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 그 여자의 집착2020.11.20.
“황가의 보물이라고? 괘씸하나 레이디 그 녀석 안목은 제법 쓸만하다 싶습니다.”
말끝에 손을 들어 황제는 캐서린의 뾰족한 턱선을 쓸었다. 설탕을 굳혀 빚은 것 같은 달콤하게 생긴 미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화내지 마세요. 폐하. 전 오히려 폐하와 이렇게 있을 수 있게 되어 조금, 잘됐다 싶은걸요.”
황제를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가 무척 부드럽게 빛을 내는가 싶더니 사르르 녹을 것 같은 미소가 얼굴 전체로 번진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장관이다. 황제, 패트릭은 제 손에 얼굴을 붙여오는 황후를 보며 굳힌 얼굴을 풀었다. 안목이야 쓸만하다지만, 그것 욕심이 주제를 모르고 뻗어 나가니 이제 슬슬 끝장을 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앙트레가 울었다고? 그깟 목걸이에 펑펑 울었다는 소리에, 살집이 잔뜩 오른 엉덩이를 걷어차 쫓아버리고 싶었지만 ‘캐서린 황후’를 레이디가 데려간다면 그도 눈물이 날 것 같다. 가슴이 미어지겠지. 피눈물이 뚝뚝 흐르고, 지고한 자의 아성에 흠을 낸 그 녀석을 잡아다 진정한 지옥을 맛보여주고 싶어 손이 근질거리겠지. 황제는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잔혹한 생각 수십만 가지를 무심한 얼굴 아래로 흘렸다.
“어차피, 곧 레이디인지 하는 것도 잡힐 테니 저와 함께 즐거운 한때를 즐겨주세요.”
손바닥에 착 감기는 보드라운 피부. 그러나, 말과 달리 캐서린의 얼굴 한구석엔 희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갑갑하세요?”
“아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며 부인하지만, 황제는 아주 잠깐 황후가 머뭇거린 것을 놓치지 않았다. 우연히, 레이디와 마주친 내쉬 덕에 일이 생기기 전 알게 되어 철통보호를 하는 참이었다. 그것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아, 황제는 아예 두문불출하며 캐서린의 곁을 지키기까지 했는데 그녀의 행동반경은 겨우 침실과 응접실이 전부였다. 예고장인지 하는 것은 날아오지 않았으나, 황제는 자신의 황후를 누군가가 주시했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창에는 두껍게 커튼을 내리고, 창문과 문 앞에는 기사를 촘촘하게 배치해두었다. 완벽한 방어였다. 그러나 안전을 보장받는 대신, 캐서린 황후는 이 호화로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황제는 그 사실을 떠올리자 못 견디게 짜증이 치밀었다. 감히. 이 어여쁜 것을 가두게 하다니! 한때 총기로 빛났던 녹안이 음험하게 빛났다.
‘폐하께서 굳이 직접 나서야 할 필요는 없으시지요.’
‘형님은 유능하고 충직한 사람이지요.’
그 순간, 내쉬가 속살거린 말이 떠오른 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캐서린의 곁을 지켜야 하는 지금 그의 말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건 어쩌면 레이얼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황제의 자리에 목을 매는 가여운 아들. 제 눈에 들기 위해서라면 그 누구보다 잔혹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레이디를 끝장내리라. 황제는 지금 그를 대신해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레이얼을 떠올리다 작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착한 내쉬에게 상을 내리는 것을 깜빡했군요. 그대의 위험을 알린 공이 큰데 말입니다.”
머저리같이 빌빌거리던 녀석이 어쩐 일로 꽤 쓸만한 소리를 하지 않았나.
“상이라고요?”
갇혀 시들어가는 와중에도 사랑이 넘치는 어여쁜 분. 제 아들을 챙기는 소리에 얼굴에 미미한 홍조가 끼친다. 딴에는 참는다고 참았겠지만, 저런 모습이 얼마나 그를 자극하는지 여태 모르나. 패트릭 시오도르는 황후의 말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주었다.
“기특하니, 상을 주어야겠습니다.”
“다정도 하셔라.”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사탕같이 달콤한 목소리에 패트릭 시오도르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것을 내주게 되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시종장을 불러라. 데비 광산 소유권 증명서를 챙겨서 오라고 해.”
