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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 허락받지 못할 갈망 (18/121)

018. 허락받지 못할 갈망2020.11.03.

“어, 어, 떻게!”

엘리오의 인사에 룻거는 꽤 당황한 표정이었다. 비장의 한 수라고 생각한 것을 단번에 간파당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일단 그대도 자리에 앉지?”

“……아, 예.”

룻거는 정신이 반쯤 나가 아르네 공작이 권하는 대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일일이 동요하다니. 순박하기도 하지. ‘조직적이고 계획된 반역도의 무리’라고 떠들던 이들에게 좀 보여주고 싶은 얼굴이다. 엘리오는 헛기침을 하는 척 손을 들어 웃는 입매를 자연스럽게 감추었다.

“공작님.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순진하다 못해 바보스러운 소리에 엘리오는 볼살을 질끈 씹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 가여운 민란군 대장을 앞에 두고 폭소를 터트리고 말리라.

“혹시 저희 진영에 매수…….”

“배신자 같은 건 아닙니다.”

가만히 두면 민란군 내에 분열이 일어날 것이라 엘리오는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기억 못 하시겠습니까?”

엘리오는 자연스럽게 아르넬 공작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며 제 앞머리를 쓱, 넘겼다. 찰랑거리는 백금발을 늘어뜨리고 웃고 있을 땐, 마냥 성격 좋고 유쾌한 청년의 얼굴이었는데 머리칼을 넘기는 것만으로 인상이 확 바뀐다. 옆자리에 앉은 아르네 공작을 그대로 빼닮은 냉엄한 얼굴. 그야말로 조각 같은 얼굴이다. 새파란 눈동자가 날을 바짝 세운 칼날 같다. 꿀꺽. 시선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오르는 위압적인 기세에 룻거는 자신도 모르게 뻣뻣하게 굳었다.

“작년.”

“예?”

룻거는 처음에 엘리오가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작년에 덕분에 목숨을 구했는데. 기억 안 나십니까.”

“그게 무슨…….”

자신이 아르네 소공작같이 까마득한 분을 언제 보기라도 했다고. 갸웃거리는 룻거를 향해, 이번엔 엘리오가 손을 들어 하관을 가렸다. 그 순간 룻거는 머리를 스치는 한 광경에 그만 턱을 떨구며 경악하고 말았다.

“엇? 넌 그때! 아니아니, 소공작이셨습니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엘리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경악하는 룻거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 . . 작년 추수철, 남부에 북부 괴수가 출몰해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아마도 북부에서 남부 경계까지 길게 이어진 산맥을 타고 한 무리가 내려온 모양이었다. 북부였으면 별일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괴수들이 산맥을 타고 내려온 곳이 남부라는 점이었다. 남부는 곡창지대로 동물들이 대개 작고 온순했다. 사람들은 처음 본 집채만 한 괴수들을 두고 우왕좌왕할 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피해는 엄청나게 불어났다. 그러길 만 하루 만에 북부에서 기사들이 내려왔다. 북부 기사가 오면 뭐가 달라지겠나 생각했지만, 직접 보는 순간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워낙에 북부인은 골격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는 있으나 기본으로 머리 하나는 큰 모습에 다들 찔끔했다. 그러나 남부 사람들을 놀래킨 건 골격 정도가 아니었다.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빠르기와 괴수와 맞붙어서도 밀리지 않는 힘이라니. 그들은 이틀만에 남부 전역으로 퍼져나가 일대를 넝마로 헤집은 괴수무리를 정리했다.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심지어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었다! 그렇게 일이 정리되고 북부로 떠나는 기사들을 배웅할 때였다. ‘끼이이익’ 그날따라 유독 영지 관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에 시선을 든 룻거는 기사들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문짝의 상부를 보고 말았다.

‘피해!’

룻거는 뭔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앞에 가는 기사를 힘껏 떠밀었다. 덩치 좋은 기사를 충분히 떨구지는 못했지만, 간발의 차로 머리가 깨지는 참사를 피할 순 있었다. 보이는 건 두 눈뿐이었으나 유독 명도 높은 새파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마치, 지금 눈앞의 소공작처럼.

