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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 내려올래, 잡으러 갈까? (21/121)

021. 내려올래, 잡으러 갈까?2020.11.13.

숨 막히는 대치는 길지 않았다. 저벅. 낙엽이 밟혀 바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다가온 미청년이 클로이에게 손을 뻗었다.

“내려올래?”

나무 위에 올라가 겁먹고 내려오지 못하는 아기고양이에게 말하는 듯 나긋하지만, 클로이는 남자의 녹안이 잔혹하게 번뜩인 것을 놓치지 않았다. 올려다보고 있으나, 남자의 시선은 깔보는 것보다 더 엄혹했다.

“싫어.”

“그럼, 잡으러 갈까?”

클로이는 까딱거리는 남자의 손가락을 보며 샐쭉하게 대꾸했다.

“아니. 둘 다 별로인 것 같아.”

“끌어내리면, 정말 험한 꼴 보게 될 거야. 그냥 내려올래?”

“싫댔잖아. 산책을 더 하고 싶으니 방해 말고 가줄래?”

“건방도 적당히 부려야 볼만한데, 너 지금 좀 아슬아슬해. 내려오지?”

“질척거리는 남자는 별론데.”

나뭇가지를 밟고 선 그대로 클로이는 허리를 살짝 숙여주었다. 허리를 숙이긴 하나, 시선은 절대 흐트러지지 않는다. 반듯하게 세운 목덜미와 우아하게 휜 손끝. 발코니에서 개인적인 시간을 방해받은 레이디들이 불청객에게 보내는 우회적인 축객령이었다. 그 모습에 청년의 녹안이 찰나에 크게 부릅뜨였다.

“넌, 레이디?”

“그럼 여태 내가 뭐라고 생각한 거지?”

“여긴 무슨 일이지?”

달콤한 미소는 그대로인데, 어느새 그는 칼을 빼들어 클로이를 곧게 겨누고 있었다. 클로이는 달빛에 섬뜩한 빛을 뿌리는 칼날을 보며 말을 골랐다. 레이디가 이 밤 황궁에 올법한 일이라…….

“내가 올 일이 뭐가 있겠어. 황실에 정말 귀한 보물이 있다기에 어떤지 구경 왔지.”

못마땅하게 얼굴을 구기는 남자를 보며 클로이는 능글맞게 히죽 웃어 주었다. 말을 하다 보니, 레이얼의 ‘저수지’에 도움이 될법한 게 떠올랐다.

“그래서 훔쳐 가시겠다?”

“글쎄, 정확히는 납치라고 해야 할까?”

“……뭐?”

“굉장한 미인이더군.”

황실의 보물이 될법한 굉장한 미인. 누구라고 콕 찍어 말하진 않았지만, 누군지 모를 수 없는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대번에 눈에 핏발이 설만큼 흥분해서 으르렁거렸다.

“감히 네가, 어머니를!”

“……어머니? 아, 황자님이시로군?”

어쩐지 말투가 굉장히 고압적이라고 했더니 맞닥뜨린 게 생각보다 거물이었다. 검은 머리에 녹안, 섬세한 턱선과 깊은 눈매가 어딘지 모르게 낯익다 했더니 내쉬 황자였을줄이야.

“못 알아봐서 죄송합니다. 전하.”

클로이는 싱글거리며 다시 한번 허리를 굽혔다. 황궁 연회는 황제와 황후가 오는 첫날 외엔 잘 참석하지 않았기에 클로이는 내쉬를 스치듯 서너 번 본 게 전부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내쉬는 성년전이였기에, 다 큰 그를 알아보지 못한 건 어쩌면 당연했다. 어려서도 미색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다 자란 그는 제 어머니만큼이나 사랑스러운 미인이 되어 있었다. 뭐, 내 취향은 아니지만.

“화내긴 일러 황자님.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고 난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는걸.”

“레이디!”

“잘 생각해보고 혹시라도 탐나 못 견딜 것 같으면 예고장을 쓰지. 그럼. 이만.”

나뭇가지를 쥔 손에 힘을 바짝 준 클로이는, 흉흉한 표정의 내쉬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남기며 발을 굴러 훌쩍 날았다. 부러질 듯 한껏 휜 나뭇가지가 클로이를 무섭게 쳐냈다. 내쉬가 칼을 휘둘렀으나 클로이의 도약이 훨씬 높아 스치지도 못했다.

“레이디!”

분노한 남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대장!!!”

