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 머릿속을 헤집는 그 목소리2020.11.06.
겨우 닷새 만에 클로이의 발목은 멀쩡해졌다. 의사의 확인까지 끝나고 나자 클로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다 나았다는 거지?”
“왜요,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아니, 확인이지 확인.”
클로이는 붕대를 풀고 드러난 제 발목을 감회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고작 발목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호되게 앓고 내내 침대에 묶여 있었기에 클로이는 이 순간이 꽤 감격스러웠다.
“그래도 한동안은 조심하세요. 원래 한번 다친 곳은 쉽게 다치기 마련이거든요.”
왕진 가방을 챙기며 덧붙이는 의사의 말에 클로이는 냉큼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일주일 정도는 구두는 피해주시면 더 좋지요.”
“꼭, 그래야 해? 그건 그냥 권유지?”
“아가씨!”
의사는 집요하게 캐묻는 클로이의 모습에 눈을 가늘게 늘였다.
“클로이 아가씨. 얌전히.”
“거버. 지금 내가 아홉 살짜리인 줄 알아? 그런 무례한 말을.”
있지도 않은 부채를 부치는 시늉을 하며 클로이는 의사에게 턱짓을 했다. 어서어서 나가라는 뜻이었다. 로지라면, 평소와 달리 ‘구두’에 집착하는 모습에 수상하다 생각했겠으나 애석하게도 그녀는 없었다. 오늘은 식자재가 들어오는 날이었다. 기존 인원으로 타운하우스를 꾸리는 중이라, 인력난에 그녀도 나서야 했던 것이다.
“아가씨! 아가씨!”
의사는 클로이의 손에 떠밀려 어어, 하다 쫓겨나고 말았다.
“절대 무리하시면 안 돼요. 구두 안 된다고요!”
문이 쾅 닫히기 전, 당부하듯 외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의사를 내보내고 난 뒤 클로이는 곧장 설렁줄을 당겼다.
“무슨 일이세요?”
줄을 당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로지가 방으로 찾아왔다. 꽤 바쁜 모양인지 차림새가 평소와 달리 살짝 흐트러져 있다. 그 모습에 살짝 미안하긴 했지만 클로이는 태연한 표정으로 제 발목을 보여주었다.
“거버가 나 다 나았대.”
“들었어요. 안 그래도 방금, 마주쳤거든요.”
한 무릎을 꿇은 로지는 클로이의 발목을 덥석 쥐고는 예리한 눈빛으로 훑었다.
“낫긴 했지만, 절대 무리하지 않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더라고요.”
“너무 야단이야. 그거.”
“붓기도 다 빠지고, 움직임도 괜찮네요.”
“다 나았다니까.”
“그래도 조심하라고 했으니까요. 북부식으로 신발을 좀 맞춰드릴게요.”
“북부식?”
“구두는 절대 안 된댔어요. 사냥 신발 신으세요.”
구두에 집착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더니, 당장에 구두 금지령이 떨어졌다. 정확히 제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는 모습에 클로이는 웃지 않으려고 볼살을 꽉 씹었다.
“꼭 그래야 해?”
“아가씨.”
“……알았어. 신을게. 신을게. 어휴.”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사람을 불러올게요.”
로지가 나간 후 클로이는 씰룩거리던 그대로 작게 폭소했다. 안 그래도 사냥 신발이 해지기 시작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죽으라는 법 없다고 이렇게 또 숨통이 트인다.
“흐아…….”
클로이는 한시름 덜었다는 생각에 그대로 의자에 기대 몸을 늘어뜨렸다. 등받이를 타고 주르륵 미끄러져 무척 게으르고 태평한 모습이었으나 클로이의 머릿속은 전에 없이 팽팽 돌고 있었다. 에반과 로지가 움직이지 않도록 클로이와 로이가 더 잘해야 했기에 할 일이 아주 많았다.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을 정리하던 클로이는 문득, 레이얼이 떠올랐다. 못 본 지 닷새째였다. 첫 사흘을 앓느라, 생각할 여유 같은 게 없었고 그 뒤에 이틀은 서류작업을 하느라 바빴다. 밀린 서류도 끝나고 다 나았다는 소리를 듣고 나니 그를 떠올릴 만한 여유가 생긴 건지도 모른다.
“잘 있으려나.”
