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어여쁘고 기특한 능구렁이2020.11.10.
“로이?”
“그럼 누구겠어?”
문 밖에서 울리는 청량한 웃음소리에 레이얼은 풀어졌던 정신이 바짝 여며졌다.
“진짜 로이라고?”
자리를 박차다시피 해서 발코니로 간 그는 문을 열자마자 손을 뻗었다. 손아귀를 확실히 채우는 가는 팔목. 힘줘 당기니, 차가운 공기를 잔뜩 머금은 마른 몸이 불쑥 딸려온다.
“로이?”
“아까부터 왜 그래?”
“오늘은-.”
“놀러 왔어.”
살짝 굳은 표정인 레이얼의 눈치를 살피듯 힐끗하더니, 로이는 가볍게 비틀어 손목을 빼냈다. 손아귀를 스치고 스르륵 빠져나가는 것이 아쉬워 하마터면 힘줘 붙들어버릴 뻔했다. 레이얼은 아직 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오늘, 놀러 왔다고?”
“응.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있어야 말이지.”
로이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턱을 까딱였다.
“왜, 안 돼? 가?”
고얀 놈. 소리 없이 한숨을 흘린 레이얼이 로이의 맞은 편에 앉아 물었다.
“발목은?”
“괜찮아.”
“…….”
“괜찮아. 조금 조심하래.”
“애초에 열흘을 이야기하지 않았나?”
“일주일만 쉬고 오라며. 오늘은 굳은 몸 풀러 나온거야.”
“내일도, 오게?”
말을 하고 나서, 레이얼은 혀를 씹어버리고 싶었다. 반색하는 말투라니.
“방해 안 할게.”
다행히 로이는 그의 말에 담긴 함의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오늘도 방해 안 할 거야. 나 신경 쓰지 말고 일해.”
턱을 괴고 생긋 웃는 모습에 헛웃음을 터트리지만, 레이얼은 조금 전과 달리 고요한 침실이 속삭임으로 채워지는 지금이 싫지 않았다. 아니, 이제야 숨통이 틔는 기분이었다. 온몸 구석구석 혈류가 도는 듯 사지로 감각이 빠듯하게 들어차고 흐릿하던 머릿속이 밝아진다.
“어휴, 서류 보는 중이었잖아? 난 까막눈이라 아쉽지만 돕고 싶어도 못 돕는 거네.”
성의 없는 거짓말을 종알거리며 로이는 한껏 흐트러진 그의 서류를 착착 정리했다.
“도우라고 안 할 테니 걱정 말렴.”
“그럼 그럼. 우리 전하는 그런 비양심적인 소리는 안 하실 거라 믿어.”
혀를 쏙 내밀어 웃는 로이의 모습에 레이얼이 잘게 고개를 흔들며 손을 뻗었다. 혹시라도 서류는 못 본다고 내빼기 전에, 그 앞에서 치워둘 셈이었다. 별 생각 없이 로이가 나눠둔 서류를 집어 들던 레이얼의 눈이 문득 가늘게 늘어졌다.
“로이.”
“응?”
“……서류를 이렇게 흩트려놓으면 안 돼.”
“흩트린 거 아니야. 분류한 거야.”
“변명은 나쁜 거야.”
들으라고 내쉬는 한숨까지. 누가 봐도 로이의 일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레이얼의 말에 로이가 발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분류야 분류! 흩트린 게 아니라고.”
레이얼은 로이의 항변에 보란 듯이 두 서류를 꺼내 들었다.
“그럼 이건 뭐야. 제방 건설 제안서랑 경작지 이용계획서가 함께 있잖아.”
“이건 같이 두는 게 맞지. 제방 건설에 보나 마나 영지민을 동원할 텐데, 아무 때나 영지민을 차출하면 안 되잖아.”
“왜?”
“왜냐니. 봄에 제방을 쌓는다고 영지민을 동원하면 그해 농사는 누가 지으라고? 가을에 조세는 어떻게 충당할 거지?”
로이를 바라보는 레이얼의 시선이 짙어졌다. 서류를 분류하는 안목이 보통이 아니다. 이건 영리하다 정도가 아니다. 영지 운영까지 곧장 짚어내는 모습이 이런 일에 익숙한 듯 보인다. 마치, 제대로 교육받은…….
‘대체 누가 가르친 건진 모르겠지만, 아주 제대로 가르쳤더군요.’
때마침 샤일로트 후작의 말이 떠오른 건 어째서일까. 로이는 다시 서류 분류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툭툭, 앞의 몇 장만 훑는 것으로 파악한 모양인지 서류를 나누는 속도가 제법 빠르다.
“로이.”