“아, 이런 이게 누구신가 키릭슨 아닌가? 토지등록원엔 무슨 일이지?”
“안녕하십니까. 즈웰린님.”
황제의 심부름으로 토지등록원에 들른 시종장은 의외의 인물에 알은체하며 다가섰다. 키릭슨이라니. 레이얼 황태자의 하나뿐인 보좌관 아닌가. 레이얼 황태자가 토지등록원에 보좌관을 보낼 일이 뭐가 있지? 시종장은 저도 모르게 키릭슨이 들고 있는 서류로 시선이 향했다. 힐끔. 키릭슨은 토지거래 요청서 말고도, 들고 있는 것이 많아 살짝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쥐고 있는 요청서는 다소 허술하게 늘어져 있었다.
“이크. 떨어뜨리겠어!”
겨드랑에 끼워두었던 서류 한 뭉치가 스르륵 흘러내리는 모습에 시종장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잡, 았습니다!”
양팔을 몸통에 꽉 붙이며 가까스로 서류는 붙들었으나, 키릭슨의 자세는 몹시 어정쩡해졌다. 움직일 수도, 팔을 풀 수도 없는 상황. 시종장은 혀를 차며 사람 좋은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에 든 걸 날 주고, 서류를 챙겨.”
“아, 그럼 부탁 드리겠습니다.”
키릭슨은 오가며 안면이 있는 그의 도움을 뿌리치지 않았다. 민망했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입술이 푸들거리고 떨렸지만, 손에 든 서류를 건네는 데는 주저함이 없었다.
“봉투에 담지 않고선?”
서류를 받아드는 찰나, 시종장은 레이얼 황태자가 매입을 희망하는 지역을 잽싸게 확인했다.
‘콰이펄른’
‘용도신청, 별장’
별장? 시종장의 얼굴로 의아함이 스쳤으나, 그건 눈 깜짝할 사이 말끔하게 지워졌다.
“다했나?”
그는 키릭슨을 보며 재촉하듯 서류를 다시 내밀었다.
“아, 감사합니다.”
“서류를 낼 생각이면, 딜런에게 가라고. 일 처리가 빨라.”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보세.”
시종장은 키릭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곤 몸을 돌렸다. 토지 소유권 이전 명령서는 제출했으니 그가 돌아갈 곳은 뻔했다. 그러나, 그의 걸음이 이토록 빠른 것은 제 주인에게 전할 소식이 있어서였다. 탁탁탁. 종종걸음이 토지등록원을 나설 즈음엔 거의 달리는 수준이었다. 투실투실한 그가 바삐 움직이자 뒤뚱거리는 모양새였다. 어느덧 사람들은 모두 그 모습에 작게 키득거렸다. 키릭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 * * 그리고 키릭슨의 이야기에, 레이얼 역시 웃음을 터트렸다.
“저런, 넘어지진 않았고?”
시종장의 안부를 챙기는 목소리가 퍽, 다정했다. * * * 그 밤. 달이 뜨자마자 레이얼의 침실로 손님이 찾아왔다. 로이였다.
“어서 와라.”
방 안으로 들어서는 로이를 따라 찬기가 궤적처럼 늘어졌다. 계절은 무르익은 가을 지나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무서운 소리를 내며 한 번씩 몰아치는 바람은 생각 없이 들이켰다간 폐부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성큼 들어서는 로이는 오늘도 여지없이 한 겹 차림이었다.
“로이 바람이 차니 옷을 더 입는 게 좋겠다.”
“에이. 이 정도로. 난 사십…… 한참을 달려와서 그런지 시원하고 좋던걸.”
“그래도 땀이 식으면 추울 텐데?”
“식을 새가 어디 있어. 우리 대장은 정말 악독해서 날 밤새도록 뛰게 만드는데.”
레이얼은 로이의 말을 한 박자 늦게 이해했다.
“우리 대장, 악독해?”
설마하니 저런 말을 면전에 대고 할 줄이야. 살다 살다 정말, 이런 류의 인간은 처음이다.
“뭘 또 정색이야.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로이는 얼굴을 굳힌 레이얼을 나무라듯 혀를 쯧, 차고선 이제는 익숙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뭘 하면 돼?”
“뭘 하긴. 달리 갈 데는 없으니 이거나 봐둬.”
