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 이상하게 술렁이는2020.11.17.
레이얼은 심각했다. 이 울렁거리는 감각이 대체 뭘까. 로이가 웃을 때마다 그는 가슴 속 어딘가가 슬쩍 내려앉으며 간지럽기도 하고 울렁였다. 이건 어머니를 보내드리던 날의 상실감을 닮았으나 조금 달랐다. 그날은 가슴이 끝없이 내려앉아 결국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면, 지금은 가벼운 추락감에 손끝이 짜릿하다.
“전하. 어제 말한 건 생각해봤어?”
“응?”
그를 상념에서 일깨운 건 로이의 낭랑한 목소리였다. 놀러왔다는 말과 달리, 로이는 평소보다 더 열심이었다.
“호수가의 별장 말이야. 소문냈냐고.”
“아, 아직이다. 황제께서 지금 기분이 별로거든. 역효과가 날 것 같아서 말이다.”
“왜 기분이 별로야?”
“흠…….”
고민하듯 턱을 쓸던 것도 잠시, 레이얼은 한층 나직해진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불측한 소리가 있었다는군?”
“무슨?”
“황실의 보물인 황후를 누가 탐을 낸다고 말이야.”
“누가?”
“……네가.”
“누가 그래?”
“내쉬가.”
“그런데 이렇게 조용하다고?”
쓸데없이 입이 가벼운 게 아니라 한시름 덜긴 했지만, 이런 반응은 좀 이상한 걸. 클로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레이얼의 말에는 그녀도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체면의 문제니 조용히 덮어야지. 다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레이디’의 맹랑함에 대해 분노하는 게 아니라, 황후를 노릴 정도로 황실의 위엄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테니 말이야.”
“아하…….”
위엄 같은 것도 없으면서. 클로이는 꼴같잖은 허세에 콧방귀를 꼈다.
“대체 언제 그런 일을 벌인 거야?”
“내쉬 황자가 이야기했다면서?”
“레이디가 황후를 탐낸다는 이야기만 했지 다른 건 말이 없었다.”
“선택적 함구증이야 뭐야. 사람 귀찮게.”
툴툴거리는 듯했지만 클로이는 좀 뜨끔했다. 내쉬 황자와 마주친 상황을 설명하자면 반드시, 제 발목이 말끔하지 않다는 것을 들키고 만다. 그렇다고 그 부분을 빼놓기엔 허점이 생기고 만다.
“머리 굴리지 말고 솔직히 말해봐 로이.”
“……보여?”
“반밖에 안 보이는 얼굴이 얼마나 솔직한지.”
도발이라면 굉장했고, 사실이라면 암담하다. 클로이는 어깨가 들썩이도록 한숨을 쉬곤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야. 어제 돌아가는 길에…….”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 발목을 해선 또 찾아온 거냐고 한마디를 할 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레이얼은 잔소리를 하는 대신 턱을 쓸었다.
“상큼한 향이라고?”
“응. 향 때문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고 하던 걸.”
“아……. 역시 어제 차 때문인가?”
“뭐, 블랙잉그리드? 그건 그렇게 향이 강하지 않은데?”
“잊었나? 블랙잉그리드 급의 차라면 강하진 않지만 지속력이 꽤 좋은 편이지.”
“아차.”
어제 꼬맹이 녀석이 향 타령을 하기에, 요즘 시오도르들 사이에서 개코 흉내가 유행인가 하고 웃어넘겼는데 그런 거였구나. 클로이는 좀 슬퍼졌다. 향이 지속된다니 앞으로는 블랙잉그리드를 마시기 어려울 것 같아 여간 서운한 게 아니다.
“아쉽나?”
“아쉽지.”
“안 그래도 즐기는 것 같아서 오늘도 준비해두었는데. 아깝게 되었군.”
“진짜 속상한데.”
이야기가 슬그머니 새고 있었으나 둘 다 그 사실을 모르는 듯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전하, 오늘만?”
“안 돼.”
“그럼 주변에 좀 나눠주면 어때? 그럼 내가 특정되지 않을 거 아니야.”
“이 귀한 블랙잉그리드를 나눠준다고.? 의심 사기 딱 좋겠는걸.”
대놓고 바보를 바라보듯 하는 눈빛도 잠깐, 레이얼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로이. 너답지 않게 이런 간단한 것도 생각을 못 하다니. 대체 무슨 일이야 오늘? 붕 떠서 도통 제정신이 아닌데.”