룻거 진영의 막사에선 매일같이 고성이 오갔다. 다섯 겹을 두른 막사의 벽은 두툼해 밖으로 새나가지 않아 아무도 몰랐지만, 룻거가 돌아온 이후 민란군 수뇌부들은 매일같이 언성을 높이며 반목하고 있었다.

“이대로 해산하면 여죄를 묻지 않는다고? 이렇게 넘어가는 게 말이 돼? 분명 함정인데 왜 그걸 몰라!”

“물러날 기회를 다 차내면 이대로 버티다 기어이 내란이라도 벌이겠다는 뜻인가?”

“누가 내란을!”

“그게 아니면 버티는 이유가 뭐야? 기회를 줬는데 거부하는 순간 우리는 ‘반란군’이 된다. 삼대가 척살 당하지. 남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영지민이 몇이나 되겠나?”

“그럼, 우리끼리 죽고 끝내자 이거야?”

“누가 죽자고 했어? 아르네 공작이 살길을 열어줄 때 못 이기는 척 빠지자는 거잖아!”

“그걸 어떻게 믿느냐고.”

며칠째 대화는 제자리에서 뱅뱅 돌고 있었다. 아르네를 믿긴 하지만, 아르네 위에 군림하는 것이 황제라는 것이 문제였다. 공작은 일주일을 주었고 벌써 닷새째였다. 남은 건 이틀뿐인데, 이대로라면 시일 내에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제발, 진정하고 생각해보자고. 이제 이틀 남았어 슬슬 결정해야 해.”

룻거는 오래전, 목숨으로 결의를 다졌던 동료들에게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설령, 이것이 황실의 덫이라 이 막사에 모인 이들이 죄다 처형당한다 한들, 적어도 집에 남은 이들은 무사하지 않나.”

아직 우리는 민란군이니까. 그의 말에 막사 안의 공기가 묵직하게 깔렸다.

“아르네는 단 한 번도 제국민을 외면하지 않았어.”

“그래도 룻거 대장-.”

“굶어 죽으나 반역자가 되어 죽으나 영지민의 몰살은 확정이었어.”

“…….”

“설령 일이 잘 안 풀려서 공작께서 우리까지 구해주지 못한대도, 증세안을 막아주었으니 이미 충분하지 않나.”

상황은 변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황제는 건재했고, 공작이 민란 주동자까지 지켜내기엔 역부족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확실히 깨달았다. 공작은 할 수 있는 만큼 이미 충분히 힘을 내주었다. 거칠게 마른세수를 한 이가 푹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공작껜 오늘 말고, 약속한 날 가서 명에 따르겠다고 해.”

적어도 이틀은 더 살고 싶으니까. 그의 말에 이번엔 룻거가 아무 말이 없었다. * * * 날이 밝으면 아마 들쑤셔놓은 벌집이 되어 있지 않을까 했는데, 하루가 지나도록 황성은 조용했다. 클로이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쯤, 황성이 뒤집혀야 마땅한데 이상하다.

“그 녀석 참. 쓸데없는 데서 입이 무겁네.”

쥐고 잇던 깃펜을 질근질근 씹는 클로이의 표정엔 낭패감이 여실했다.

“결국, 레이얼 쪽에서 소문을 흘려야 하는 건가?”

작은 아들이 소문을 내고, 아빠가 몸이 닳아 엄마를 은밀히 요양 보내는 환상의 시나리오는 아무래도 물 건너간 모양이다. 쯧쯧. 영 아깝게 되었다.

“하기야 이렇게 쉽게 일이 풀리게 두면 시오도르가 아니지. 하여간 시오도르는 어리고 늙고 할 것 없이 마음에 안 든다니까.”

씹혀 엉망으로 구겨진 깃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나직이 한숨을 쉴 때였다. 똑똑.

“누구야?”

“아가씨, 저예요. 로지.”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로지는 최근 그 어떤 때보다 밝은 표정이었다. 심지어 클로이에게 금족령을 내리던 순간보다도 더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날겠네. 날겠어.”

“그 말 그대로 아가씨께 돌려드리지요.”

“내가 무슨-.”

콧방귀를 끼던 클로이의 눈이, 로지가 내민 편지를 본 순간 크게 부릅뜨였다. 클로이 디 레나나 아르네. 봉투 겉면에 적힌 특유의 필체는 분명히……!

“아빠? 지금 아버지에게서 편지가 온 거야?”