“응?”
“넌-.”
누구지?
“뭐?”
목 끝까지 차오른 속내를 눌러 삼킨 레이얼이 자신을 바라보는 로이에게 매끄럽게 웃어 보였다.
“차 뭐로 줄까?”
“나? 난, 아무거나.”
“서류는 두고 앉아.”
“다했어.”
손을 털며 웃는 로이에게 레이얼이 준비해둔 차를 건넸다.
“오, 색이 아주 예쁜데?”
“마셔.”
“고마워.”
그가 건넨 차를 한 모금 마신 로이의 눈이 잠깐 커지더니, 부드럽게 처졌다.
“이거 좋아하는 건데.”
“허세는.”
통박을 놓는 레이얼은 로이처럼 옅게 웃는 채였다. . . . 차를 깨끗하게 비운 클로이는 곧장 돌아가 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러 왔다는 건 진담이었다. 의사는 무리하지 말라고 했지만, 달팽이처럼 몸을 사리다 갑자기 움직였다간 오히려 몸에 부담이 가고 만다. 그래서 밤 산책을 겸해서 나온 길이었다. 황궁 잠입이 결코 산책과 같이 느긋한 건 아니었으나 달리 갈 곳도 없었고, 또 조금 레이얼이 궁금하기도 했었다. 잘 있는 걸 봤으니 이제 돌아가야 할 때였다. 두 걸음이나 떼었을까. 클로이는 걸음을 멈추곤 획 돌아 레이얼을 쏘아보았다.
“……”
생각해보니 좀 섭섭하다. 닷새만에 만났는데, 반가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일에 치여 산 듯 얼굴이 창백해져 있기에 안됐다 싶은 마음에 서류 분류도 해주었건만. 고맙다는 말은커녕, 흩트렸다고 욕했지! 눈치 없는 시오도르!
“전하.”
“응?”
“전하는 나중에 결혼하면, 부인에게 많이 구박받을 상이야.”
난 눈치 없는 남자가 싫거든. 갑작스러운 소리에 레이얼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클로이는 진심을 담아 다시 이야기 해주었다.
“딱, 보니까 전하는 결혼하게 되면 엄청나게 구박받게 생겼어. 내 말을 믿어. 마음을 단단히 먹거나, 갱생하는 편이 좋을 거야.”
“갑자기 왜 얼굴 타령이지?”
“갑자기는 아니고, 처음에 봤을 때부터 말해주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어.”
슬쩍 굳은 레이얼의 얼굴을 보자, 클로이는 조금 전보다 발걸음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속이 후련하다.
“내일 보자구. 전하.”
“발목 조심하거라. 부하씨.”
그의 인사에 클로이는 언제나 그렇듯 손을 들어 대충 흔들어 주는 것으로 갈음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나 했는데 오늘은 몸을 날리기 직전 클로이가 작게 몇 마디를 속삭였다.
“……뭐?”
“나 간다.”
남겨진 레이얼의 표정이 경악에 질려 있었다.
‘아까보니까 집행비를 반려했던데, 제방은 포기하는 게 어때? 시기도 맞지 않고, 효과도 크지 않을 거 같아. 대신 상류에 저수지를 만들어. 그 편이 침수를 대비하기에 훨씬 좋을 거야’
‘저수지를? 제방도 허가가 떨어지지 않는데 저수지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나?’
‘명분이야 만들기 나름이지. 콰이펄른은 자작나무 숲이 아름답지. 저수지를 만들어 배를 띄우면 풍광이 꽤 볼 만할 거라고. 저수지라 부르지 말고 아름다운 호수를 만든다고 해.’
‘그게 무슨……!’
‘조금만 서두르면 겨울이 오기 전에 만들 수 있어.’
로이는 그를 보며 빙글거리며 웃었다.
‘겨울에 수면이 얼어 그 위로 눈이 쌓이면 절경일 거야. 얼마나 예쁠까? 호수 옆 별장은 예나 지금이나 인기가 좋지. 소문을 흘려. 그럼 전하가 나설 필요도 없어. 탐이 난 미인이 알아서 황제를 움직여줄 거야.’
“아아. 진짜.”
