌데, 그 별장을 왜 짓는 걸까요?”

“……자작나무 숲과 호수. 그리고 별장이라. 보지 않아도 근사한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시종장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황후의 목소리가 울렸다.

“근사하게 느껴지십니까? 황후.”

“자작나무숲은 겨울이면 한층 더 풍취가 살아나지요. 거기에 호수까지 있으니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필시 피앙세를 위해 매입하려는 게지요.”

황제의 질문에 캐서린은 설핏 눈꼬리를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가 꿈을 꾸는 듯 몽롱하게 풀려 평소보다 한층 더 고혹적이었다.

“이런 이런. 황후께서 그런 표정을 지어 보이실 줄이야.”

황제는 생각지도 못한 황후의 반응에 한껏 고무되어버렸다. 그는 시종장을 손짓으로 불렀다.

“가서, 레이얼이 제출한 서류를 거둬들이거라.”

“예?”

“폐하?”

황제의 한마디에 시종장과 캐서린 양쪽에서 경악이 터졌다. 그러나 황제는 그들의 반응에 놀라긴커녕 한층 더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서, 서류 가져오거라. 내가 다시 봐야겠어. 아직 처리 전일 테니 가서 들고 오면 되겠구나.”

말을 끝낸 황제는 답은 필요치 않다는 듯 턱짓으로 시종장을 물렸다. 시종장은 황제의 말에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달렸다. 살집이 있는 이가 허둥지둥 서두르는 모습은 꼴불견이었으나, 남겨진 황후와 황제의 머릿속엔 그의 추한 꼴이 남아 있지 않았다.

“폐하 설마…….”

“왜 아니겠어요.”

“하지만 폐하, 그건 레이얼이 피앙세를 위해 준비하려던 건데…….”

“레이얼에겐 다른 영지를 내주어도 될 일이지. 어차피 아르네는 아직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차근하게 이어지는 비열한 소리에 캐서린의 얼굴로 옅게 홍조가 스미기 시작했다.

“그래도 미안해서요.”

“미안하다니요. 이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여성에게 가장 좋은 풍광을 내리는 것이 문제입니까?”

은근한 황제의 말에 배어 있는 것은 고고한 자존심. 늘 최고이고 싶은 황제의 열망이 말투에 알알이 배어 있었다. 캐서린은 그런 황제의 말에 볼을 붉히며 눈을 내리깔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거로 충분했다. 황제는 희미하게 짓는 황후의 미소가 몹시 만족스러웠고, 딱히 그녀가 거절하지 않은 건 에두른 승낙이었다.

“서류가 오기 전까지, 어디쯤에 있는지 지도를 보실까요?”

황제가 손목을 감아쥐고 슬쩍 끌어당기자 캐서린이 답싹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남서쪽으로 산맥을 끼고 있는 자리라 겨울이 길고 여름이 시원할 테니, 별장을 지어놓으면 계절을 보내기에 딱 맞겠어요.”

“호수 쪽으로 큰 창을 내주세요. 발코니도 널찍하게 빼주시고요.”

수줍게 속삭이는 황후의 바람에 황제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원하시는 대로. 또 어떻게 해드릴까요?”

“폐하.”

“예.”

“조금 설렜어요.”

“예쁘기도 하시지.”

황후의 궁을 짙게 물들였던 무겁던 분위기는 진작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시종장이 서류를 들고 왔을 때, 황후는 볼이 한껏 달아올라 있었고 황제 역시 살짝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폐하. 여기 서류를 받아왔습니다.”

“좋아. 그럼 이번엔 레이얼을 불러오게.”

“예 폐하.”

“아 참, 올 때 동쪽 세크레스 지역의 광산 소유권을 좀 챙겨오게.”

“세크레스……. 아, 예. 그리하겠습니다.”