클로이는 벌떡 일어나 편지를 낚아챘다. 너무 서둘렀기에 의자가 뒤로 쿵, 넘어가기까지 했으나 로지도 클로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렴요.”

“아빠가? 언제?”

“방금요. 자, 어때요. 아가씨. 날아보시겠어요?”

“물론이지!”

클로이는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좋아죽겠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기분만으로는 정말 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편지지는 거친 것으로 질이 그렇게 좋지 않았으나, 민란군과 대치하는 상황에 공수해서 쓴 것 치고는 꽤 깔끔했다. 봉투는 반듯했고 봉랍도 단단하다. 클로이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뜯었다. ‘사랑하는 클로이’라고 써진 첫 문장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클로이는 맞은 편에서 눈을 빛내는 로지 덕에 가까스로 울음을 참을 수 있었다. 울면, 백년은 놀림당한다! 꿀꺽. 목이 메도록 삼키고 나서 읽던 클로이의 표정은 편지를 읽고 나선 환하다 못해 빛이 날 지경이었다.

“로지!”

감격이 짙게 물린 목소리가 바르르, 예쁘게도 떨렸다.

“잘 해결되셨다죠? 거봐요!”

의연한 척하긴 하지만, 로지의 목소리엔 초조함이 물려 있었다. 클로이는 오래 끌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외쳐주었다.

“곧, 오실 수 있대!”

“곧?”

“곧. 거의 막바지이고 잘 해결되었대! 출발할 때 다시 전서구를 보내주실 거래.”

“어머나. 그럼 환영회 준비를 해야겠는걸요?”

“아직 출발도 안 하셨는데?”

“연회 준비는 하루아침 만에 뚝딱 되는 게 아니잖아요.”

“맞아, 그건 그래!”

클로이는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환하게 웃었다. 공작이 민란지로 차출된 지 거의 한 달만의 일이었다.

“아아……. 아빠가 온다.”

“소공작님도요. 잊으면 서운해하실 거라고요.”

“응. 우리 오빠도.”

작게 앓는 듯 웃는 클로이의 두 뺨이 복숭앗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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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의 귀환 소식은 로지와 에반에게만 알리고 비밀에 부쳤다. 소식이 새나갔다간 어떤 식으로 황실에서 꼬투리를 잡을지 모르는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진짜 웃기다니깐. 흥.”

에반에게 입단속을 시키며 클로이는 못마땅한 듯 툴툴거렸으나, 그 와중에도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사실 그뿐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싱글벙글하였기에 클로이를 마주친 사람마다 모두 궁금해했다.

“뭐 좋은 일 있으신 것 같은데? 오늘 로지 양과 대련에서 이기셨을까?”

“대련은 무슨. 거버 선생님이 자꾸 주의하라니 로지가 방 밖으로 나가는 것도 눈치 주는 걸.”

“그래? 이상하네. 발목이 살짝 부어서 대련한 줄 알았더니?”

“앉아서 서류만 보는데!”

어젯밤 내쉬 황자를 따돌리느라, 좀 무리해서 움직이는데 역시 문제가 되었나. 의사의 지적에 내심 뜨끔했지만 클로이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구두도 안 신었는데?”

“……이상하네. 아가씨, 무리하면 절대 안 돼요. 발목이 안 아프다고 완벽히 돌아온 게 아니거든요. 당분간 좀 아껴줘야 해요. 알았죠?”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몇 번이고 신신당부하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 클로이는 다시 붕대가 묶인 발목을 보곤 작게 한숨을 쉬었다.

“로지가 보면 난리가 나겠는걸.”

하지만, 걱정하는 말과 달리 클로이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오늘 내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그날 밤 어김없이 황궁으로 놀러 가서도.

“전하! 나왔어.”

열어준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미는 클로이를 본 레이얼은 작게 신음했다. 눈꼬리를 부드럽게 접어 내린 그야말로 무르익은 미소. 하얀 이가 드러날 정도로 활짝 웃는 모습을 보자 레이얼은 이제는 익숙해진 울렁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렇게 웃지 말라니까.”

“아 왜!”

“얼굴 좀 치우거라.”

“이잇! 내 얼굴이 왜! 어디가 어때서!”

“그러게, 그 반쪽짜리 얼굴이 왜.”

왜 자꾸 사람 속을 술렁이게 하는 건지.

“후우…….”

레이얼의 한숨이 길고 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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