굳었던 것도 잠시, 나직이 중얼거리는 레이얼은 옅게 웃고 있었다. 서류를 나누고, 처리하는 것만도 그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는데 저수지 건은 놀랍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심지어 로이가 말한 방법은 기상천외하기까지 했다. 장담컨대 이 일은 그가 굳이 서둘지 않아도 겨울 전에 완성될 것이다. 요즘 황후는 레이디 덕에 기분이 몹시 저조했다.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였다. 겉으로 보기에야 황제의 말 한마디에 황후가 벌벌 떨고 눈치 보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나긋한 말과 황제의 의중을 살피는 듯한 작은 제스처로 황후는 실질적으로 황제를 제 입맛대로 다루고 있었다. 철회했던 증세안이 다시 슬며시 고개를 치며 드는 건, 바로 캐서린 황후 때문이었다. 레이디가 그녀의 돈줄을 끊어버렸기에 황후가 기댈 곳은 증세안뿐이었다. 다시 지리한 싸움이 시작될 판이었는데, 로이 덕에 잘만하면 올겨울까지는 평화롭게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호수라…….”
능글맞고 뻔뻔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여간 능구렁이가 아니다. 고작 말 몇 마디를 바꾼 것인데 의미하는 바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렇게 쉽게 문제를 해결하다니 어여쁘고 기특하다. 그리고 딱 그만큼, 로이를 캐고 싶어진다. 레이얼은 어깨가 들썩이도록 크게 숨을 들이켰다. 머리를 좀 식혀야 할 모양이었다. 찻주전자를 들어, 막 잔을 채우던 레이얼은 물큰 피어오르는 차향에 작게 신음했다. 번번이 차를 마실 때마다 로이를 떠올리다니. 정말, 이게 무슨 일인지.
“하아…….”
찻잔을 집어 드는 레이얼의 잇새로 한숨이 새 나왔다. * * *
“어…… 음.”
나무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클로이는 의사가 당부하던 것의 의미를 절절히 깨달았다. 분명, 다 나았다고 했건만 담을 넘고 나무에서 뛰어내리는 정도로 발목이 흔들린다. 아프거나 꺾인 건 아니지만, 발목은 이전보다 약해져 있었다.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려면 아마도 한참 걸릴 모양이었다. 클로이는 작게 한숨을 쉬며 걸음을 옮겼다. 평소라면 뛰어서 황실 후원을 주파했겠지만, 그랬다간 분명히 발목에 무리가 갈 터였다. 곧 다시 밤거리를 누벼야 하는데 그건 곤란했다.
“그래그래. 아껴줄게.”
클로이는 짙은 그림자 안에서 천천히 걸었다. 호위기사들의 위치와 교대 시간은 이미 훤하게 꿰고 있으니 이 정도 여유는 괜찮다. 자박, 자박. 발끝에서 낙엽이 스러지며 내는 소리가 한밤의 정취와 퍽 잘 어울린다. 클로이는 어느새 이 밤 산책에 흠뻑 빠져들었다. 타운하우스에 있는 후원도 예쁘긴 했으나 부지가 영지에 있는 대공 저보다 협소하다. 그래서 이런 산책다운 산책은 오랜만이라고 해야 했다. 코끝을 스치는 냉랭한 밤바람과 낙엽은 꽤 운치가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멀지 않은 곳에 마지막 담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산책이 기분 좋았기에 살짝 아쉬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클로이는 미적거리려던 발 끝에 힘을 줘 조금 더 재빨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산책은 북부로 돌아가서 해도 되니까. 안전 제일. 아쉬움을 그렇게 다잡아가며 걸음을 옮기던 그때.
“거기 누구지?”
지척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거기!”
이런! 인기척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역시, 좀 무리가 되더라도 뛰는 편이 나았으려나. 생각지 못한 사람 소리에 클로이는 살짝 당황했다. 저벅, 저벅. 대답이 없으니 수상했던지, 발걸음이 곧장 클로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크!”
위험하네. 클로이는 재빨리 옆의 나무로 뛰어 올라갔다. 두어 번의 도약으로 클로이는 커다란 나무의 위에 오를 수 있었다. 고개를 한껏 젖혀 찾지 않는 한, 보이지 않을 만한 위치였다.
“이봐!”
클로이가 나무 위에서 자리를 잡는 것과 거의 동시에 누군가가 달려들었다. 나무에 오르기 전, 클로이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제법이잖아.
“흐.”
절로 안도의 한숨이 터진다. 목소리의 주인은 검은 머리를 한 미형의 청년이었다.
“어디로 갔을까.”
질문이 아니라 단정처럼 읊조린 남자는 이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정확히 시선을 맞추는 모습에 클로이는 내심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게 무슨…….”
그는 새파란 눈동자를 접어가며 웃었다.
“냄새가 나잖아. 향긋하게.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지.”
톡톡. 그의 손가락이 잘 뻗은 제 코끝을 두드렸다. 그의 손이 톡톡 두드릴 때마다, 클로이는 가슴이 쿵쿵 울렸다. 나, 이거 지금 좀 위험한 건가. 등골을 타고 주르륵, 식은땀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