시종장은 세크레스라는 소리에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아 고개를 최선을 다해 깊게 숙였다. 세크레스, 그곳은 북부의 경계와 맞닿은 곳이었으며, 동부에 속해 있으나 실상은 북부만큼이나 척박한 곳이었다. 황제가 말한 광산은 핑크 다이아몬드가 나오는 엄청나게 귀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북부의 괴수들이 둥지를 튼 지 오래라 채굴할 수 없다. 북부의 기사들도 그곳만큼은 손을 놓지 않았던가. 차라리 구리 광산이라도 주었더라면 웃기진 않았을 텐데. 귀한 핑크 다이아몬드가 매장되어 있으나 절대로 파내지 못할 광산을 주려는 것이 꼭, 황제자리에 목을 매는 황태자의 처지를 조롱하는 듯해서 자꾸만 얼굴이 푸들거렸다. 하지만 웃음과 별개로 황제의 명은 지엄했기에 시종장은 몹시 날래게 움직였고, 삼십 분만에 시종장은 광산 서류와 함께 황태자를 황제 앞에 데려다 놓는 데 성공했다.

“왔느냐?”

“부르셨습니까.”

긴장이라도 한 듯 황태자의 얼굴은 희미하게 굳어 자꾸 입꼬리에 경련이 일었다. 좀 더 보면 좋을 텐데, 그럴 수 없어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탁. 문이 닫히는 사이로 한 무릎을 꿇은 황태자와 그를 내려다보는 황제. 그리고 그 옆에서 달콤하게 미소짓는 황후의 모습이 눈에 박혔다. 언제나 같은 모습이었다. 지겹게도. 황태자는 정확히 한 시간 만에 나왔다. 그의 얼굴은 옅은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으며, 표정이 수시로 무너졌다. 웃는 듯 우는 것 같은 표정이 지금 그의 심정이 어떤지 훤히 보여, 시종장은 또 한 번 숨을 골랐다.

“이제 돌아가십니까?”

“그, 가보겠네.”

파르르 떨리는 입매를 가리고 돌아서는 황태자의 손에는 ‘세크레스’ 광산 서류가 들려 있었다. 즈웰린은 확신했다. 곧 황태자는 바뀌고 말리라. 황태자는 수족을 차근히 잘리고 있었는데도 돈줄이 막혀, 두 눈 뻔히 뜨고 놓치는 중이다. 제국의 모든 돈이 거쳐 간다는 이베트가를 외가로 두고 있으나 이베트가는 황태자를 돕기는커녕 길롯에 떠밀려 제 앞가름 하기도 벅차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돈’이 없어 세력 포섭을 못하는 황태자를 두고만 보지 않을 테니 말이다. 불과 십 년 전만 해도 그 누가 이런 상황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즈웰린은 문득 고개를 돌려, 황후궁을 바라보았다. 캐서린 길롯. 정말 무서운 사람이 아닌가, 사랑스러운 미소로 황실을 이렇게 헤집어 놓다니. 곧 이 제국은 길롯의 수중에 떨어지리라. 멀어져가는 레이얼을 바라보던 즈웰린은 문득 아차 싶었다. 별 잡스러운 생각에 빠져 두 분 폐하의 식사 준비를 지시하는 것을 깜빡했다.

“아이고, 늦었다!”

다급하게 뛰는 그의 발걸음이 몹시 둔탁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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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쿵쿵쿵. 방정맞은 발걸음이 이내 멀어진다. 웃는 듯 우는 듯 하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레이얼의 얼굴 위로 확연한 미소가 서린 건 바로 그때였다.

“아아. 로이 로이.”

이 귀여운 녀석아. 사랑스러운 부하씨. 모든 건 그의 ‘로이’가 말한 대로였다. 황제가 그를 불러다 놓고 ‘미끼’를 빼앗아갈 때 웃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썼던가. 황제의 뒤에서 눈을 내리깔고 있던 캐서린 황후의 얼굴에 만연하던 승리감을 발견했을 때, 정말이지 환호하고 싶었던 건 바로 그였다.

“로이, 로이.”

내 귀염둥이. 오랜만에 맛보는 통쾌함은 생각보다 훨씬 달고 짜릿했다. 레이얼은 연신 주먹을 쥐었다 피며 저린 손을 달랬다. 차오르는 흥분을 누르기 어렵다. 문득, 레이얼은 고개를 들어 황궁 담너머 먼 곳을 바라보았다.

“로이.”

이 순간을 함께 나눌 수 없다니. 착실하게 쌓인 불만이 자꾸만 집요해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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