레이얼은 준비해두었던 서류를 로이에게 건네곤 맞은 편으로 넘어갔다. 서류를 넘기는 소리와 함께, 로이에게서 다 죽어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하!”
“읽어두렴, 외우면 더 좋고.”
“이거 뭐야. 이게 설마 그 잠깐사이 또 늘어난 귀족이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야? 자금줄이 막히자 길롯에서 더욱 공격적으로 영입한 것을.”
돈독이 올랐나 왜 이래 정말. 예전에 거둬들인 돈은 다 어디에 썼어? 로이는 그의 말에 들리게 투덜거리며, 서류를 확확 넘겼다.
“난 몰랐는데 이 제국엔 돈을 잘 버는 사람이 참 많아. 운이 좋아서 갑자기 돈방석에 앉은 사람도 많고 말이야.”
“그러게. 나도 처음 알았지.”
“하루 한 집씩 털어선 부족한 거 아니야?.”
반쯤 장난하듯 로이는 어느샌가 싱글거리고 있었다. 어제보다야 덜하지만, 로이는 확실히 바뀌었다. 그의 앞에서 늘 웃고 있긴 했으나 로이의 웃음은 언제나 가벼운 것이었다. 조롱과 비웃음 그 중간의 어디쯤에 위치한 너무도 가벼운 것 말이다. 그런 웃음에 어제부터 감정이 실렸다. 즐거움에 겨운 웃음은 훨씬 달고 예뻤다. 대체, 낮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레이얼은 이제 레이디에 집착하는 제 모습을 봐도 아무렇지 않았다. 골치 아프게 고민해봐야, 아무것도 바뀌는 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제대로 로이에게 집착해볼 생각이었다. 이 집착이 미지의 것에 대한 호기심인지, 아니면 로이라는 인간에 대한 호감인지. 그도 아니면 처음 가져보는 ‘친구’ 혹은 ‘동료’ 같은 것에 대한 동경인지. 그 감정쯤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제대로 ‘로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되면 감정 역시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을 테니까.
“참, 별장 건은 아직이야?”
성의 없는 손길로 종이를 넘기며 로이가 물었다.
“부관을 시켜 우회적이고 은근하게 처리했지.”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설명 부탁해도 될까?”
“어떻게?”
“직접적이고 노골적이며, 솔직하고 거리낌 없이 말이야.”
“부관을 시켜 황제궁의 시종장에게 ‘토지거래 요청서’를 은근히 보이게 해두었다.”
“오오…… 그야말로 우회적이고 은근하네. 이런 걸 귀족적이라고 표현하지?”
꽤나 큰 비밀을 속삭이듯 은근한 목소리를 내는 로이의 모습에 레이얼은 짧게 웃었다. ‘귀족적’이라니. 조롱과 오만의 중간에 있는 단어가 아닌가. 겁도 없이 위험한 말을 제 앞에서 쓰는데도 나무라긴커녕 웃어버린 건 그녀가 ‘우회적이고 은근한’ 사람이 아니어서일 테다.
“그런데 전하, 부하가 나만 있는 줄 알았더니, 부관도 있었구나?”
“그게 무슨 특별한 일이라고.”
“내가 전하 사정을 몰라? 고립되어서 믿고 일 맡길 사람이 나만 있는 줄 알았단 말이야.”
바로, 이렇게 말이다. 고립이 아니라 매몰되어가던 레이얼은 노골적이다 못해 뼈아픈 지적에 잠깐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고얀 놈. 이제는 입에 밴 나직한 소리를 삼킨 레이얼이 턱을 괴더니 능글맞게 속삭였다.
“왜, 질투라도 나는 것이냐?”
작정하고 던진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겨우 한마디에 로이가 당황해 버벅거렸다.
“지, 지, 질투라니! 어차피 이렇게 유능한 부하는 내가 유일한데. 질투도 원래 비슷해야 생기는 법이라고.”
“키릭슨도 유능하지.”
“이럴 수가! 삼각관계를 바란단 말이야?”
“뭐?”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에 레이얼이 되물었으나, 로이는 대답 대신 한없이 비장한 표정으로 한 무릎을 꿇었다.
“전력을 다해 독점해보겠습니다. 전하.”
마주친 새파란 눈동자에 장난기가 한껏 물려있다.
“전, 절대 제 것을 남과 나누지 않거든요.”
레이얼은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장난임을 뻔히 아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