일주일 뒤에 보자고 했으니 아직도 이틀이 남았다. 그래도 매일 밤 봐서인지, 그를 떠올리자 잘 지내는지 궁금하고 좀 보고싶다. 밉네 곱네 하며 매일 욕을 해서 정이라도 든 걸까. 클로이는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레이얼의 모습에 나직이 웃음을 터트렸다. 뭐, 얼마나 친하다고. 무슨 사이라고 안부가 궁금해. 다 나았다는 생각에 너무 들떴나. 별 어이없는 생각이다 싶었다. * * * 키릭슨은 요새 죽을 맛이었다. 원래도 황태자는 꽤 예민한 편이었는데 요 며칠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여간 날카로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제방을 쌓을 돈을 내줄 수 없다?”
들고 있던 서류를 거의 내동댕이치다시피 한 레이얼이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집무실 안이라 그저 작은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도는 것에 불과했지만, 몇 년째 레이얼의 보좌관으로 일한 키릭슨은 그가 꽤 화나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저, 차라도 한잔 드릴까요?”
그가 집어 던져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집어 들며 키릭슨이 물었다.
“지금 차가 넘어가게 생겼어?”
“그러니까, 더욱 한잔 드셔야죠.”
키릭슨은 설렁줄을 당겨 황태자궁의 시종장을 불러 차를 부탁했다.
“곧, 세금이 들어올 텐데. 굳이 예비비를 움켜쥐고 내주지 않는 이유가 뭐야.”
“뭐긴 뭐겠어요.”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아도 이유야 훤했다. 번번이 레이얼이 하는 일마다 발목을 잡는 건 바로 증세안을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황제가 대놓고 말하지 않았고, 또한 길롯이 나서지 않았다 한들 이것이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도 된 일인지 그가 모를 것인가. 레이얼은 마른 세수를 하며 끓는 속을 다스리려 애썼다.
“제방은 지금 쌓아야 해. 추수가 끝난 지금, 겨울이 오기 전에.”
“하지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은데요?”
“계절이 겨울로 넘어가면 땅이 얼어서 공사할 수 없어. 봄에는 인력을 차출해선 안 돼.”
봄에 농사를 짓지 못하면 그해 겨울을 날 수 없어진다. 재경부에서는 내년도 세금 편성이 끝난 후 제방 공사를 하자고 말하고 있다. 세금 편성안은 보통 신년의 첫 번째 달에 결정된다. 그러니까, 한겨울이라는 뜻이다. 언 땅에 공사를 시작할 수 없으니 땅이 녹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러면 한창 농사에 바쁠 때라 사람들을 동원할 수 없다. 그러다 보면 여름이 된다. 최근 요 몇 년간 초여름 비의 쏠림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무섭게 쏟아지는 비에 종종 강물이 범람해 인근 지역이 계속 물에 잠겼다. 제방은 그래서 쌓는 거였다. 그런데 그것을 내년으로 미루자고 하는 건, 공사를 하지 말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재경부는 ‘증세’인지 내년도 ‘범람’인지를 레이얼에게 선택하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둘 다 절대 선택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에 레이얼은 자꾸만 신경이 솟았다.
“아르네 공작 쪽에서 소식 들어온 건 없나?”
“며칠 전 민란군 진영에서 전령이 왔다 갔다고 들었습니다.”
“이야기에 진척은?”
“아직은요. 전령은 살아서 돌아갔고, 아르네 공작님과 민란군의 대치도 이전과 다를 바 없다고 하고요.”
무슨 생각인 거지……. 레이얼은 길어지는 아르네 공작의 부재에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길롯의 행패는 날이 갈수록 더욱 집요하고 과감해지고 있었다. 지지세력이 약한 레이얼은 점점 더 길롯이 버거워지고 있었다.
“하아…….”
하루라도 빨리 그가 돌아와 주길 바라는 마음과 민란군과의 이야기가 잘 끝나 평화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길 바라는 두 마음이 무섭게 자라나고 있다. 똑똑. 단정한 노크소리에 키릭슨이 날 듯이 달려가 문을 열었다. 아마도 시종장이 다녀간 모양이다. 레이얼은 키릭슨이 내오는 ‘블랙잉그리드’를 보며 짧게 웃었다. 차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아 확실히는 잘 모르겠지만, 얼핏 그가 듣기로 블랙잉그리드는 여간 까다로운 차가 아니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매번 챙겨 준다고? 지나가는 말로 꽤 마음에 든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는 모양이다.