“맙소사.”

엘리오는 경악하는 룻거를 향해 이가 드러나도록 크게 웃어주었다.

“제가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그럼요. 그럼요.”

과거의 인연이 꼬여 대척점에 선 채로 조우하게 될 줄이야. 무척 복잡한 심경에 룻거는 곤혹스러워졌다. 미간을 일그러뜨리는 룻거와 달리, 온화하고 다정한 미청년의 모습으로 돌아온 엘리오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자. 그럼 오늘도 그날처럼 모두 살아볼까 하는데 어떠십니까?”

“어떻게요?”

마치,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답이 있다는 듯 다디단 말에 룻거는 매달리듯 묻고 말았다.

  스윽,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와 함께 드디어 마지막 서류까지 모조리 끝났다. 클로이는 옆에서 부어터진 얼굴을 한 로지에게 서류 뭉치를 가져가라는 듯 턱짓을 했다.

“이제 그만 좀 하세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로지, 이제 그만 할 때도 안됐어?”

“얼마 전만 하더라도 서류 보기 싫어서 내내 앓는 소리를 하셨잖아요.”

“지혜열이 쉽게 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야.”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가 뭐예요?”

농담으로 슬쩍 넘겨보려 했는데, 로지가 강경하게 나온다. 클로이는 눈을 부라리는 로지를 피하듯 슬쩍 시선을 돌리곤 그대로 뒤로 벌러덩 누워버렸다. 층층이 쌓아 올린 베개는 쓰러지는 클로이를 몹시 폭신하게 받아내 주었다.

“로지. 난 이번에 깨달은 게 있어.”

“뭔데요?”

“일을 미루지 말자.”

“……아가씨가 언제부터 성실하셨다고요?”

“일단, 아버지랑 오빠가 돌아오기 전까진 성실한 공녀님이어야겠다는 걸 깨달았다고 하자.”

“그러니까 갑자기 왜요?”

로지의 말에 클로이는 눈을 바짝 접으며 웃었다.

“그렇지 않으면, 로지와 에반이 반란을 일으킬 거 같아서.”

“한동안 연무장에서 뛰더니 이번엔 어휘에 문제가 생기신 건가요? 아가씨 그건 반란이 아니라, 반기를 든다고 말씀하셔야죠.”

“그런가?”

“얼렁뚱땅 정신 빼놓을 생각이시라면 접으세요. 아무리 그러셔도 서류는 더 이상 가져다드리지 않을 거예요.”

로지는 클로이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대놓고 말해도.

“반역은 안 돼.”

“그 말씀 그대로 돌려드릴게요. 차 한 잔 드려요?”

“아, 응.”

로지는 혹시라도 클로이가 뭔가 더 할까 봐 커튼도 치고, 불도 최소한으로 줄여버렸다. 사방이 포근한 어둠에 휩싸였다.

“차, 준다며.”

“기다리시다가 그대로 잠들어도 괜찮을 것 같네요.”

“걱정 마. 동틀 무렵 자는 데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너무 쌩쌩해.”

“…….”

아차, 이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까. 로지의 눈초리가 바짝 섰다. 가뜩이나 쉬라고 닦달하는 로지 앞에서 밤 나들이를 이렇게 당당하게 말해버리다니.

“아가씨.”

“아, 쉴게. 쉴게. 쉰다고.”

“……언제까지 나가실 거예요?”

“한동안은.”

“꼭 가셔야 해요?”

“응. 할 일이 좀 있어서.”

“제가 함께 가는 건 당연히 허락하지 않으실 거고요.”

“알면 이제 그만 가서 차를 가져다주겠어?”

“아가씨.”

“로지이.”

“딱 한 말씀만 드릴게요. 밖에서 뭘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수도 상황이 좋지 않아요. 괜히 ‘레이디’라고 오해를 사지 않게 조심하세요.”

“오해라니! 내가 레이디인걸!”

“레이디 아르네…… 재미없으니 그만 하세요.”