“어? 나?”
“그래. 왜 이렇게 흥분했어? 무슨 좋은 일이길래.”
“좋은 일은 무슨.”
아닌 척 콧방귀를 뀌어보지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생생하다.
“……못 본 척 해줘. 진정이 안 돼서 그래.”
“내가 못 본 척 해서 끝날 것 같지 않으니 그렇지. 이러다가 돌아가는 길에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하지. 로이?”
“걱정 마. 난 유능한 부하잖아.”
“줄줄줄 다 흘리고 다니는 건 알아?”
“조심한대두! 오늘은 놀러 온 거니까, 잔소리도 그만해. 다시 호수 이야기로 돌아가자고.”
저 멍청이. 레이얼은 이번에야말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어찌나 들떠 있는지, 제 입으로 놀러 왔다면서도 번번이 일하지 못해 안달이라는 걸 정말 모르나?
“전하 지금이 기회야. 슬그머니, 이야기를 흘려. 바보같이 ‘진상합니다’ 하지 말고 전하가 탐이 난다는 식으로 말이야. 일곱 번째 피앙세를 위해 짓고 싶다고.”
“피앙세를 위해서?”
갑자기 자신의 피앙세가 나올 줄 몰랐기에 레이얼의 표정이 일순 흐트러졌다.
“저주받은 황태자와 기꺼이 약혼해준 고마운 분 아니야? 그분께 선물을 드리겠다면 핑계가 아주 좋네.”
“난, 한 번도 그런 걸 해보지 않았다.”
“이번에 해봐. 실제로 주라는 것도 아닌데 너무 정색하는 거 아니야?”
“관심을 두면 ‘그분’이 더 위험해질 거라는 생각은 못 해봤나?”
장난기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얼굴은, 어쩐지 화가 난 것 같이 보였다. 클로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모습에 찔끔해서가 아니었다. 아르네 공녀를 생각하는 말이 너무 다정해, 일순 말문이 막혔던 탓이었다. 이런 식은 좀 반칙 아닌가. 마음속으로 빌어먹을 시오도르를 아무리 되뇌어도 소용이 없었다. 이미 아버지의 귀환에 한껏 말랑하게 풀어진 마음이 아니었던가. 거기에 자신을 아끼는 ‘피앙세’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자꾸만 볼이 따끈하게 달아오른다.
“뭐 어때.”
질끈. 입안의 볼살을 힘껏 씹으며 클로이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구걸한다고 해. 이러다 정말, 혼자가 될 것 같아 구걸한다고.”
“……진심인가?”
“숨기건 드러내놓건 어차피 공녀는 위험한 거 아니었나? 쉬쉬해서 지킬 수 있었나? 오히려 대놓고 싸고돌면, 혹시 알아? 눈치 보여서 덜 할지.”
“그럴 리 없지.”
“아르네 공녀라면서? 아르네는 호락호락하지 않을 테니까 너무 공녀를 얕잡아보진 말고.”
“……내가 그런 걸 말한 적이 있던가?”
“내가, 누구인지 잊었어, 전하?”
일순 눈을 빛내며 되묻는 레이얼은 낯설었고, 또한 위협적이었다. 클로이는 살기 흉흉한 그의 눈빛을 보며 태연히 되물었으나 가슴이 조금 빠르게 뛰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하긴. 귀족가를 빙빙 돌아다녔으니 모를 수도 없겠군.”
레이얼은 이내 기세를 흩뜨리긴 했지만, 클로이의 두근거림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가시질 않았다. 그 덕에 클로이는 하늘을 날 것같이 부풀었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진정이 되었고, 뒷이야기는 더욱 빠르고 침착한 상태로 진행하기 쉬웠다.
“전하가 경계 받는 걸 알아.”
“…….”
“누가 경계를 하는지, 뭣 때문인지도 잘 알겠어. 그러니까, 아르네 공녀를 위해 매입을 하려는 것처럼 은밀하게 알아봐. 소문을 낼 필요도 없어.”
“그렇게 하면?”
“반드시 빼앗기겠지. 다만, 전하가 할 일은 이거야. 콰이펄른의 매입가를 아주 비싼 값에 불러줘. 그래야 황제가 그보다 더 비싼 가격에 사들일 테니까.”
레이얼은 클로이의 말에 짧게 웃었다.
“콰이펄른의 주인이 누군지는 아나?”