“다들 애쓰는군.”
이 무능한 자에게. 레이얼은 키릭슨이 건네는 차를 마시며 깊은숨을 토해냈다. 역시 차를 마셨기 때문일까.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날뛰던 심박이 점차 고요하게 가라앉는다.
‘걱정 마. 난 유능하잖아.’
아, 아닌가……. 레이얼은 문득 미간을 모았다. 어쩌면 차 때문이 아니라 코끝을 스치는 향에 넉살 좋게 웃는 로이가 떠올라서 일지도 모른다. 뻔뻔하고 수치도 모른다고 타박했건만. 유능한 부하씨의 자신감이 그리워지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레이얼은 찻잔을 기울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고 보니 로이를 못 본 지도 벌써 닷새째다. 약속한 날은 아직도 이틀이나 남았다. 잔잔하게 물려 있던 레이얼의 미소가 싹 걷힌 건 바로 그때였다.
“고얀 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짜 연락 한 통 없다니. 서운함이 치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다. 이내 발목은 괜찮은 건지 아니면, 덧나진 않은 것인지 슬며시 걱정이 든다. 로이는 하루에도 수천 번씩 그의 머릿속을 헤집는데, 정작 말 한마디를 건넬 수가 없다. 이쪽은 연락하지 못하는 걸 알면서! 제가 먼저 잘 지내고 있다고 연락 한 통 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건가. 생각하니 자신만 이 관계에 집착하는 것 같아 새삼 서운함이 복받친다.
“…….”
레이얼은 바닥에 깔린 찻물을 마지막으로 입안에 털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전서구라도 떠안기든지 해야지 원.”
이건 정체를 캐는 게 아니니까 괜찮을 성싶다. 적어도 연락수단 정도는 마련해두어야 하는 게 아닌가.
“키릭슨. 은밀히 전서구 한 마리를 구해와.”
“예, 예?”
그의 빈 찻잔을 채우던 키릭슨은 뜻밖의 소리에 가엽게도 눈이 동그래지고 말았다.
“전서구를 가져오라는 말씀이세요? 하지만 아시잖아요. 황실 전서구들은 인식표를 달고 있어서 빼돌렸다간 금방 잡히는걸요.”
“그럼, 다른 데서 구해와.”
“예에? 아니 그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억지는 무슨. 유능한 부관이라면 이 정도는 척척 해와야 하는 거 아닌가?”
로이는 뭘 요구해도 말 한마디 하는 법이 없는데. 겨우 새 한 마리 구해오라는 말에 안된다는 소리부터 하다니. 살짝 괘씸하다.
“내일까지면 되겠나?”
“예에?? 그러지 마세요. 제가 어디 가서 그 새를 구해오겠어요?”
“설마, 격려까지 해가며 시켜야 하는 건가?”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가지고 오면 되겠네.”
“전하, 정말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비열하다는 소리보단 낫네. 자, 이제 욕도 했으니 이만 나가봐. 얼른 구해와야 하지 않겠어? 곧 해가 질 텐데. 밤은 금방이라고.”
반나절 남았다는 그의 우회적인 말에 키릭슨이 마치 쫓겨나가듯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레이얼은 블랙잉그리드의 향을 깊게 들이마시며 의자에 기댔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붉다.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빠르고, 또 견딜 수 없을 만큼 느리다. 레이얼은 지는 해가 불러올 밤을 떠올리다 한숨을 터트렸다. 또 밤이 온다. 로이가 없음을 선명히 느껴야 하는 그 밤이.
그날 밤, 레이얼이 낮동안 처리하지 못한 서류를 들고 어떻게든 해결하려 끙끙거릴 때였다. 똑똑.
“또 시작이네.”
어느새 깊은 밤이 되었다고 생각하자마자 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었다. 레이얼은 머리를 가볍게 털어 환청을 이겨내려 했으나, 또다시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엔 절로 한숨을 쉬고 말았다. 로이. 그 녀석이 뭐라고 사람을 이렇게 뒤흔드나.
“후.”
긴 숨을 막 뿜어낼 때였다.
“전하! 자?”
너무도 선명한 로이의 목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