로지는 클로이의 말에 지쳤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달칵. 문고리가 걸리는 쇳소리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침대에 누워있던 클로이가 해쓱한 얼굴로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나중에 클로이의 말이 진짜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로지가 지을 표정이 떠올랐던 탓이었다.

“진짠데.”

아무리 생각해도 웃겼다. * * *

“…….”

레이얼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밤이 되자 도통 집중을 할 수 없을 만큼 로이가 떠올랐다. 로이가 늘 찾아오던 시간이 되어서일까. 습관이란 게 참 무섭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레이얼은 서류를 검토하는 이 고요한 시간을 꽤 즐기는 편이었다. 그 누구도 그를 방해하지 못할 온전한 그의 시간. 그랬는데. 고작 그 시끄러운 녀석과 얽힌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고즈넉한 새벽을 적막하다고 생각하나.

“하…….”

서류는 한 시간째 같은 페이지에서 넘어가지 못하고 그대로였다. 아무리 집중하려 해도 어디선가 울리는 로이의 목소리에 자꾸 시선이 흩어져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전하도 봤어야 했다고! 엉엉 우는데 얼마나 웃겼는지 몰라.’

‘이제 정말 겨울이 오려나 봐. 아까 오는데 바람 냄새가 다르던걸.’

쉬지 않고 떠드는 소리에 수다스럽다며 통박을 주었건만 어째서 이제 와 그 소리가 그립기라도 한 듯 자꾸만 떠오르는 건지. 레이얼은 아예 몸을 뒤로 젖혀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았다.

“뭘까…….”

내리깐 속눈썹 사이로 차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가 먼 곳을 더듬듯 아득했다. 꽤 긴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레이얼의 시선에 초점이 돌아왔다.

“이런!”

레이얼은 흥분에 살짝 상기되어 낮게 부르짖었다. 그는 자신이 어째서 ‘로이’를 자꾸만 떠올리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이렇게 불러도 될지 모르겠으나 로이는 그의 첫 친구였다. 모후인 줄리아나 황후가 세상을 등진 건 까마득히 먼 옛날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를 잃고도 울어선 안 됐다.

‘의연하게 행동하십시오.’

검은색 예장을 한 그에게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말했다. 의연하라고, 울어선 안 된다고. 어머니를 잃고 레이얼이 가장 처음 배운 것은 ‘감정’을 버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능숙하게 감정을 갈무리하게 되자 사람들은 또 그랬다.

‘황태자에 어울리는 능력을 갖추셔야 합니다.’

온갖 사교 예법이며, 역사와 정치를 비롯해 각국의 언어까지 그가 능숙해져야 하는 것은 숨이 막히도록 많았다. 어렵다 힘들다는 투정은 애초에 떠올려보지도 못했다. 모두가 당연하게 해내야 하는 일이라고 했기에 레이얼은 허덕이면서도, 내색 없이 꿋꿋하게 버텼다. 검술과 체술을 익히고 악기를 배우고 사교춤을 익히고 외국어를 모국어처럼 능숙하게 구사하기까지의 시간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하루가 너무 짧아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 기억도 없었다. 그에게 유년기는 어느 날 정신을 차렸더니 어른이 되었더라 하는 정도의 감상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일상을 나누는 친구가 있을 리가 있나. ‘전하도 보면 좋았을 걸’ 같은 소리는 처음이었다. ‘연회에서 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라는 말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알겠는데, 로이가 하는 말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그만 뻣뻣이 굳고 말았다.

“…….”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는 지금 생각해도 역시,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로이가 그의 생각보다 자신에게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겨우 만 하루 만에 자신은 ‘로이’의 공백에 동요하고 있다. 그리고, 이 순간 레이얼은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로이가 걸었다는 자긍심 말고는 로이에 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대로 로이가 와주지 않으면 그대로 끝인 관계. 레이얼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뭐든 알아내야 해!’

이름이건, 집이건, 하다 못해 얼굴이라도. 그건 명백히 그들의 계약에 위배되는 갈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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