“세 번째 피앙세의 가문이지. 오겐 백작.”
“그런데도.”
“그래야 하니까. 오겐 백작은 우직하게만 보이지만, 사실 총명한 사람이야.”
클로이는 눈을 빛내서 오겐을 설명했다.
“굳이, 전하가 ‘피앙세’를 거론하며 별장을 매입하려는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황가의 금화를 받는 순간 깨달을 거야. 전하가 보내는 위로금이라는 것을 말이야.”
“진작에 주었다.”
“그건 전하의 사비잖아. 꽃 같은 딸을 잃은 부모에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제 딸을 죽인 흉수가 내미는 위로금이, 사과가 필요한 거지. 황제가 콰이펄른을 그냥 살 수는 없으니, 짧게나마 애도할 거야. 오겐 백작에게 그거면 충분해.”
“……좋아.”
레이얼은 한참만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복잡미묘해 보였다. 말은 쉽지만 황가에서 돈을 건넬 때까지 그리고 황제의 유감을 전하기 전까지 오겐측의 따가운 눈총과 원망을 받아야 할 테니 확실히 부담될 것이다. 그건 그가 어쩔 수 없이 버텨야 하는 죄의 값이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침통한 레이얼을 보자니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이상한 일이었다.
돌아오는 길, 클로이의 품 안에선 작고 귀여운 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삑삑-. 새소리였다.
“쉿쉿쉿. 아가 쉿쉿.”
클로이는 새가 울 때마다 절절매며 달랬다. 어제는 향이더니 오늘은 소리. 진짜 같은 편인 거 확실한 거지? 하얀 이마엔 진땀이 흥건했다.
“착하지? 쉿쉿. 금방 갈게. 응?”
삑-. 새는 클로이의 품이 답답한 모양인지 계속 꿈틀거리며 불만스럽게 울어댔다. 마음 같아선 말도 안 듣고 울어 젖히는 새를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적어도 무슨 일이 생겼다면 연락할 수단은 있어야 하지 않나?’
전서구를 건네던 레이얼은 클로이의 발목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꼭 올게. 이런 말이라면 됐어.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라 필요할 때 연락이 되는 거니까. 앞으론 상처를 입거든 오지 말고 새를 날려.’
‘아니, 뭐 그렇게까지. 발목도 다 나았는데.’
‘이건 위험한 일이지.’
그는 머뭇거리는 클로이에게 기어이 새장을 쥐여주었다. 새장 속에 든 것은 갈색빛의 깃털을 가진 수도 어디서나 흔하게 보이는 새로, 인식표도 없었다. 비밀스럽게 주고받아야 하는데 인식표를 달고 있으면 만천하에 주인을 공개하는 꼴이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를 훈련해 전서구로 길러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랬기에 ‘전서구’는 한 마리당 그 가격이 어마어마했기에 다들 ‘반드시’ 인식표를 붙여둔다.
‘인식표를 없앴네.’
‘달수 없으니까.’
그렇게까지 신경 쓸 일인가? 라고 생각하던 것도 잠시. 클로이는 제가 누구와 일을 하며, 무슨 일을 하는지를 떠올렸다. 그의 특별대우에 혼란하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알았어. 그럼. 얘는 어디서 날려도 전하의 방으로 간다는 거지?’
‘그렇지. 새를 부를 땐 휘파람을 짧게 두 번. 길게 한번 부르면 된다.’
그래서 받아오긴 했는데……. 전하, 이 새가 날 별로 안 좋아하나 본데? 삐삐. 이젠 부리로도 콕콕 쪼아댄다. 마음 같아서야 대충 날리고 밖에서 휘파람으로 불러낼까도 싶었으나, 한밤에 울리는 휘파람 소리만큼 수상한 게 어디 있나. 죽어도 품고 나가야 한다는 소리였다. 생각해주는 것 같았는데, 이거 다시 보니 골탕 먹이려는 게 아닌가 싶어 불끈 짜증이 치민다.
‘빌어먹을 시오도르’
줘도 어쩜 이렇게 성격 더러운 걸 줘. 삐삐!
“닥쳐 좀! 너, 로지가 새를 얼마나 맛있게 굽는지 알아?”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린 클로이가 식은땀을 훔치며 크게 발을 굴렀다. 어두운 하늘을 나는 늘씬한 인영이 드디어 마지막 황궁 담을 넘는 것으로 사방이 다시 고요해졌다. 아주 잠깐. 삐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